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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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각인의 집행자
뒷마당에 있는 큰 물통 세 개를 모두 채우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게임이라면 인벤토리에 물통 몇 백 개 정도는 단숨에 겹쳐서 넣을 수도 있지만, 지금 형진이 가지고 있는 인벤토리는 무게 제한 때문에 그런 일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들고 있던 물통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설명하기도 애매한 일이라, 결국 형진은 개울을 수십번씩 왔다 갔다 하며 물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어머, 어머. 저 팔뚝 좀 봐.”
“침 좀 닦아. 이 여편네야.”
“남말 하네. 자기는 어떻고.”
동네에 치마를 두른 여자란 여자는 죄다 몰려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후덕한 인상의 아줌마부터 시작해서, 코흘리개 꼬마에,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죄다 몰려나와 어머 어머를 연호하니 형진으로서는 어쩐지 스타가 된 것 같은 느낌에 어깨가 으쓱할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 소란스런 갤러리들의 시선을 응원 삼아 물통을 모두 채우자 다시 채집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이것도 오랜 만에 하니까 힘드네.”
그래도 게임 시스템이 적용된 건 확실히 맞는 모양이다. 현실이었다면 갑자기 이런 중노동을 했다가는 어디가 삐끗해도 했을 터. 하지만 지금의 그는 조금 피곤한 것 빼고는 오히려 기운이 펄펄 남아도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다.
물론 그렇다 해도 과신은 금물. 언제 어디서 삐끗할지 모르는 일이라 형진은 어깨와 허리를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어주다가, 문득 시야 한쪽에서 깜빡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임무?”
아까는 이런 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경황중이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일단 그것에 주의를 집중하자 마치 두루마리가 확 펼쳐지듯 내용이 그의 눈앞에 드러났다.
[진행 가능한 임무 목록] [긴급 운송] -임무를 수행중인 형제로부터 긴급한 운송 임무가 들어왔다.-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반트 동화 5개, 팩션 공헌도 2.
[물자 조달] -임무를 수행중인 형제로부터 물자 조달의 임무가 들어왔다.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가스트 주화 100개, 팩션 공헌도 1.
[물자 조달] -임무를 수행중인 형제로부터 물자 조달의 임무가 들어왔다.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돌란 동화 7개, 팩션 공헌도 3.
[수배자 처형] -제국으로부터 범죄자에 대한 수색과 처형 임무가 들어왔다.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에데루스 은화 2개, 팩션 공헌도 10.
[복수] -원한을 갚고자 하는 시민으로부터…
“이건…”
목록을 보는 순간 형진은 비로소 ‘될 수 있으면 임무는 성실히 수행하라.’라는 계율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각인의 집행자는 상부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으면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성도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임무를 원하는 대로 골라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임무 역시 단순히 누구를 죽이라든가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의 임무 수행 중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한다거나, 성도가 아닌 다른 자에게 긴급히 물건을 운송하는 식의 의뢰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무조건 임무를 부여받아 그것을 수행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임무를 발주하는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암살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면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잠입이나 위장에 필요한 정보 같은 것 뿐만 아니라 각종 물자 역시 포함되는데, 뛰어난 조사관이라면 이런 물자의 흐름을 통해 암살에 관여한 이들의 행적을 추적할 수도 있다. 물자 조달이나 운송 임무 같은 보급 관련 임무들은 만에 하나라도 그런 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성도들의 행적을 효율적으로 은폐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생각보다 훨씬 체계적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던 형진은 문득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암살이나 처형, 복수처럼 누군가를 죽이는 식의 임무는 보수도 크고 목록에 올라오기가 무섭게 후딱 사라지는데 반해, 물자조달이나 운송 임무는 목록에 뜨고서도 한참이나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하다. 힘들게 암살신의 성도가 되었는데 다른 이들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싶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보상도 상대적으로 적으니 그만큼 손이 안 가는 것이리라. 암살 임무는 보통 은화부터 보상이 시작하는데 반해, 물자조달 같은 임무는 비싸봐야 동화이고, 아예 주화로 보상이 주어지는 경우도 흔했다. 팩션 공헌도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고.
“흠…”
하지만 형진은 일반적인 성도들과는 아무래도 상황이 달랐다. 애초에 가트처럼 누굴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도 아닐뿐더러, 성도가 된 것조차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니 말해 무엇 할까. 어차피 생활 레벨을 올리려던 참이니, 겸사겸사 임무도 하면서 공헌도는 물론이고 돈까지 벌 수 있으면 그야말로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논에 물까지 대는 격이다.
“운송은 아직 지리를 모르니 일단 제껴 두고… 물자조달부터 봐야겠군.”
두 번째에 자리한 물자보급을 선택하자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난다.
-필요한 물자: 통나무
-수량: 10개.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가스트 주화 100개, 팩션 공헌도 1.
(주의) 뗏목을 만들고자 합니다. 별첨된 길이와 두께를 준수해 주십시오.
“통나무 열 개라… 이 정도가 공헌도 1 수준인가.”
이 정도면 그리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목은 채집 스킬도 제법 잘 오르니 나쁘지 않다. 가는 김에 약초 같은 것을 덤으로 캐도 좋은 일이고.
임무를 수락한 형진은 곧바로 잡화점에 가서 벌목용으로 쓸만한 도끼 하나를 구입한 다음,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야산으로 향했다.
성이나 도시 근방에 있는 숲은 귀족의 사냥터 등으로 지정되어 함부로 벌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이 근처의 숲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맹수 같은 것이 간혹 출몰하는 경우가 있다는 정도. 뭐 그래봐야 늑대 정도가 고작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사냥개의 코장식을 착용한 다음 주위를 살피며 숲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살펴 별다른 위협 요소가 없음을 확인한 형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나무를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도끼가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처음에는 힘이 좀 엇나가는 느낌이 들었지만 조금 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제대로 도끼가 박히기 시작한다.
우지지직!
결국 그렇게 몇 번 더 도끼질을 하자 나무는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져 버리고 말았다.
형진은 대충 잔가지를 쳐내고 별첨된 길이로 통나무를 재단한 다음, 대략의 가공이 끝나자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숫자가 카운트 되더니 인벤토리에 넣었던 통나무가 사라진다.
“인벤토리에 이런 용도도 있었군.”
무게 때문에 어쩌나 싶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문제의 소지가 될 법한 부분이 해결되었으니 그 뒤는 일사천리. 다만 그 와중에도 인스턴트 킬의 연습을 하느라 조금 벌목이 늦어진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후… 끝났다.”
이것도 오랜 만에 하려니 꽤 힘들다. 열 번째 통나무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자, 바로 완료 메시지가 뜬다.
[축하합니다!] -‘물자 조달’ 퀘스트를 무사히 완수하였습니다.-퀘스트 보상으로 ‘가스트 주화’ 100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보상으로 ‘팩션 공헌도’가 1 증가하였습니다.
고작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활 계열 임무 역시 분명한 장점이 있다. 암살 계열의 임무들은 그 준비와 실행에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런 생활 계열의 임무들은 조금 귀찮고 번거롭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비슷한 류의 임무를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보상이 적은 대신 소요시간이 적다고나 할까.
“어디보자…”
형진은 다시 임무를 뒤져 벌목 계통의 임무를 하나 더 골라 수락한 다음, 그것을 마친 뒤에야 잔가지 같은 것을 잔뜩 모아 짊어지고 산을 내려왔다.
“저, 계십니까?”
“어머? 옆집 총각이네. 어쩐 일이세요?”
옆집 문을 두드리니 아까 개울 위치를 알려준 아줌마가 반색하며 맞이한다.
“혹시 건초 남는 것이 있으면 좀 파실 수 없을까 해서요. 침대에 깔 건초가 필요하거든요.”
“아하, 그런데 그건 나무인가요?”
“네. 땔감이 필요할 것 같아서 좀 해왔습니다. 바로 쓰긴 그렇고 좀 말려야겠지만요.”
“잘 됐네요. 마침 우리 집도 땔감이 필요하던 참인데. 필요한 걸 서로 바꾸면 어떨까요?”
“저야 그래주시면 고맙죠.”
“이리 와요. 건초라면 헛간에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사근사근하게 대하는 모습이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냥 모르는 척 땔감으로 쓸 잔가지들을 헛간에 쌓아놓고 대신 침대에 깔 건초 한 더미를 받아왔다.
잘 마른 건초를 침대에 깔고 먼지를 털어낸 시트를 깔아놓으니 이제야 좀 사람이 누울만한 침대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다음 날도 벌목을 했다. 통나무를 적당히 자르는 과정을 통해 가공 랭크가 오르자, 단순한 통나무 벌채만이 아니라 각목 같은 것을 수급하는 의뢰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수행할 수 있는 임무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루에 수급할 수 있는 공헌도와 수입이 늘어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슬슬 시작해도 되겠지.”
형진은 벌목으로 채집과 가공 랭크가 어느 정도 오르자 곧바로 다음 단계로 접어들었다. 바로 간단한 가구의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주정뱅이에게 받은 집은 침대와 집 뒤의 물통 정도를 제외하면 썰렁할 정도로 아무것도 갖춰진 것이 없었다. 하다 못 해 식탁이나 의자 정도는 갖춰놔야 하지 않겠는가.
톱과 망치, 그리고 못 같은 것을 준비한 형진은 며칠 동안 집 뒤에 쌓아놓고 잘 말려둔 통나무를 잘라 가공을 시작했다. 아직은 가공 랭크가 낮으니 간단하게 형태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고, 랭크가 오르면 차차 문양이나 장식 같은 것을 넣을 생각이다.
“힘만 좋은 줄 알았더니 손재간도 제법이네.”
“성격은 또 얼마나 좋은데. 볼 때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인사도 잘 하더라고.”
“오랜만에 중매 좀 서볼까. 그렇지 않아도 건너집 딸내미가 자꾸 눈독을 들이는 거 같더만.”
“에잉. 그 바람난 년을 어디 가져다 붙여. 아깝게스리.”
“그건 그래.”
다 들립니다요. 아줌마들.
근데 그거 아시나 모르겠네. 그 성격 좋아 보이는 청년이 사실은 각인의 집행자걸랑요.
하지만 아줌마들의 잡담이 전혀 쓸모없는 것만은 아니다. 일부러 찾아 다니지 않아도 이런 저런 소문을 곧잘 가져다 들려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얼마 전 벌어진 암살 사건의 후일담이라든가.
형진과 가트의 목표가 되었던 영애는 본래 황자비로 예정되어 있던 지체 높은 아가씨였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지킬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러 버린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소문으로는 마을의 소녀들을 납치해다가 그 피로 목욕을 했다든가. 그러고 보면 지구에서도 그런 얘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이런 소문이 돌자 황실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내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더니 각인의 집행자에게 의뢰가 들어온 것이다.
각인의 집행자에게 처형 의뢰가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유죄 판결이 난 것이나 다름없는 일. 하지만 그런 내사 결과를 토대로 재판이 이루어질 경우 해당 가문은 물론이고 약혼자인 황자의 명예 역시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각인의 집행자가 의뢰를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사건은 일단락이 되는가 싶었지만 이게 웬걸. 영애는 암살자가 들이닥쳤다는 말을 듣자 비밀 통로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살해되었다. 문제는 그 살해 당시의 모습. 간살이라는 사실조차 어디가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판국에, 죽은 모습이 꼭 강간이 아니라 화간인 듯 한 모양새라 또 한 번 그 귀족가는 발칵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게… 그렇게 되었군.”
영애를 죽인 당사자이며 내막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로서 형진은 실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영애는 애초에 같이 죽자는 식으로 가트를 스스로의 몸으로 결박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진이 입은 병사의 갑옷을 보고 같은 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암살자인 가트만 죽이면 신의 심판으로부터 무죄를 인정받을 수 있을테니까. 순결을 잃기는 했지만 일단 살아나기만 하면 그거야 어떻게든 다른 방법이 있을 테고.
하지만 형진은 가트와 함께 영애까지 단숨에 꼬치구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영애로선 황당했겠지. 설마 그렇게 죽게 될 줄은 몰랐을 테니까. 암살자와 몸을 섞는 자세 그대로, 그것도 적극적으로 상대를 받아들이는 듯한 자세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이쯤 되면 명예로운 죽음 운운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니 말이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신의 뜻이란 것이 존재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형진은 그런 뒷얘기를 양념삼아 의자 제작에 힘을 기울였고, 엘리시온에 있을 때 수없이 해왔던 일이라서 그런지 가공 랭크가 낮은데도 생각보다 훨씬 쉽게 완성 되었다.
“어디 보자…”
일단 지면과 잘 밀착이 되는지, 앉았을 때 무게가 잘 분산되는지 확인해 본다. 모양은 아직 투박하지만 생각보다 꽤 잘 만들어진 것 같아 나름 흡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