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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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도전
“엥?”
모처럼 과거의 숙적, 물론 이 토끼는 딱히 형진을 숙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존재를 상대하려고 아랫배에 힘 딱 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게 무슨 소린지.
혹시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협객 토끼라고 불린 이 녀석은 형진 앞에 다가오더니 마치 서임식에서 주군 앞에 나선 기사처럼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앞발 두 개를 마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형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자, 그의 목에 둘러진 채 이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미엘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이상하네. 얘들은 영역에 대한 집착도 강하고 자존심도 세서 어지간해서는 누구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래?”
그러고 보면 형진은 이제까지 토끼들이 이 세계에서는 맹수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만 경험상 알고 있을 뿐, 정확히 어떤 이유에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미엘은 얘들이 왜 이런 모습인지 알아?”
“알죠. 진은 그런 것도 몰라요?”
“내가 원래 자잘한 건 잘 신경 안 쓰잖아.”
“하긴.”
뭔가 어설픈 핑계 같지만, 형진 한정으로는 꽤 설득력 있는 핑계인 것도 사실이다. 솔직히 무언가에 꽂혀 있을 때의 그는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쪽에 속하니까.
“원래 이 토끼라는 종족은…”
첫 서두부터 심상치 않다. 그냥 동물도 아니고 종족이라니. 아예 별개의 종족으로 인식되고 있는 건가.
어쨌든 그런 식으로 이어진 미엘의 설명을 요약하자면 간단했다. 토끼들은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었다가 누구인지 모를 신에 의해 불려왔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불러와 놓고 보니 순식간에 본래 이 세계에 존재하는 강력한 생물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보다 못한 신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힘을 부여했고, 결국 지금의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도 다행이죠. 얘들은 자기가 살아갈 굴을 장만하게 되면 자신의 짝을 찾아 세계를 방랑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그곳에 처박혀 나오지 않으니까요. 물론 자기 영역을 침범하면 이렇게 대번에 튀어 나와 싸움을 걸기는 해도.”
정말 다행이다. 이런 놈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시비를 건다고 생각해 봐라. 어지간한 인간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 난감 그 자체였을 것이다.
“도대체 그 무책임한 신이 누구야?”
“글쎄요. 그건 알려진 바가 없어요. 그냥 신 중에 하나가 저지른 일이라고 밖에는.”
어쩐지 이렇게 저질러 놓고 나 몰라라 하는 행태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지만, 일단은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했다. 무책임하든 어쨌든 신은 신. 괜히 신경 거슬리게 만들어서 이런 저런 일에 딴죽이 들어오면 그것도 난감한 일이니까.
그나저나 미스틱 링이라니. 아무래도 지옥 토끼를 이기고 난 뒤에 나왔던 반지를 말하는 모양인데, 그 반지에 그런 효과가 있었던가.
그러고 보면 지옥 토끼를 이긴 뒤로 어딘지 모르게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그 뒤로 던전 탐색을 어떻게 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나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유아가 오늘 누구를 어떻게 도왔다고 신나서 얘기하는 것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것 같다. 미안한 짓을 해 버렸다. 역시… 그 사람 때문인가.
“후…”
형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일단 반지의 정보부터 살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미스틱 링
등급 : 전설
착용제한 : 필드 보스 ‘미스틱’에게 승리한 자.
설명 : 필드 보스인 지옥 토끼 ‘미스틱’에게 승리할 경우 극히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반지. 소문에는 토끼를 이 세계로 불러들인 신이 지니고 있다가 잃어버린 물건이라고 전해진다. 소유하고 있을 경우 싸우지 않고도 자신이 지닌 최고 스킬 레벨만큼의 토끼 종족을 굴복시켜 부하로 다룰 수 있다.
효과 : 습득시 미스틱의 권위 발동. 착용시 일정 권역 내의 토끼들에 대해 소집 명령 발동 가능. (*그 외 숨겨진 효과 ?개-확인 조건을 만족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화시 효과 : 강화 불가.
“헐.”
무려 전설 급이다. 요정 족의 보물이었던 단장은 야바위로 얻은 것임을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쓰러뜨려서 얻은 물건 중에는 이것이 최고 등급의 아이템인 셈이다. 게다가 그 등급에 맞게 거의 별개의 종족으로 취급되는 토끼들에게 강력한 권위를 보유하고 있기까지 하다.
이미 드러난 효과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몇 개인지도 모르는 숨겨진 효과까지 감안하면 확실히 지금껏 봐왔던 다른 어떤 아이템보다도 강력한 물건인 셈이다.
이런 물건을 확인조차 않고 그냥 인벤토리에 던져두고 있었다니. 정신이 나가긴 나갔었던 모양이다.
형진은 미스틱 링을 손가락에 꼈다. 그리고 소집 명령이란 것을 발동해 보았다.
[‘미스틱 링’에 부여된 소집 명령을 발동합니다.] [‘협객 토끼’가 ‘미스틱 링’의 부름에 응합니다!] [‘복서 토끼’가 ‘미스틱 링’의 부름에 응합니다!] [‘열혈 토끼’가 ‘미스틱 링’의 부름에 응합니다!] [‘건달 토끼’가 ‘미스틱 링’의 부름에 응합니다!] [‘냉혈 토끼’가 ‘미스…“헛!”
고작해야 한두 마리 정도 나오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열 마리 가까운 토끼들이 소집에 응했다는 메시지가 우르르 떠오른다.
소집 범위가 의외로 넓은 건가, 아니면 이곳에 유독 토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기다리자 이곳저곳에서 각양각색의 토끼들이 우르르 모습을 드러낸다.
체구나 털의 색도 가지가지다. 손바닥만 한 미니 토끼부터 시작해서 협객 토끼처럼 각 잡힌 몸매를 가진 녀석도 있고, 하얗게 뽀송뽀송한 털빛을 가진 놈이 있는가 하면 새까맣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토끼도 있었다.
“와아…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지닌 바 힘은 강하더라도 일단 외형은 귀엽기 때문에 미엘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며 그렇게 물었다.
“글쎄. 아무래도 아까 필드 보스를 쓰러뜨린 것 때문이 아닐까?”
“그래요? 이상하네요. 이제껏 필드 보스를 쓰러뜨린 사람은 많았지만,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 본적이 없는데.”
“그, 그런가?”
역시나 오래 산만큼 이래저래 보고 들은 것이 많은 탓에 얼렁뚱땅 넘어가기도 쉽지 않다. 어쨌든 그렇게 소환에 응해 모인 토끼들은 협객 토끼가 그랬던 것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형진에게 예를 갖추었고, 그럴 때마다 수하로 받아들이겠느냐는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어쩐다.
원래는 일전에 두들겨 맞은 한을 푼다는 핑계로 온 것인데, 이렇게 무저항으로 있는 놈들을 때려잡자니 뭔가 뒷맛이 개운치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게다가 저 미니 토끼 같은 녀석들은 데려가서 카트린이나 유아에게 보여주면 귀여워서 자지러질 것 같은 모습이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일단 수하로 맞이하겠느냐는 메시지에 그러겠다고 수락의 뜻을 밝혔다. 두들겨 패는 거야 일단 데리고 가서 수련을 핑계로 두들겨 패도 되지 않나 싶은 생각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또다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협객 토끼’가 ‘미스틱 링’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신이 부른다면, 이 강하고 자존심 높은 존재는 언제든 부름에 응할 것입니다!] [‘복서 토끼’가 ‘미스틱 링’ 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신이 부…“엥?”
수락의 뜻을 밝히기가 무섭게 자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토끼들이 일제히 한 줄기 빛과 함께 반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숨겨진 효과라고 되어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나. 이제는 정말 뭐가 뭔지.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수하가 되고 싶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와… 그럼 언제든 아까 걔들을 불러낼 수 있는 거에요?”
“일단은.”
“그럼 불러 봐요.”
흥미로 가득한 시선을 던지고 있는 미엘의 재촉에 못 이겨 열혈 토끼를 불러내었다. 그러자 유독 따뜻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작은 미니 토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말이었네요. 세상에! 토끼들한테 이런 비밀이 있었다니.”
미엘이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내자, 문득 열혈 토끼가 흠칫 놀라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아무리 신의 힘에 의해 강해졌다고는 해도 필드 보스 정도 되는 존재가 아닌 이상 최강의 환수 가운데 하나인 흑요호의 눈빛을 감당하기엔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새롭게 수하로 얻은 토끼들을 하나씩 불러내며 놀고 있던 형진과 미엘은, 문득 누군가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곧바로 형진과 미엘은 거의 조건 반사에 가까운 모습으로 토끼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은신을 펼쳐 모습을 숨겼다. 그러자 이내 검은 새가 휙 하고 날아드는 듯한 느낌과 함께 여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상하네. 분명 이쪽으로 갔던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타난 갈색 머리의 여인을 보는 순간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꽤 오랜 만에 본다. 게다가 날도 어둑해져서 얼굴을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물론 심연의 눈가리개를 쓰고 있다면야 그런 건 문제가 되지도 않지만,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데.
그럴 수 밖에 없다. 이곳 그란웰을 떠난 뒤로도 얼굴을 잊지 않고 있던 두 명 가운데 한 명이니까. 모습을 나타낸 그 여인은 바로 아란의 친구이며 유랑 극단을 이끌고 있는 미나라는 여자였다.
“쳇. 어쩌지. 모처럼 아란이 만든 토끼 스튜를 먹어보나 했더니.”
뒤통수를 긁적이며 혀를 차는 그녀의 모습을 보는 순간 형진은 왜 자신이 토끼를 보는 순간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 했는지 깨달았다.
그래.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자꾸만 은연중에 가슴을 짓누르니 그랬던 거다. 마음 한 켠에 풀지 못한 채 남아 있던 응어리가 토끼를 만나는 순간 자꾸만 되새김질하며 떠오른 탓이다.
그것을 깨닫자 형진은 스스로 은신을 풀고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던 미나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미나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보더니, 어느 틈엔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형진의 모습에 눈을 부릅떴다.
그녀 역시 형진을 단숨에 알아보았다. 하긴 몇 년이 지난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몇 달 밖에 되지 않았으니 벌써 잊혀졌다면 곤란한 일이긴 하다. 하기야 때린 놈은 바로 잊어도 맞은 놈은 잊지 못한다는 속설을 생각하면 잊어도 이상할 것은 없지 않나 싶긴 하지만.
“너… 어느 틈에…”
형진은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는 미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오랜 만입니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미칠 듯이 반갑네요.”
그리고는 집행자의 단검을 뽑아들었다. 너무 반가워서 미치겠다는 듯한 웃음을 계속 입가에 머금은 채로.
미나는 예사롭지 않은 형진의 분위기에 흠칫 놀라며 자신도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몇 달 전만 하더라도 한 주먹 거리조차 되지 않았던 생초짜 풋내기였던 사내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크게 놀라고 만 것이다.
“우리들, 쌓인 얘기가 좀 많죠? 오늘 느긋하게 풀어 보도록 합시다.”
정말 할 얘기가 많다. 여러가지로. 그 중에는 얼떨결에 수하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화풀이를 못하게 된 토끼를 대신해서 미나가 감당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물론 대화라는 건 꼭 말로만 풀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 여러 가지로 뜻 깊은 밤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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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 기억 안나시는 분은 챕터 5, 6을 참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