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An Adult Game As A Former Hero RAW - Chapter (239)
버럭 소리치던 르베우스는 자신의 영혼이 조금씩 흐려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부 나처럼 됐다고? 그럼 그들 모두가 붙잡혀 있다는 이야기인가?”
“네? 음, 그렇죠?”
“어째서 그런 번거로운 짓을? 귀찮게 구는 몇몇은 죽여도 되는 것 아닌가?”
“그거야 당연히 하나하나가 귀중한 에너지원이니까-”
“못 죽이는 건 아니고?”
일순간이지만 레아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에 르베우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너희들 나를 죽이지 않는 게 아닌 못하는 거였군?”
“…”
“그 침묵을 보아하니 맞는 모양이군. 그래, 그럼 그렇지. 필멸자가 초월자를 멸할 수 있을 리가 없어.”
필멸자가 죽음을 맞이할 경우 그 영혼은 윤회의 고리에 들어가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초월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들의 영혼은 격이 너무 높은 나머지 윤회의 고리에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의 존재를 지우는 방법은 그저 영혼을 소멸시키는 방법밖에 없다.
한지수가 레아의 주인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초월자들을 상대로 고전했던 이유가 바로 그 탓이었다.
죽일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죽을 수도 있는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하고 있었으니까.
“네 말대로 죽이지는 못해. 그런데 그게 위안이 돼? 죽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러울 텐데 말이야.”
레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르베우스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큭큭… 아까 말했지 않나? 나의 혈족들이 나를 찾으러 올 것이라고. 그들은 반드시 나를 찾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겠지. 기대해라.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의 혈족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니까. 네놈들이 비참하게 죽을 날이 기대가 되는군.”
“아… 그래요? 그럼 기대하고 있어요. 네 가족들은 바로 옆에 붙여줄 테니까.”
레아가 손날을 세웠다. 더 이상 르베우스의 개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한이 있더라도 빠르게 영혼을 집어삼키려는 생각이었다.
“잠깐.”
그런 레아의 행동을 한지수가 멈춰 세웠다. 레아가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주인님? 설마 저런 헛소리에 넘어가신 건 아니죠?”
“틀린 말은 아니잖아. 저놈 말대로 지금은 어떻게 넘어가도 결국에는 덜미가 잡힐지도 몰라.”
“큭… 두렵긴한가보군.”
“넌 닥쳐!”
레아는 힘조절도 잊은 채 강하게 르베우스를 걷어찼다. 덕분에 르베우스는 피를 토하며 다시는 입을 열지 못했고, 레아는 그를 신경 쓰지도 않으며 한지수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걸 걱정할 거면 예전에 그 일부터 벌이지 말았어야죠! 지금보다 더한 짓도 벌여놔 놓고 이제와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때는 나 혼자였고 지금은 혼자가 아니잖아.”
“예? 그게 무슨…”
“레아. 가둬뒀던 혼들 전부 흡수해.”
레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진심이세요? 언제는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고 싶다면서요?”
“그랬지.”
“확실하게 말해요. 한 번 흡수하면 예전으로 못 되돌리니까. 해요? 말아요?”
“해.”
한지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에 레아는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별일이 다 있네.”
한지수가 인간으로 살고 인간으로 죽겠다고 했을 때 솔직히 레아는 상당히 언짢았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해야 백년에 불과하다. 물론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지만 그래도 한 삼백년쯤 살면 몸에 노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럼 서서히 늙어가다가 평범한 인간처럼 죽겠지.
어쩌면 한국사람으로서 죽겠다며 딱 평균 수명만큼만 살고 자살했을지도 모르고.
레아는 그것이 매우 싫었다.
그녀의 주인이 되었으면서 그녀를 두고 혼자 떠나려는 게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불가항력이 아닌 그의 의지라는 사실이 정말 미웠다.
그렇기에 레아는 지금 한지수가 내린 결단이 기꺼워마지않았다.
“그저 귀찮은 해프닝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괜히 여자가 꼬여서 안 그래도 감성적인 성격 더 심해지는 것 아닐까 걱정도 했었다.
기우였다.
골칫거리라 생각했던 그 여자들은 오히려 한지수의 책임감을 자극하여 과감한 결단을 내리도록 만들었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레아는 짙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코어를 돌렸다. 코어에 갇힌 영혼들이 한데 뒤섞이며 고통스러운 절규를 내질렀다. 그러나 그녀는 내면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무시한 채 영혼의 융합에만 집중했다.
귀한 것들은 섞고 잡스러운 것은 빼고.
그렇게 완성된 고결한 혼을 레아는 한지수에게 넘겼다.
혼을 넘겨받자 한지수는 순간 몸이 안쪽에서부터 터져버릴 것 같은 거대한 압력을 느꼈다. 융합된 혼의 격이 너무 높아 발생한 일이었다. 그것을 넘겨받은 게 웬만한 자였다면 몸이 터지고도 모자라 근방을 날려버렸겠지만, 한지수는 코어의 근육에 힘을 꽉 주는 것만으로 요동치는 혼을 안정시켰다.
이윽고 그는 넘겨받은 혼을 온전히 흡수시켰다.
변화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금이 간 피부가 떨어져나가고 새로운 피부가 올라왔다. 머리카락과 털들은 탈색되며 타들어가고 그 자리를 새롭게 자라난 털이 채웠다.
근육과 뼈가 찢어지고 부서지기를 반복하며 육체의 격을 영혼에 맞추려고 들었고, 이내 그의 몸 어느 곳에서도 필멸자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후우…”
충족감을 느끼며 한지수가 눈을 떴다.
충격에 빠진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르베우스가 보였다.
“주인님. 제대로 됐는지 확인해보세요.”
“그래.”
한지수는 르베우스의 머리에 발을 얹었다. 그대로 강하게 힘을 주자 짓밟힌 머리가 으깨졌다. 으깨진 머리는 재생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초월자의 육체를 부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심란해진 마음에 한숨을 내쉬려니 옆에서 ‘우와아…’하는 감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뻥 뚫린 구멍에서 두더지처럼 얼굴만 빼꼼 내민 이리에스가 눈을 반짝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에스의 반짝이는 눈빛에 한지수는 한순간이지만 할 말을 잃었다.
뭐지?
친구인 르베우스가 내게 당하는 것을 봤을 텐데 왜 저런 표정이야?
혹시 그건가?
방심을 유발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
그가 생각에 잠긴 동안 이리에스가 감탄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해요…”
“뭐?”
“필멸자의 몸으로 초월자가 되신 거잖아요? 이건 초월자들 중에서도 태초의 분들 분이나 가능했던 일이에요. 그 이후로 전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주 희귀한 일이고요. 그런데 그런 일이 제 눈앞에서 펼쳐지다니…!”
이건 운명이에요..!
“이름이 한지수라고 했었나요? 좋아해요. 저랑 사귀어주세요!”
이리에스가 흥분한 듯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며 고백했다.
한지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지금 잘못들은 건가?”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네가 나한테 고백이라도 한 것처럼 들었어.”
“그럼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
한지수는 눈을 깜빡거리며 이리에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 질세라 이리에스 또한 그와 눈을 마주 보았다.
“오 시발 세상에. 너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이야기… 아, 그거로군. 살고 싶어서 하는 말-”
“제 마음은 진심이에요! 음해하지 말아주세요?!”
“지랄 좀 하지마. 나는 방금 네 친구를 죽였어. 그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것에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해?”
“르베우스라면 이미 말했잖아요. 그냥 오래 알고 지낸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그런 것 치고는 이놈은 널 아끼는 것 같았는데?”
“상대방이 절 좋아한다고 해서 제가 응해줘야 할 의무라도 있나요?”
이리에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 말에 한지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분명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상당히 아니꼬웠다.
그의 표정이 썩어 문들어지자 그녀가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이상한 오해 하시면 안 돼요. 저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고요. 그런데도 저쪽에서 계속 달라붙어온 거예요.”
“안 물어봤어.”
“말로 안 해도 표정으로 다 보인다구요?”
“허어…”
한지수는 탄식을 흘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언제 한 번 족치려고 벼르고 있었던 여신이 돌연 좋아한다고 고백해오니 얼탱이가 없어진 탓이다.
‘대체 왜 저 지랄이지, 진짜?’
한지수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이리에스에게는 그녀만의 사고관이 있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고위 초월자들을 동경했다.
소위 노블레스로 분류되는 그들은 개개인 모두가 스스로의 힘으로 필멸의 굴레를 벗어던져 초월자에 이른 자들이었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에서 창조한 셈.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그들은 단지 태어난 것만으로 초월자가 된 이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협력한다는 가정 하에 숫자로 훨씬 앞서는 일반 초월자들 전체와 싸워 밀리지 않을 정도로.
거기에 고위 초월자들은 태초의 초월자들로부터도 환대받았는데, 아무래도 같은 길을 밟아 초월자가 된 만큼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태초의 존재들은 피를 이은 혈족보다 고위 초월자들을 아끼기도 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초월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동경했다.
성격이 유별난 이리에스의 경우에는 두려움보단 동경하는 마음이 더 강했다.
때문에 한 때는 자신이 직접 그런 존재를 만들어 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필멸자라는 것은 나약하기 짝이 없어서 시련이 너무 가혹하면 꺾여버리고, 반대로 이것저것 퍼주면 해이해져버린다.
수백 번의 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결국에는 포기하고 말았는데…
그렇게 포기하고 단념했던 일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뱁새가 껍질을 깨고 봉황이 되어 날아오르는 모습을 보았는데,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리에스가 두근두근 긴장한 상태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니 한지수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주인님. 쟤는 어쩔 거예요?”
“어쩌긴? 죽여야지.”
이리에스는 슬그머니 도망칠 준비를 했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시 찾아가면 된다. 어차피 초월자들인 그들에게 널린 것이 바로 시간이니까!
그런데 막상 도망칠 준비를 하니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엥? 진짜 죽이시게요? 주인님 좋다는 여자를?”
레아가 이리에스를 죽이는 것에 거부감을 표현한 것이다.
“뭐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주인님을 여기로 끌고 온 게 이 여자가 아니라는 건 이미 판명됐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논 녀석이야.”
“그게 뭐 어때서요?”
“…뭐?”
한지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뜻 살벌하기까지 한 그 표정에 레아도 살짝 긴장했다.
“너… 내가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진정해요. 내 말은 그거예요. 다른 사람 운명을 가지고 노는 건 이 여자 같은 신들뿐만이 아니잖아요. 당장 이쪽 세계 귀족들만 해도 노예들 잔뜩 부리잖아요? 주인님네 세계도 신분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물론 다르죠. 다른데, 그놈들은 내버려 두면서 얘한테는 그렇게까지 까다롭게 굴 필요가 있냐는 거죠. 까놓고 말해서 잘못은 우리가 더 많이 했어요. 저들끼리 잘 먹고 잘 노는 곳에, 그러니까 얘네들 집에 우리가 무단 침입해서 깽판을 친 거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그렇게 되냐고…”
한지수가 짜증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불만은 사라지지 않은 듯했으나 처음의 그 사나운 기세는 많이 죽어있었다.
주인을 잘 아는 레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얘를 잘 이용하면 씹아싸인 주인님도 저쪽 사회에 잘 섞여들 수 있을 걸요? 그렇게만 되면 주인님이 아끼는 인간들이 위험해질 일도 훨씬 줄어들지 않을까요?”
“…”
한지수는 고민에 빠졌다. 저쪽 사회에 섞여 드는 일에는 조금의 흥미도 일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안전해진다면 고려해볼 만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한지수가 말했다.
“일단 가둬놔. 당장은 결정을 못 내리겠어.”
“넹.”
레아는 이리에스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눈높이를 맞춰 쪼그려 앉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이리에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 저를 도와주시나요?”
“그쪽한테는 빛을 졌으니까요.”
한지수가 인간을 포기하고 초월을 선택한 데에는 이리에스가 그간 저질러온 변태적인 행위가 어느 정도 공헌했다.
그렇기에 레아는 이리에스의 목숨만은 살려주고자 한 것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실리적인 이익을 취하려는 것도 있었고.
“짧게는 몇 년, 길면 몇십에서 몇백 년을 갇혀 지내야겠지만 너무 원망하지는 마요? 나도 이게 최선이었으니까.”
“에이, 원망 안 해요.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고. 그 정도로 노블레스 남친이 생기면 오히려 좋은 거지.”
“…어, 그래요?”
그게 짧은 시간이라고?
여전히 초월자들의 사고는 이해 못 하겠다. 그리 생각하며 레아는 이리에스의 심장에 손날을 꽂았다.
이리에스가 저항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육체는 얼마 안 가 힘없이 쓰러졌다.
레아는 그걸 한쪽 어깨에 걸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남은 한 놈을 가리켰다.
“저건 어째요? 아직 살아 있는데.”
르베우스.
그는 육체가 붕괴되어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영혼은 소멸되지 않은 채 여전히 남아있었다.
한지수는 짧은 고민 끝에 말했다.
“가둬 놔.”
“네. 오랜 친구랬으니 사이좋게 이리에스 바로 옆자리로 해둘게요.”
“…잔인한 년.”
남자의 순정을 길가의 잡초 밟듯 짓밟는 레아를 보며 한지수가 고개를 도리질쳤다. 그러다 잊고 있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네. 레아. 이것도 흡수해서 나한테 넘겨줘.”
“뭔데요? 응? 그거 주인님이 쓰던 가짜 몸이잖아요. 그거 먹어서 좋을 게 없을 텐데요? 지지예요. 그냥 안 먹으면 안 돼요?”
“응, 안 돼.”
이래 봬도 애 아빠거든.
한지수의 단호한 답변에 레아는 한숨을 내쉬며 클라우드의 심장에 손끝을 꽂았다. 울컥울컥. 그녀의 팔에 두꺼운 핏줄이 돋아 오르며 맥박 쳤고 그럴수록 클라우드의 신체는 메말라갔다.
가죽과 뼈만 남은 상태가 되고 나서야 레아는 손끝을 빼냈다.
“흡수했어요. 그래서 이제 어쩌실 생각이에요? 주인님 애인들 있는 곳으로 돌아갈 거예요?”
“그래야지.”
한지수의 몸이 뒤틀리며 클라우드의 형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클라우드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가 손을 대충 휘젓자 공간이 찢어지며 포탈이 열렸다.
클라우드는 포탈에 발을 디뎠다.
쏴아아-
일렁이는 공간의 틈새를 넘어 그가 도착한 곳은 황궁 정원의 중앙 분수였다.
나무를 손질하던 정원사가 비어있던 장소에 갑작스레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무 놀란 나머지 쩍 벌어진 그의 입이 천천히 흔들리며 소리를 내었다.
“클라우드… 님..?”
정원사는 클라우드의 생김새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클라우드도 정원사를 알았다. 그는 정원사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고 그에 눈앞의 남자가 클라우드임을 확신한 정원사가 소리쳤다.
“클라우드 님이다! 용사님이… 용사님이 돌아오셨어!”
그의 외침에 정원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정원사의 목소리를 들은 하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달렸고, 듣지 못한 이들도 그냥 그들을 따라 달렸다.
그렇게 하인들이 모이며 공허했던 정원 중앙 분수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모이자 클라우드는 쓰게 웃으며 포탈을 열려고 했다.
그때였다.
“길을 비키십시오!”
익숙한 목소리가 정원에 메아리쳤다. 혼란을 빚던 하인들은 놀랍게도 그 외침 한 번에 고개를 조아리며 옆으로 물러섰다.
그렇게 터진 길 너머에 금발의 기사가 서있었다.
기사를 본 클라우드는 피식 웃었다.
“도망간 거 아니었냐?”
“언제까지나 도망칠 수는 없잖아. 받아야 할 벌은 받아야지. 게다가 황명이라서 거절할 수도 없었어.”
“거절할 수 없기는. 전령 정도야 가볍게 두들겨 패서 돌려보낼 수 있는 녀석이.”
클라우드는 기사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쨌든 잘 선택했다. 마르스 너한테는 도망 같은 건 안 어울려. 차라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돌파하는 게 낫지.”
“…나도 이제 책임져야 할 여자가 있는 남자거든? 목숨이 위험해지면 미련 없이 도망칠 거야.”
“퍽이나 그러겠다.”
사천왕의 군세를 혼자 상대하는 놈이 말이야.
“됐고, 다들 어디에 있어?”
“곧 있으면 다 함께 내려오실 거야. 형이 딱 타이밍 좋게 티타임에 돌아왔거든.”
마르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궁 본관의 문이 열렸다. 집사들이 문 앞에 대열을 맞춰 서고 그 후에야 그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릴리테, 카타리나, 레슬리, 셰디아 그리고 아이를 품에 안은 로렌느까지.
그녀들은 계단 바로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발바닥이 땅에 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내려 클라우드를 바라볼 뿐.
“나보고 올라오라는 건가…”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몇 주만의 재회에서 이러는 걸 보면 말이다.
클라우드는 난처함을 느끼며 최대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하나 아무리 천천히 움직인다고 한들 결국 목적지에는 도달하는 법. 클라우드는 다섯 여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들의 앞에 서자 아까까지는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에 봉착했다.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지?’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클라우드의 남자로서의 직감이 말했다. 지금의 선택이 앞으로 남은 결혼생활을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것을. 이왕이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클라우드에게는 크나 큰 위기였다.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클라우드가 1초라는 시간을 아주 짧게 쪼개어 사고를 가속시켜야 할까, 고민할 때였다.
여인들 사이에서 로렌느가 클라우드를 향해 한 발자국 걸어 나왔다.
그 행동에 클라우드는 흠칫 떨며 긴장했으나 다른 여인들이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로렌느는 클라우드의 앞에 섰고 그녀는 자신이 안고 있던 딸아이를 클라우드에게 내밀었다.
아이를 받으며 어리둥절해하는 클라우드를 향해 그녀가 말했다.
“뭐해? 돌아왔으면 아이에게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잖아.”
그 말에 클라우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홀린 듯 고개를 내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부… 아바..!”
아이가 배시시 웃으며 클라우드의 얼굴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가슴이 울컥 북받쳐 오르는 것과 동시에 올라오는 눈물을 삼키며 클라우드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딸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