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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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격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완전히 넝마가 되어 버린 옷을 조심스럽게 벗기며 미엘이 묻는다. 제랄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흑요호가 파훼되면서 반작용에 걸려버렸어.”
“엣?”
미엘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흑요호까지 전이시켰을 줄이야. 사생결단을 내려고 마음이라도 먹었단 말인가. 게다가 그렇게까지 하고서도 오히려 파훼당하고 반작용으로 이런 부상을 입다니.
“아야야…”
“아, 많이 아프세요?”
“그냥 좀… 쓰라려서…”
유아는 얼른 온천물을 담아 와서 조심스럽게 상처를 씻기고 있었다. 신성력으로 회복을 시키더라도 혹시나 감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간단하게라도 씻기고 소독을 해야 한다. 특히나 지금처럼 전신에 부상을 입은 경우라면 작은 상처라도 우습게 볼 수 없다.
카트린이 이런 제랄딘의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크게 놀랄 것이 분명한 터라 온천 안으로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옷을 갈아입는 장소에서 처치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상처 자체는 그리 깊지 않아서 피가 엉겨 붙은 옷을 벗긴 후 씻기고 회복을 걸자 금방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마워요, 유아님. 역시 신녀님이시라 그런지 정말 말끔하게 나아 버렸네요.”
“별 말씀을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는 무리하지 마시고 안정을 취하시는 것이 좋아요.”
“음…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지만, 신녀님이 그렇게 하라면 따라야겠죠.”
치료를 마치고 몸을 일으키자 미엘이 가운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걸쳐주며 말했다.
“그럼 오늘 던전 탐색은 이걸로 끝나는 건가요.”
“왜? 나는 그냥 슬슬 따라다니기만 해도 되지 않나? 다른 분들도 있으니.”
“에이. 자기들끼리 다녔다고 서운해 하실 거면서.”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온 제랄딘에게 유아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이렇게 될 정도로 싸우다니.”
그녀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제랄딘이나 미엘은 그녀가 고향을 벗어난 뒤 처음으로 사귄 친구들이나 다름없는데, 이번 일로 혹시라도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음… 그냥 간단하게 대련을 한다는 것이 그만 서로 너무 진지해지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네요.”
“세상에. 좀 조심하시지.”
“그러게요. 아하하하.”
미엘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제랄딘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 다만 그녀로서도 불안함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이번은 대충 좋게 넘어 간다 쳐도 다음에 형진이 또 훔쳐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역시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나았을까.
-후아아아아… 너무 좋다아…
온천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림이 탄식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 모습이 보인다. 카트린은 하마란의 품에 안긴 채 온천욕을 즐기다가 셋을 반긴다.
“언니! 어서 들어와요. 너무 따뜻해요!”
“정말요?”
“네!”
요즘은 카트린도 제랄딘과 미엘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사라졌다. 전에는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더니 이제는 유아나 하마란에게 하듯이 친밀한 태도를 보여주지는 않아도 최소한 모른 척 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나름 장족의 발전인 셈이다.
제랄딘과 미엘, 그리고 유아는 걸치고 있던 가운을 한쪽에 걸어 놓고는 온천 안으로 들어갔다. 뽀얀 김이 올라오는 따뜻한 온천 안에 몸을 담그자 그대로 몸이 녹아내리는 착각마저 느껴질 정도다.
“후우으으으으… 아고고고고…”
미엘은 탄성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무방비 상태에 가까운 표정이 되어 버린다. 카트린을 제외하고는 가장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진 주제에 마치 할머니 같은 반응을 보이자 함께 탕에 들어와 있던 여자들 모두가 웃음을 터뜨린다.
“그나저나 오늘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응? 오늘? 무슨 소리야?”
“원래 며칠 정도 던전 안에서 버틸 생각으로 나왔잖아요. 하지만 지금 상황대로라면 저택에서 출퇴근해도 될 것 같아서요.”
“아하.”
대역을 세워놨고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경우 바로 연락을 받을 수 있도록 대책도 세워놓긴 했지만, 모든 일에는 변수가 있게 마련이고 아무리 완벽한 대책이라도 구멍은 있게 마련이다. 괜히 왕국 최고 가문의 영애가 밤마실을 다닌다는 식의 소문이 나봐야 좋을 일이 없으니,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일단 출퇴근쪽으로 가닥을 잡는 것이 좋은 일.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랄딘은 어쩐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좋은 사람들과 자유로운 일상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버리는 것이 아까운 탓이다.
“음… 어쩔까나.”
제랄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서 온천물을 손바닥으로 떠올리며 찰박찰박 물장난을 치고 있던 카트린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럼 오늘 전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거에요?”
“응?”
그 말에 잠시 무슨 소린가 하던 모두는 이내 카트린이 저택이란 말을 형진의 저택으로 알아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 그래도 되나요?”
“그, 그게…”
제랄딘이 반짝거리는 시선으로 묻자 유아는 대답이 궁해지고 말았다. 형진과 맺어지긴 했어도 정식으로 결혼한 것도 아닌 이상 아직 그녀에게는 이런 식의 일을 결정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방금 전의 일도 있고 해서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유아로서도 또래의 친구들과 밤을 함께 보낸 적이 없어서 살짝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고.
“아마도… 되지 않을까요?”
“고마워요. 유아님!”
“아, 아뇨. 저야말로.”
예상대로 형진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선선히 허락했다. 오히려 유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이렇게 말했을 정도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이상 일일이 허락을 받을 필요 없어.”
“정말요?”
“단, 조건이 있다.”
어쩐지 선선히 허락하더라니. 유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떤…”
“메이드의 친구로서 오는 거라면 메이드가 되는 것이 당연한 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에엣?”
말도 안 돼.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도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콧방귀를 뀔 텐데, 하물며 제랄딘은 왕국 최고 가문의 금지옥엽이다. 단 며칠에 불과하더라도 귀빈으로 대접하지는 못 할 망정 메이드라니?
“내 집에선 내가 법이지. 불만 있어?”
“으으…”
다른 이의 집에서 외박한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제랄딘에게 이런 얘기를 어떻게 전하나 싶어 울상이 된 유아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서 제일 높은 신녀도 내 집에선 메이드인데 뭘.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만.”
하지만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본래 희망과 생명의 신녀였던 이가 메이드가 된게 아니라, 메이드였던 이가 신녀로 벼락출세한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울상이 되어서 유아가 형진의 말을 전하자, 화를 낼 거라 생각했던 제랄딘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못 말리는 변태씨라니까.”
다만 그녀 안에서 형진의 이미지는 이제 빼도 박도 못 하는 변태로 확정된 모양이다.
“어떻게 하실래요? 아가씨.”
미엘이 스산한 표정으로 한 손에 불꽃을 만들어낸 채 물었지만, 제랄딘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어쩔 수 없지. 아까의 일은 그걸로 잊어버리기로 약속했으니 그걸 트집 잡을 수도 없는 일이고. 집 주인이 그걸 바란다면 까짓 하루쯤 메이드 체험을 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그 변태씨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수도 있는데요?”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지 않을까?”
“아가씨!”
“에이, 농담이에요. 언니. 쿡쿡.”
미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제랄딘의 태도나 말로 미루어 형진에게 알게 모르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흥미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난감 같은 종류의 것을 대하는 정도의 것과 동급 수준이긴 하지만, 남녀의 일이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니 아무래도 자신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결국 제랄딘의 일 때문에 그들은 그날 하루는 푹 쉬기로 결정을 내리고 온천욕을 마치자 그대로 그리칸으로 귀환했다.
“최고 사제님. 안녕하세요.”
“으헛! 아, 안녕하세요.”
잠시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혼자서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최고 사제는, 다시 한 번 형진과 그의 일행들이 타운 포탈을 통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 저흰 신경 쓰지 마시고 마저 쉬세요. 그럼 이만.”
“…”
마치 자기 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의 방을 빠져 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최고 사제는 타운 포탈의 위치를 옮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유아는 일단 제랄딘과 미엘이 머물 방부터 살폈다.
“음… 좀 더 큰 방은 없나요?”
“네?”
“기왕이면 모두 함께 지낼 수 있는 방이면 좋겠어요.”
“모두 함께요?”
“네. 전에 보니까 메이드들은 그렇게 큰 방에서 합숙을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더군요. 기왕 하려면 제대로 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어, 그게…”
유아는 아무래도 자신이 결정하기는 어렵다 싶었던지 형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와 같은 제랄딘의 의견을 전했다.
“파자마 파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군.”
“파자마 파티요?”
“그런 게 있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해. 침대를 옮기는 건 하마란에게 시키면 되겠고… 이번 기회에 카트린도 참가시키면 좋겠지.”
“아…”
그제서야 유아는 제랄딘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단순히 친구의 집에서 묵는다는 정도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만큼은 귀족 가문의 금지옥엽이라는 굴레를 벗고 모두 함께 친구로서 즐기고 싶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가서 준비할게요!”
“그래.”
따지고 보면 친구가 필요한 것은 유아도 마찬가지다. 형진은 밝은 표정으로 달려 나가는 유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우르르 쏟아 내었다.
“캬아. 역시 사냥은 이 맛에 한다니까.”
형진이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아이템들이다. 오늘 던전을 돌며 얻은 것들이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모습을 보니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다. 그냥 보통 아이템이라도 눈이 돌아갈 텐데, 이것들 모두가 희귀급 아이템이기까지 하다.
“어디보자.”
바로 강화를 할까 하다가, 임프의 머리핀을 집어 올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른 액세서리와는 달리 머리핀은 몇 개까지 착용이 가능한지 판별하기가 애매하다. 막말로 머리카락만 있다면 얼마든지 착용할 수 있는 것이 머리핀이니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 강화를 하기보다는 무작정 많이 착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으니 확인을 해볼 필요가 있다.
“마침 적당한 녀석이 있군.”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종을 울려 하마란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말투가 정중한 것이 괜히 기분 나쁘다. 이전까지는 눈빛이며 태도에 반항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다.
무슨 꿍꿍이인거냐. 이 녀석.
“침대는 다 옮겼나?”
“네.”
역시 힘 하나는 끝내준다. 솔직히 남자라도 그 시간 동안 침대 몇 개를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거늘.
“뭐… 됐고. 이것 좀 해봐.”
“…”
형진이 하마란에게 해보라고 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바늘에 실 꿰기. 이번에는 하마란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을 차례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건가, 이 남자는.
“뭐해? 얼른 해보라니까.”
“네.”
어쨌든 시키는 일이니 순순히 따라한다. 어쩌면 아바타일 수도 있는 존재이니 조심하고 삼가는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하지만 의외로 바늘에 실을 꿰는 그 단순한 일이 하마란에게는 쉽지 않았다.
“뭐랄까. 손재주가 없는 건 알았다만, 이 정도일 줄은. 너,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
십 분 동안 끙끙거리면서도 결국 하마란은 바늘에 실을 꿰는 그 단순한 일을 성공하지 못했다. 눈이라도 나쁘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다. 다만 바늘과 실을 잡는 순간 알 수 없는 조바심과 강박관념과 짜증이 몰아치며 손을 부들부들 떨다가 바늘을 뚝 하고 부러뜨리는 일을 반복했을 뿐이다. 이 정도면 정말 궤멸적인 손재주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