Inheritor of an Alien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5
5. 고모할머니 (4)
쇼핑을 하고 법무법인을 갔다가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식사를 하실 거죠?”
“그렇게 하자.”
집에 당도하자 집사인 레이튼 크로마가 바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고 밖으로 나갔고 둘만 집안으로 들어갔다.
“제가 준비할 것이니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혼자 있더라도 먹는 것은 잘 챙겨먹는 김세인이었기에 저녁을 준비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음식을 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편이라 다양한 음식을 준비했다.
“남자 혼자 사는 데도 반찬을 많이 준비했구나. 마치 명절에 음식을 장만한 거 같아. 여기에 막걸리만 있으면 한 잔 걸치면 잔칫상이겠고.”
“그럴까요? 집에 막걸리도 있죠.”
그러면서 냉장고 한쪽에 있는 막걸리를 챙겨왔다. 막걸 리가 있는 것은 술 식초를 만들기 위해 얼마 전에 사다놓은 것이었다.
막걸리를 냉장고에 오래두면 아래로 하얀 것이 가라앉는데 시간이 흐르면 식초가 되었다. 위에 있는 맑은 물만 따로 따르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할 수가 있었다.
대접을 가져와서 막걸리를 따랐다. 나이가 드셨어도 정정한 편이라 막걸리 정도는 마셔도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한 것 같구나. 애는 왜 낳지 않았는지? 돈은 어떻게 벌었는지? 그럼에도 묻지를 않아?”
막걸리를 연이어 두 잔 정도 마신 후에 그렇게 반문을 했다. 김세인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만 다소 민감한 문제이고 상처를 건드는 것일 수가 있어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띠야? 말띠 여자 사주 사납다고 며느리로도 받지 않으려고 해. 얼굴도 기가 세게 생겼고. 내 키가 168이야. 그 당시에는 남자 키로도 큰 키인데 하물며 여자로서는? 더구나 아버지마저 혼인할 무렵에 돌아가셨지.”
당시에는 여자나이 열여섯이면 혼담이 나왔다고 했다. 더구나 고모할머니를 낳고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신 탓에 ‘어미 잡아먹은 년’이라는 낙인까지 찍혀서 기피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보통 동네 사람들의 지인으로 중매가 들어오는데 그런 것이 없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온다고 해서 피난을 가기로 했는데 운이 좋게 미군의 트럭을 탔어. 태워준 사람이 중위인 헨드릭 에센셜 이야. 간부나 되니 민간인을 트럭에 태워줄 수가 있었지. 내가 맘에 들어서 태웠다고 하더라.”
그걸 인연으로 미군 주둔지 근처에서 다시 만났고 자신이 미녀라고 말해주는 남자를 만나자 빠져들었다. 거기다 다른 가족들을 도와주기까지 하니 맘에 들었다고 했다. 그 덕분에 할아버지네도 조금 편했다고 했다.
“미군이 파주에서 주둔하다가 서울 근처로 이동했지. 네 할아버지는 한강 아래로 내려갔어. 중공군이 밀고 오면 강 건너기 어렵다고. 헨드릭을 만나는 문제로 사이가 틀어진 나는 용산 부근에 남았고. 사실 헨드릭 에센셜 중위가 마련한 일종의 영외거주지에 머물렀고. 동거를 했지. 그 주변에 그런 여자들이 많았지.”
그러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미군기지 주변에 그들을 상대로 하는 여자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미군은 보급이 좋았지. 당시 말로는 반품은 없고 유일한 반품은 환자와 시신만 이루어진다고 했지. 후방으로 물건을 가져갈 여력이 없었지. 거기다 전쟁을 하는 판에 빨래도 못하는 상황이라 옷부터 모든 것이 다 일회용이고 재활용은 없었어. 속옷도 한 번 입고 버리고 심지어 군복도 그랬어. 그래서 군부대에서 나오는 각종 폐기물품을 받아서 사용했지.”
그 실상에 대해 말했는데 어이가 없으면서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은 텐트를 치고 주둔을 했는데 보급이 엉망이었다. 너무나 많은 보급품이 내려왔다. 부대원은 70명인데 편제 기준에 100명으로 되어 있으면 100명의 보급품이 왔다.
거기다 두 번이 올 때도 있고 식료품은 유통기간이 짧아 보급품이 모자라지 않으면 무조건 폐기해야 했다. 폐기하는 것도 문제라 결국 그냥 버리는데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업자들이 달려들기도 했다.
거기다 미군부대로 피난민을 위한 구호품까지 내려오는데 그걸 배분해야 하는데 그걸 귀찮기도 하고 눈 먼 물건이라 업자들에게 처분을 했다. 규정대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허다했다.
처음에야 정신이 없었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서 고모할머니도 그런 사정을 알게 되고 뭔가 자기 살 길을 찾게 되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일을 찾았고 그런 부분의 브로커로 나서기 시작했고 헨드릭도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러다가 소일거리로 군복 수선일을 배웠다. 처음에는 헨드릭의 옷을 만졌고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나섰다. 미군의 체형은 한국인과 달리 컸다. 그러니 군복을 개조하지 않으면 한국 사람이 입을 수 없었다.
군복이 워낙 커서 스몰 사이즈만 그대로 입을 수 있고 나머지는 개조하여 염색한 후에 유통했다는 말을 했다.
“나도 하루에 한두 벌, 나중에는 서너 벌까지 개조를 하기도 했어. 같은 여자들 중에서 장교 집에 있는 나는 가장 위에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옆에 브로커들이 항상 있었어.”
폐기물품에서 우선권을 가진 헨드릭 중위 덕분에 다양한 많은 물품을 받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강남으로 내려갔고 그 이후에 한 번 만났지만 말다툼만 하고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중간에 살던 집을 옮겼고 헨드릭이 대위로 진급하면서 보직마저 이동했다고 했다.
“휴전이 되고 마침내 미군의 철수가 진행되면서 헨드릭도 귀환 대상자가 되었지. 나도 헨드릭이 손을 써서 미군 수송선 자리 하나를 얻을 수가 있었어.”
당시에 출국 절차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도 몰랐고 헨드릭이 가져온 서류 한 장으로 배를 타고 내릴 수가 있었다. 임시여권인데 미군에서 발급한 것으로 한국에서의 인적사항은 하나도 기록이 되지 않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미국 갈 때 돈이 좀 있었어. 무려 2천 달러나 있었지. 병사들 반년 봉급은 되는 돈이었어. 오빠를 만났다면 돈을 좀 주었을 텐데 만날 수가 없었지. 한 번 연락이 끊어지면 끝이었고.”
막걸리를 마시다가 떨어지자 맥주를 가져다가 다시 마시기 시작했다.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다.
“미국에 가서 부대로 면회를 온 헨드릭의 부모를 만나게 되었지. 난리가 났어.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이 당연한 시대였고. 영어를 할 줄 몰랐다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말이 통하니 좋지 않은 소리를 다 알아들었어.”
3년 동안 동거를 하다가 헤어졌다. 부대에 있는 헨드릭만 보고 있을 수는 없기에 일을 찾았고 할 수 있고 돈 되는 것이 봉제일이라서 그 일을 했다. 당시 부대 앞에는 다운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술집, 음식점이 많았고 그런 군인을 상대로 하는 여자들도 많았다.
“테일러 김, 그게 내 별명이었지. 의상실도 많았고 거기서 일을 받아다가 하루 종일 했지. 꽤 돈도 모았지. 그러면서 이민자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도 참여를 했어. 운전 면허도 따고 공부도 하고 영어검정도 통과하고 그러면서 학력도 인정받고.”
그러다가 헨드릭과 동부로 전출을 가는 문제로 인해 이견이 생기고 결국은 결별을 했다고 했다. 물론 중간에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기도 했고 결혼 문제로 인해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그 사람이 군대 온 것은 출세를 위해 온 것인데 사실 집안이 꽤 좋은 편이었고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강행하면 지원을 받지 못할 상황이었지.”
결국은 미국에 온지 3년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만날 생각이 들지 않았고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찾으려고 하면 찾겠지만 그럴 맘이 들지 않았다고 했다.
“위자료로 한 4만 달러 정도 받았어. 그 여자의 엄마가 2만 달러를 주기도 했고. 거기다 일해서 한 1만 달러 벌기도 했고 가진 돈도 있었고. 그래서 새 출발을 했고 대학도 진학을 했고. 섬유공학과에 들어갔어. 그나마 할 줄 아는 것이 그것이니.”
스탠포드에 합격을 한 후에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갔고 거기서 대학에 다니면서 의상실을 하기도 했고 슈퍼마켓도 했다고 했다. 아울러 대학에 들어간 덕분인지 마침내 시민권도 획득을 할 수가 있었다.
“기지촌에서 알게 된 여자들 몇을 데려왔지. 그들과 같이 동업을 했어. 돈은 내가 대고 그들은 가게를 맡아서 운영했지. 한순간에 수십만 달러를 벌었어.”
대학에 다니면서 돈을 대어 장사를 시작했고 하는 일마다 성공했다고 했다. 의상실부터 미용실, 슈퍼마켓, 패스트푸드 음식점. 화장품 가게 등을 운영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LA로 진출하여 장사를 했다. 기지촌에서 알았던 여자들 중에서 괜찮은 사람을 끌어들여 샌프란시스코처럼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1965년 즈음에는 백만장자가 아닌 천만 장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국을 처음으로 방문했다. 한국에 가는 직항편이 없어 하와이, 도쿄를 거쳐 서울로 왔다. 서울에 와서 할아버지를 찾으려고 했지만 일주일 사이에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류업부터 각종 유통에 손을 댔고 그러면서 부동산이나 투자에 손을 댔지. 1980년경에는 대략 1억 달러를 가진 부자가 되었어. 실패도 했고 부도날 위기도 있었지만 그럭저럭 해결하기도 했고. 사실 유산을 하면서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그러면서 헨드릭과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가 이후에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같이 살았을 것인데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그분도 알았어요?”
“아마 몰랐을 거야. 내가 유산한 것만 말했지 그 사실은 말하지 않았으니. 그 때 처음으로 한국인 여의사와 알게 되기도 했지. 서로 알지 못했으니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거야.”
아이를 갖지 못하는 상황이라 결혼 자체를 포기했고 그렇기에 남자를 사귀기도 했지만 결혼을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입양을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것도 자격이 되지 않았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입양할 수도 없고 하려고 하면 하겠지만 절차가 워낙 복잡했지. 더구나 사업을 하는 입장이라 애를 데려와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지.”
그래서 지금까지 계속 혼자 살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 60이 넘자 굳이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나 싶어 사업을 정리했고 LA를 떠나 지금 사는 곳으로 갔어.”
그러면서 부동산 임대업과 투자로 방향을 선회했다고 했다. 오히려 사업을 할 때보다 돈을 더 잘 벌게 되었다고 했다.
“사업을 하면서 한인들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를 않았어. 실향민이라 종종 북한과 연결이 되지 않는지 의심을 받기도 했고.”
그래서 꽤나 부자이지만 한국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LA한인회에서도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지 잘 모른다는 말을 했다.
일종의 넋두리일 수도 있고 신세한탄일 수도 있는 파란만장한 고모할머니의 일생을 말하였고 김세인은 그저 추임새만 한두 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이후에 김세인도 부모에게 들은 집안의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