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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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풍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자기들 멋대로 이러니저러니 떠들어 대는 모습에 제랄딘은 화가 잔뜩 나고 말았다. 게다가 노처녀라니! 자기가 어딜 봐서 노처녀란 말인가!
[아가씨, 기운! 기운!] “후우우우…”다급한 미엘의 메시지에 제랄딘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는 몸 안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던 기운을 급히 갈무리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옆에 앉아 있던 그녀의 아버지마저도 갑작스런 그녀의 변화를 다 알아채고 말았기 때문이다.
“제라, 방금 그건…”
공작은 크게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입을 열었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독 오른 고양이 같은 표정의 딸의 눈빛에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
“응?”
“설마 절 이 자리에 합석시킨 건, 왕자님과의 정략결혼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속셈이었나요?”
“크흠, 그게…”
공작은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차분하게 그녀를 설득하려 했다.
“너도 알다시피, 원래 네 나이 정도라면 이미 혼담이 오가고 있거나 빠른 경우엔 이미 한 아이의 어머니인 경우도 많다.”
“그래서요? 귀찮으니 후딱 치워 버리려고 하시는 건가요?”
“그게 아니라… 크흠.”
사실 공작의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정략결혼에 아끼는 딸을 희생시키는 것은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만약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다른 여러 가지 경우보다 서로에게 훨씬 좋은 여건이 마련될 수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크루그는 왕자라고는 해도 아직 제대로 기반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제법 그럴 듯한 인재를 끌어안기 시작한 걸 보면 확실히 왕족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직 공작가가 지닌 힘에 비하면 여러모로 미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제랄딘이 크루그와 맺어지게 된다면, 그녀는 여러모로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만약 자신들의 의도가 성공하게 된다면, 제랄딘은 왕국 최고의 금지옥엽을 넘어 한 나라의 국모가 될 것이고, 만약 실패하더라도 크루그를 처가살이 시키는 식으로 계속 곁에 두고 아낄 수 있으니, 공작으로서는 엄한 귀족 나부랭이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그럴 듯한 선택이 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언제까지고 결혼도 안 시킨 채 노처녀로 늙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하지만 제랄딘은 그런 공작의 의도 따위는 무시한 채 자신이 정략결혼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크게 분개하고 말았다.
“갈래요! 모두 죄송합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도저히 얘기를 듣고 있을 수가 없네요.”
“제랄딘!”
당황한 공작이 만류하려 했지만, 제랄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른 이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 버리고 말았다.
“끙… 저 말괄량이 녀석이. 죄송합니다. 크룩스크루드 왕자님, 그리고… 크흠. 아무튼 근일간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편하실 대로 하십시오.”
크루그는 선선히 공작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렇지 않아도 본격적인 얘기를 꺼내는 것이 껄끄러웠던 마당인데 알아서 물러나 준다니 괜히 붙잡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제랄딘이 그렇게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행동을 취한 것에는 이런 목적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후… 아무리 그래도 제랄딘 아가씨 얘기는 너무 심했어요. 크루그님.”
다소 힐난의 기미마저 담긴 미엘의 말에 크루그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얘기였습니다. 사실 저와의 정략결혼 얘기가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미엘은 이 얘기가 상당히 어렵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형진은 이미 자신과 유아라는 두 명의 여자가 있다. 제랄딘의 성격이라면, 자존심 높은 그녀의 성격이라면 아무리 그 중 하나가 자신이라 해도 이미 여자가 있는 남자의 또 다른 여자가 되는 것은 완강하게 거부할 것이다.
자칫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아예 가문이라는 것 자체를 버리는 식으로. 하지만 그것은 모두에게 그리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다.
미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형진에게 조용히 말했다.
“잠시 제가 아가씨와 얘기를 나눠봐도 될까요.”
“미엘이?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건… 일단 돌아와서 말씀드릴게요.”
“흠… 편한 대로 해.”
어차피 본신은 놔둔 채 꼬리 하나를 딸려 보내는 정도다. 다만 무슨 생각인지가 궁금하긴 했지만, 미엘이라면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형진의 허락을 받은 미엘은 곧바로 밖으로 나가 급히 마차에 올라타려 하는 제랄딘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잠깐 따라가도 될까요?”
“…”
제랄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미엘은 이전에 시녀 일을 했을 때처럼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고, 안절부절 못하는 공작으로부터 잘 부탁한다는 듯한 느낌의 눈짓을 받고는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공작은 자신은 일단 빠지는 편이 낫겠다 싶었던지 함께 마차에 동승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차 안에는 제랄딘과 미엘, 이렇게 둘 만이 타게 되었다.
미엘은 일단 마차 안에 방음 결계를 펼치고는 제랄딘의 옆으로 다가 앉아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가씨. 화 많이 나셨어요?”
“후우… 미안. 그냥 나도 모르게.”
제랄딘은 그제서야 한풀 꺾인 모습으로 미엘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미엘은 그런 제랄딘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달래듯 말했다.
“아가씨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돼요. 미엘은 언제나 아가씨 편이니까요.”
“고마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냥 다 집어 치우고 멀리 가버릴까 하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떠올리던 제랄딘이었지만, 가만히 어깨를 어루만지는 미엘의 손길을 느끼자 일단 차분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정략결혼이라는 말에 발끈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크루그든 진이든 그 집의 남자들과 엮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귀족의 결혼이라는 것이 진이 유아나 미엘을 맞이했던 것처럼 그냥 오늘부터 같이 살자 하고 동침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문간의 결합이라는 성격이 강한 이상, 이런 저런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에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저런 준비에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된다.
실제로 이미 가문에는 그녀를 노리는 혼담이 산처럼 쌓여가고 있는 상황.
황자가 추근대던 때만 해도 감히 얼씬도 못하던 이들이, 지금이야 말로 왕국 최고 가문의 여인을 맞이할 기회다 라는 식으로 되든 안 되는 일단 혼담부터 넣고 보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급히 대미궁의 일을 핑계로 그리칸에 온 이유 중에는 그런 식으로 몰려드는 혼담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엘 파르드의 왕자와 혼담이 오가고 만약 약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런 귀찮은 일들은 다시 자취를 감출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무작정 정략결혼이라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그런 전후 사정을 감안하여 자신에게 이로운 쪽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
사실 공작이 갑작스런 제랄딘의 반응에 크게 당황한 것도 그래서였다. 차분하게 이 혼담의 장점을 설명하면 그녀도 납득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게 화를 버럭 내며 일어나 버리니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느닷없이 크루그가 숨겨진 형이라며 진을 소개하는 바람에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애지중지하는 딸까지 그런 식으로 나오면 제 아무리 공작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나 어린애 같지?”
“조금요.”
“미안.”
“괜찮아요.”
“오늘 자고 가지 않을래?”
“기꺼이.”
“고마워.”
“저야말로.”
그렇게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둘이 탄 마차는 어느새 제랄딘의 저택에 도착했다. 둘은 공작에게 양해를 구한 뒤, 곧바로 제랄딘의 방으로 향했다.
시녀들을 내보내고 침대에 함께 몸을 던지자 따뜻한 물침대의 출렁임이 둘을 반긴다.
“음악 켤까요?”
“응. 부탁해.”
제랄딘의 침대는 형진의 방에 놓인 것과 기본적인 구조가 동일하다. 단지 천장의 거울만이 빠져 있을 뿐이다.
“그 사람이 잘 해줘?”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미엘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네. 좀 변태긴 하지만.”
“쿡쿡.”
침대 천장에 거울을 달 생각을 하다니, 확실히 상상을 초월하는 변태다. 그것만 빼면 정말 대단한 사람인데 말이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무모한 일이다. 느닷없이 왕자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크루그의 무리수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만약 자칫 잘못해서 왕족을 사칭한 것이 드러나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하다 못 해 미리 상의라도 하고 의견을 구했다면 이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둘은 그런 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서로를 보듬어 안은 채 침대로부터 흘러나오는 영롱한 오르골 소리를 감상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까 그렇게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진다.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 누워 있던 제랄딘은 문득 몸을 일으키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
“온천 가고 싶어.”
“지금요?”
“응.”
“하지만…”
이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공작은 물론이고 기사단장인 그녀의 삼촌, 그리고 가문의 모든 정예 기사들이 저택에 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뿐인가. 그랙커스는 물론이고 이전에 새로 영입한 소그마 같은 상급 기사들마저 자리하고 있는 상황. 빠져 나가는 거야 은신과 잠행을 쓴다 치더라도, 그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되면 아마 그리칸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미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제랄딘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쯤 마음고생 좀 해보라지. 그런 변태에게 딸을 팔아먹으려는 나쁜 아버지 따위.”
“쿡.”
공작으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애초에 공작이 염두에 둔 것은 크루그지, 어디서 튀어나왔는지조차 모르는 영문 모를 숨겨진 왕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숨겨진 왕자가 변태라는 것 따위 알 리가 없지 않은가.
하기야 이 정도면 의사표시로는 더할 나위 없긴 하다. 물론 휘하의 기사들이나 병사들이야 고생이겠지만.
“아,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어떻게?”
“제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고 넌지시 쪽지를 남기는 거에요. 마치 아가씨 모르게 남긴 것처럼. 잘 설득해서 돌아오게 할 테니 너무 걱정 마시고, 괜히 사람들을 움직여서 이상한 소문 나지 않게 해달라는 식으로.”
“아하! 그거 괜찮네.”
미엘의 실력이야 이미 가문 내에서도 정평이 나 있는 상황.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어떤 식으로 신호를 보내겠다는 내용까지 적어둔다면 괜히 가문 내의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조용히 공작의 속만 썩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제랄딘과 미엘은 그렇게 나쁜 장난에 몰두하는 아이들처럼 키득거리며 쪽지를 적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도록 적당히 숨겨둔 뒤 은밀하게 방을 빠져 나와 형진의 집으로 향했다.
“어라? 어떻게…”
“온천 좀 가려고요.”
“…”
당당하게 대답하는 제랄딘의 모습에 잠시 얼이 빠졌던 형진은 옆에선 미엘이 살짝 눈짓을 보내자 모르는 척 유아로 하여금 제랄딘이 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돕게 했다.
그렇게 온천욕을 하고 여자들끼리 즐겁게 놀며 밤새 공작의 속을 까맣게 타들어가게 만들었던 제랄딘은, 아침이 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당에 나타나 공작에게 선언했다.
“진님과 약혼하겠어요. 단, 그 약혼이 결혼으로 이어질지는 전적으로 제 의사에 달려있다는 걸 인정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