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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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명성
제랄딘이 다음날 오랜만에 진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고 있는 유아와 미엘의 얼굴에 깜짝 놀랐다.
“세상에. 피부가 몰라보게 좋아졌어요. 어떻게 된 거에요?”
“그게… 아하하하…”
“크흠.”
하지만 유아도 미엘도 민망해 하며 얼굴을 붉히기만 할 뿐,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한다.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거니와 심증만 있을 뿐 정확히 그것이 이유가 맞는지도 그녀들로서는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심증대로가 맞았다. 유아나 미엘의 피부가 몰라볼 정도로 좋아진 것은 바로 새로 생긴 침대 때문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침대로 인해 말끔하게 피로가 사라지고, 윤택하고 만족스러운 부부생활로 인한 내면적인 충만함이 그렇게 외면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둘을 보며 제랄딘은 속이 좀 상했다. 미엘이야 비교 대상이 아니지만, 유아의 경우엔 나이 차이도 거의 없다. 그런데 자신은 요며칠 피부가 까칠해진 탓에 이곳에 오기 전에 화장으로 그것을 숨겨야만 했는데, 이들은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맨피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 보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제랄딘 역시 여자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샘이 날 수밖에 없다.
생각 같아서는 둘을 닦달해서라도 비결을 들어보고 싶지만 오늘은 단순히 놀러온 것이 아니라 공적인 용무로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먼저 해결해야만 한다.
“진님은 어디 계시죠? 전투 식량 문제로 뵈었으면 하는데.”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돌파구라고 여겼는지 유아가 얼른 대답한다.
“지금 아틀리에에서 한창 작업 중이세요. 내려가 보실래요?”
“바쁘신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바쁘기야 하겠지만, 그냥 기다리기는 좀 어려울 걸요. 일단 집중하기 시작하면 작업이 끝날 때 까지는 올라오지 않으실 테니.”
“하긴, 그렇겠네요.”
그것에 대해서는 제랄딘도 잘 알고 있었다. 요리든 뭐든 일단 한 번 꽂히면 다른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남자가 바로 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끝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몰래 놀러온 거라면 몰라도 오늘은 기사와 시녀들까지 대동한 채 방문한 상태다.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내려가 봐야겠네요.”
“안내할게요.”
유아가 앞장서서 일어나자 제랄딘과 미엘이 그 뒤를 따른다. 그렇게 응접실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기며 제랄딘은 미엘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좋아 보이니 다행이야. 언니.”
“고마워요.”
“유아님이 구박해서 엉엉 울고 있는 거 아닌가 했거든.”
“아하하하… 설마요.”
그렇게 오랜만에 미엘과 소소한 잡담을 나누며 아래층의 아틀리에로 내려간 제랄딘은 그곳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진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몇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오귀스트와 크루그, 카트린이다.
“어서 오십시오. 제랄딘님도 침대 주문하러 오셨습니까?”
“네? 침대요?”
크루그와 카트린이 말없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에 역시나 고개를 살짝 숙여 답을 하고 있던 제랄딘은, 뜬금없는 오귀스트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형진이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것은 침대였다. 하지만 적어도 제랄딘이 지금껏 알고 있던 그 어떤 침대와도 다른 물건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이 남자,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일을 벌인 것인가.
잠시 뭔가를 뚱땅거리고 있던 형진은 목도리처럼 목을 휘감고 있던 미엘의 본신 가운데 하나가 살짝 귀에 대고 속삭이자, 그제서야 제랄딘의 존재를 깨닫고는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제랄딘은 훅 하고 밀어닥치는 형진의 향기에 잠시 어지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리고 일전에 미엘이 첫날밤을 치를 때 느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어서 오십시오. 오랜 만에 오셨군요.”
“네.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보니.”
“잠시만요. 앉을 만한 데가…”
“괜찮아요. 그냥 이렇게 얘기해도.”
“죄송스러워서.”
“죄송스럽긴요. 바쁘게 일하시는 걸 방해한 제가 오히려 죄송스러울 따름이죠.”
일단 그렇게 인사를 나눈 제랄딘은 자신이 방문한 이유를 밝혔다.
“실은 어제 저녁 늦게 수도 라야로부터 소식이 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네. 저희 가문의 라스미어 기사단이 이번에 열린 토너먼트에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고 해요.”
“오! 정말 축하드립니다. 결국 우승하셨군요!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모두 진님이 만들어주신 전투식량 덕분입니다. 사실 오늘 제가 방문한 것도 그것 때문이고요.”
제랄딘의 말에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녀가 형진에게 전투식량을 주문했던 것은 가문의 기사단이 이번 토너먼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것과 더불어, 그것을 통해 라야바르트 왕국이 보유한 군에 전투식량을 보급하는 문제를 관철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토너먼트에서 라스미어 기사단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쥐었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돌아올지는 모두가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전투식량에 대해서는 대외비로 취급된 사안이었지만, 시합 전에 같은 포장으로 된 음식을 일제히 섭취하는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노출되는 건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사실 의도적으로 그런 모습을 노출한 것도 있죠. 단 기간 내에 그토록 능력을 향상시킬 방법이라면 역시 도핑이 가장 유력하니까요.”
몇몇 가문들은 좀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의문을 풀고자 했다. 이를테면 그들이 섭취한 음식에 부정적인 수단이 동원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꿀릴 것이 없는 브라드로슈 가문엔 전투식량 몇 개를 그들에게 샘플로 제공했고, 곧바로 그것은 격렬한 반응이 되어 돌아왔다.
“현재 각 기사단으로부터 제 본가에 주문이 쇄도하고 있어요. 본가의 어르신들은 이번 기회에 기사단용의 전투식량 외에도 병사들을 위한 전투식량 역시 가문의 병사들에게 시험해 보고 싶어 하세요.”
“그럼 주문량이 상당하겠군요.”
“네. 아무래도 그런 면이 있죠. 다만 가문에서는 무작정 모든 주문을 다 받아들이기 보다는 순차적이고 선별적으로 각 기사단이 요구하는 물량을 소화할 생각이에요. 진님 혼자 그 많은 양을 소화하기 쉽지 않을 테니 배려를 하겠다는 식이지만, 실상은 이번 기회에 그것을 통해 다른 가문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죠.”
“하하…”
확실히 이런 호재는 활용하지 않는 쪽이 바보다. 가문의 어르신들이 전부 호구신의 사제도 아닌데 요구한다고 무작정 다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전부터 자신들과 가까웠던 가문에 우선권을 주고, 가까워지고자 노력하는 가문들이 그 뒤를 따를 것이다. 그런 식으로 줄 세우기가 이루어지고 나면, 브라드로슈 가문의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막강해진 상태일 터.
“알겠습니다. 다만 요새는 제가 다른 일에 좀 열중하는 중이라 요리에만 집중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 요리에 투자하는 수준으로 물량을 조절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까다로운 주문이다. 하지만 제랄딘은 수도 라야에서도 그랬고, 여기 와서도 잠시나마 함께 지낸 경험이 있기 때문에 형진이 마음먹고 요리에 전념했을 경우 하루에 얼마나 되는 물량을 감당할 수 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문에 대해서는 제가 본가와 상의해서 적당히 조절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랄딘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형진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제랄딘님은 그렇게 흔쾌히 제 사정을 이해해 주셨겠지만, 가문의 어르신들이나 다른 가문의 사람들은 그리 쉽게 납득하지 않을 겁니다.”
“그건…”
확실히 그런 부분이 있긴 하다. 아무리 형진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요리사이고 제랄딘과 친분이 두텁다고는 해도 엄연히 귀족이 아닌 평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번에 주문될 물량은 이전에 브라드로슈 가문이 토너먼트를 위해 마련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막대한 양이 될 터. 다른 건 다 제쳐놓고 금액만을 놓고 따져도 엄청난 액수인데, 다른 일에 바빠서 그런 것을 마다한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뻔하다.
“제가 일일이 설명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보시는 것이 빠를 겁니다. 일단… 지금 만들고 있는 건 나중에 보여드리도록 하고, 유아와 미엘을 따라가시면 제가 요즘 무엇에 열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일단 그것부터 살펴보도록 하시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유아와 미엘은 조금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형진이 눈짓하자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제랄딘을 데리고 다시 아틀리에를 빠져 나왔다.
“우선… 림의 것부터 보시는 편이 좋겠어요.”
“림의 것이라면…”
“아까도 보셨겠지만, 침대에요. 하지만… 일반적인 침대와는 전혀 다른 물건이죠.”
“흠…”
침대면 침대지, 일반적인 침대와 완전히 다른 물건이란 건 또 무슨 소린가.
제랄딘으로서는 아무래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그 남자가 그토록 공을 들여 만들었다면 뭐가 달라도 다르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생각을 떠올리는 정도가 고작일 뿐이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 림이 자신의 방으로 쓰고 있는 방에 다가가자, 어디선가 림이 뽀르르르 나타나 제랄딘에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제랄딘님. 제 침대를 보고 싶으시다구요?
“네. 부탁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아마 깜짝 놀라실 거에요.
림은 즐거운 표정으로 자신의 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림의 방은 언뜻 보기에는 여느 손님용 객실과는 차이가 없다. 하지만 정확히 자신의 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방 한 켠에 놓여진 작은 새장이었고, 림은 얼른 그곳으로 제랄딘을 안내한 뒤 그 안에 자리잡은 침대를 보여주었다.
-바로 이거에요. 이름도 있어요. ‘요정의 꿈’이죠.
“어머.”
제랄딘은 림이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작고 귀여운 침대의 모습에 감탄했다. 아기자기하게 만들어진 그것은 누가 봐도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잠시만요.
림은 그렇게 양해를 구하고는 새장 한쪽에 고이 모셔둔 열쇠 비슷한 물건을 집어 들더니 침대 한쪽에 난 구멍에 그것을 끼우고는 열심히 그것을 돌리기 시작한다. 염동력을 쓰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라는 듯이 열심히 그것을 돌리고 있는 작은 요정의 모습을 귀엽게 지켜보고 있던 제랄딘은, 그 일이 끝남과 동시에 림이 지렛대 형태의 작은 스위치를 작동시키자 이내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이, 이건…”
-대단하죠? 스승님이 저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주셨어요.
림은 양손을 허리에 딱 얹고 코를 들어 올린 채 한껏 잘난 척을 해보였지만, 이미 제랄딘의 귀에는 그런 림의 말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이른 아침, 영롱하게 맺힌 투명한 이슬이 풀잎 위를 또르르 굴러다니는 듯한 그 음색은 제랄딘으로 하여금 몽롱한 기분마저 느끼도록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음악이 흘러나올 때마자 천천히 회전하는 침대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정말… 이건 대단하군요.”
-그렇죠? 헤헷.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림의 잘난 척을 본 유아가 질 수 없다는 듯이 곧바로 제랄딘의 팔을 잡아끌고는 자신들의 방으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예쁘기만 한 게 아니에요. 어떤 상황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또한 자고 일어났을 때 피로를 말끔히 씻어내 줄 뿐만 아니라 신체상태를 120퍼센트 활성화시켜주는 효과도 있죠.”
“세상에.”
그 정도라면 사실상 마법 아이템이나 다름 없다.
“혹시… 마법인가요?”
미엘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조금 도움을 드린 것은 사실이지만, 침대가 지닌 고유한 효과는 마법과는 무관해요. 오로지 진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일 뿐이죠.”
“그럴 수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사실이에요. 따지고 보면 그분의 요리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리고 뒤이어 유아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진의 방에 놓여진 침대를 보는 순간, 제랄딘은 더욱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명품이었으며, 또한 위대한 예술품이었다. 게다가 그 기능이나 효과에 대해 전해 듣는 순간, 제랄딘은 이것이 귀족 사회를 강타할 어마어마한 유행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놓칠 수 없다. 이건 어쩌면 전투식량보다 훨씬 더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물건이 될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느낌에 정신마저 번쩍 들 정도다.
“진님!”
“오, 벌써 내려오셨습니까. 좀 더 찬찬히 보시지 않고.”
아틀리에로 달려내려가 카트린의 침대를 만들고 있던 진의 모습을 확인한 제랄딘은 급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외쳤다.
“침대! 만들어 주세요! 제가 쓸 것과, 제 아버님이 쓰실 것.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