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ection RAW novel - chapter 39
“왜요?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요?”
“아니요. 답답해서요.”
“뭐가요?”
“기억이 안 나는 게요.”
이제는 그녀가 그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진짜 전혀 기억이 안 나세요?”
“네.”
“신기하네요. 그런데 일은 가능해요?”
“절차기억에는 문제가 없어서 생활하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아, 그렇구나.”
퇴원했을 때, 의사가 해준 설명.
진실은 아니지만, 종종 유용하게 써먹는다.
“준태 오빠 가게 개업 파티에서 만났어요, 우리. 준태 오빠는 기억해요?”
준태? 모르겠다.
“그것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하긴, 준태 오빠랑도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했어요. 아는 후배의 아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아는 후배의 아는 사람?
나주연이 그렇게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의 개업 파티에 갈 정도로 사회성이 좋은 남자였던가?
“다행이네요. 준태 오빠는 기억하는데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왠지 씁쓸할 것 같았는데.”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라고는 검찰청 사람들과 배달음식점들 연락처 빼고는 없는 사람이?
교통사고 이후로 걸려온 전화라고 해봤자, 스팸을 제외하면, 대검찰청 강력부 과장검사 기정국이 고작이었는데?
아, 맞다. 기정국!
「일단은 나 프로 차 브레이크에 문제가 있는 걸로 정리했으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기자 쪽도 손을 써서 그냥 단순 교통사고 정도로 넘어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그때는 아무것도 몰라 이상한 점을 못 느꼈지만, 이제는 안다.
대검찰청 강력부 과장검사가 이제 막 검찰에 들어온 평검사에게 연락해서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검사 배역에 집중하느라, 잊고 있었던 정보들이 그녀와 대화하면서 떠올랐다.
“나주연 씨.”
그런데 이상하다.
기정국은 그 이후로 연락한 적이 없다.
나주연과 기정국은 도대체 무슨 사이인 거지?
“나주연 검사님!”
그녀의 목소리가 어찌나 카랑카랑했던지, 주위에 있는 커플들이 일제히 우리를 쳐다봤다.
“죄송해요. 순간 일 생각이 좀 나서.”
“처음 봤을 때도 그러더니, 그런 거는 안 잊어버리나 봐요. 그런 것도 절차기억에 포함되는 건가요? 절차기억이 뭔지는 잘 모르지만 ······.”
갑자기 모든 게 궁금해졌다.
근데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아예 감이 잡히지 않는다.
교통사고. 능력. 기정국. 금고. 거기에 이 여자 이은채까지.
아닌가? 이 여자는 상관없는 건가?
“설마 지금 또 일 생각하시는 거예요?”
“네? 아닙니다.”
“검사, 변호사들은 원래 다 그렇게 일이 많은가 봐요? 아는 오빠도 그러던데······.”
이은채는 그 이후에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혼잣말 같은 그녀의 말에 주연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그녀의 말수도 줄어든다.
눈치가 아예 없는 여자는 아니었다.
“일이 진짜 많나 보네요. 아까 한 사과는 받아줄게요.”
엉겁결에 하기는 했지만, 이게 정말 사과할 일이었던가?
재미있는 아가씨다.
“고맙네요.”
“좋아요. 그러면···일이 많아서 연애할 시간도 없을 것 같고. 나랑 썸이나 탈래요?”
그녀의 마지막 질문에 복잡했던 머릿속 생각이 다 날아 가버렸다.
애초에 정리된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우리 썸이나 타자고요, 나주연 검사님.”
아, 질문이 아니었다.
권고였다.
요새 애들은 이렇게 연애하나?
—*—
다음날 점심.
서초동, 도흥식 변호사 사무실.
“컥- 컥- 그래서 뭐라고 그랬어?”
친구로부터 어젯밤 있었던 일을 듣던 흥식의 목에 마시던 물이 걸렸다.
“뭘 뭐라고 해. 그냥 알았다고 했지.”
“진짜? 그럼 이제 그 단발머리랑 사귀는 거야?”
“머리가 조금 길었더라. 썸이라니까.”
“도대체 그 썸이 뭔데?”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
“그니까, 그게 뭐냐고?”
“난들 아냐. 니가 물어봐라.”
“알았다고 했다면서?”
“그럼, 거기서 알았다고 하지 뭐라고 하냐? 연애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연애를 하자는 게 아니면 뭔데?”
“썸을 타재잖아.”
“아이씨, 그러니까 썸이 뭐냐고!”
“나도 몰라.”
“그래도 넌 연애 좀 했잖아. 느낌이 있을 거 아냐.”
연애······. 몇 년 전 얘기냐.
게다가 열 살도 더 어린 여자다.
세대가 다르다.
“친구 먹자는 거 같아.”
“친구?”
“요새 애들은 이성 친구랑 친구 먹을 때 그러는 것 같아. 그러다 좋아지면 연애하는 거고, 아니면 말고.”
복잡하다.
정의는 인터넷에서 찾아본 ‘썸’의 정의를 흥식에게 설명했다.
“도대체 그게 뭐야?”
“왜? 결혼하기 전에 동거들 많이 하잖아. 비슷한 게 아닌가 싶다. 연애 전에 썸.”
“그럼 너 그 여자랑 동거하는 거야?”
“아이씨- 진짜. 말이 그렇다고.”
“알아, 알아. 농담이잖아. 어찌 됐건 동거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썸타자’는 그 여자의 말도 일단 고백 같은 거네. ‘마음은 있는데 아직 연애까지는 아니다.’ 뭐 그런 게 아닐까? 하긴, 너한테 마음이 있으니까, 세 번이나 무시당하고도 전화해서 만나자고 했겠지. 아무튼 요새 애들은 어려워. 그래서 너는 그 여자랑 사귈 마음은 있고?”
“없어.”
“근데 넌 왜 썸탄다고 했어?”
“말했잖아. 연애하자고 하는 것도 아닌데, 거기서 싫다고 하기도 뭐 했다고.”
“그랬다가, 나중에 그 여자가 사귀자고 하면? 어쩌려고?”
“너라면 사귀자고 하겠냐? 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열 살도 더 많은 아저씨인데.”
“왜? 그럴 수도 있지. 띠동갑들도 많은데. 그리고 일단 패키지가 훌륭하잖아. 아무튼 너도 더 만나볼 마음은 있는 거네. 짜식, 좋으면서 아닌 척은.”
비록 고작 7개월 정도밖에 살아보지 않았지만, 송정의가 느낀 나주연은 미니멀한 라이프스타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준태라는 사람의 개업 파티에 참석해 이은채에게 전화번호를 물을 정도였다면, 어떤 이유가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어쩌면 오토바이 교통사고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우연한 만남이었을 수도 있지만, 이은채는 지금 그의 앞에 흐트러진 퍼즐 조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조각이었다.
정의는 더 만나보고 싶었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고. 오늘은 왜 부른 건데?”
“그래, 네가 알아서 하고 보고만 해.”
“보고는 무슨···. 왜 불렀냐니까?”
“왜 불렀냐고? 음······정의야.”
“뭐야, 이 새끼. 또 왜 징그럽게 부르는데. 왜?”
“나···정혜랑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다.”
“진짜! 새끼, 그래서 불렀구만! 손위처남의 축복을 받고자. 야, 야, 축복해줄게. 그래, 축하한다. 하하. 야, 난 너 오랫동안 고백 못 할 줄 알았는데···. 새끼, 내 동생이 놓치기 싫긴 싫었나 보네.”
“그게 사실은······.”
“사실은?”
“정혜가 먼저 사귀자고 했어.”
“뭐? 정혜가?”
내 동생 정혜가?
강단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였어?
하긴 정혜도 우리랑 다른 세대인가······.
“네가 답답해 보였나 보네.”
“그런 거지? 그런 게 맞겠지?”
“어찌 됐건 축하한다.”
“그래서 청혼은 내가 꼭 하려고.”
“그래. 그것도 빼앗기면 쪽팔린다. 그건 꼭 네가 해라.”
“오케이. 그래. 그건 내가 해야지. 다음 달에 하는 건 좀 빠르겠지?”
“뭘? 청혼을? 뭐야? 나 죽어서 1년은 기다렸다 한다며?”
“그렇지? 좀 빠르지? 아니, 정혜가 먼저 사귀자고 해서 그냥······.”
“그냥 뭐? 벌써 결혼에 골인한 거 같냐? 천천히 해, 인마. 이제 막 연애 시작했는데, 꽁냥꽁냥 좀 즐겨야지.”
“그렇지? 조금 빠르지? 그래, 알았다.”
늘 형제 같은 친구였지만, 정혜하고 정식으로 사귄다고 하니 더 끈끈해지는 뭐가 느껴진다.
“그렇다고 또 너무 뜸 들이지 말고.”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 내 공소장 내가 써보도록 노력할 테니까. 내 동생이랑 데이트 많이 해라.”
“진짜? 괜찮겠냐? 그거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닌데.”
“여태껏 내가 준 거 그냥 부장한테 패스한 거 아냐. 나도 공부했어. 처음부터 잘하지는 못하겠지만, 초안 잡으면 네가 검토해 줘.”
“그거야 물론 해주지.”
그렇게 하나씩 진짜 검사의 모습을 갖춰간다.
—*—
서초경찰서, 강력팀.
“가을바람이 좋네요, 경위님.”
“며칠 전에는 일이 많다고 시를 쓰더니, 오늘은 또 바람 타령이냐?”
“어제 부는 바람과 오늘 부는 바람이 다르듯이, 원래 우리네 인생이 그런 거잖아요.”
“야, 너 가서 여명808 사 먹어. 술이 덜 깬 거 같아.”
“경위님도 참. 며칠 전에 먹은 술이 덜 깨겠습니까. 이건 가을바람 때문인 거죠.”
“주사를 부리니까 그렇지. 가을바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주인아가 술이 덜 깬 후배 차동석에게 핀잔을 주고 있는 사이, 강력팀 팀장이 다급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주 경위, 강남 팰리스호텔에서 살인 사건 시체가 발견되었대. 빨리 나가봐.”
용의자는 권준태였다.
살인자 (1)
나는 살인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