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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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합작
유아의 몸으로 흘러나온 빛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하자, 망자의 군세를 이루는 망령들은 그 빛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절규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멈추고 행동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집행자들은 그렇게 눈앞에서 둔하게 흐느적거리고 있는 망령들을 빠르게 해치웠지만, 뒤이어 들려온 미엘의 메시지를 들려오자 멈칫하며 물러섰다.
[잠시만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 주세요.] [알겠습니다.]의문을 품을 만도 할 일이었지만, 종결자라는 높은 계급에 있는 미엘의 말이라 그런지 집행자들은 순순히 물러나며 망령들이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아서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틈으로 형진이 유아를 안은 채 다가섰다.
“내려 주시겠어요.”
“괜찮겠어?”
유아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오는 빛이 망령들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이미 확인이 되었지만, 그래도 불안을 저버릴 수 없어서 형진은 잠시 망설였다. 그런 형진의 모습에, 유아는 여전히 눈에 그렁거리고 있는 눈물을 손으로 쓰윽 닦더니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
얘가 이렇게 웃을 줄도 알았나.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다. 혹시 이전에 후광을 조절하지 못했을 당시 다른 사람들이 느끼던 감정도 이런 것이었을까. 아니. 아닐 것 같다. 이런 모습을 보고 욕정하다니. 그건 걸핏하면 변태로 매도당하는 형진으로서도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일이다.
형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유아는 발이 땅에 닿자 어지러운지 잠시 휘청거렸다가 형진이 손을 잡아 주자 조심스럽게 자세를 바로했다.
“안으로 데려다 주세요.”
“알았어.”
이미 망자의 군세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날뛰는 대신 순한 아기 양처럼 가만히 웅크리고 있을 뿐. 그러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형진은 여차하면 바로 몸을 뺄 수 있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유아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으로부터 바스락거리며 무언가가 부스러지는 소음이 전해진다. 처음 이곳에 들어섰을 때는 이 새하얀 무언가가 눈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 새하얀 결정들은 다름 아닌 소금이었다. 망자의 대지는 그 자체로 새하얀 소금으로 뒤덮인 지형이었던 것이다.
마그 남매는 물론이고, 다른 집행자들 역시 지금까지 그냥 종결자 미엘의 동행으로만 여겼던 남녀가 신비로운 빛으로 휩싸인 채 망자의 군세를 향해 다가서는 모습을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빛이 무엇인지, 정확히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그들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전에는 일어난 적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건이라는 점이었고, 또한 자신들이 그 증인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사아아…
유아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멍하니 허공에 떠있던 망령 중 하나가 마치 천천히 풍화되어 스러지는 듯한 모습으로 사라져 간다. 그렇게 하나의 망령이 사라지고, 다른 망령들 또한 같은 모습으로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일정한 거리 안에 접어들기가 무섭게, 아무리 악독한 기운을 품고 있든지 간에 비명도 탄식도 없이 그냥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다.
소멸?
아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고 하기 보다는 어딘가 본래 있어야 할 장소로 돌아가는 듯한 그런 느낌이다.
그렇다면 정화인가?
그것도 아니다. 품고 있던 악한 기운을 억누르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역시 모두 품어버린 채 다독이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알 수 없다. 집행자들은 물론이고 바로 옆에서 유아를 인도하고 있는 형진조차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습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굳이 표현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은혜. 그것도 아니라면 은총. 물론 은혜든 은총이든 지금의 상황을 표현하기는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지만, 아무튼 그 비슷한 의미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는 그런 느낌.
유아의 발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망령들이 사라지는 숫자도 함께 늘어났다. 일정 영역 안에 들어가는 순간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다.
“뭐지?”
“이런 건 나도 처음 보는데.”
“저런 스킬이 있었나?”
“애초에 스킬이 맞긴 한 건가?”
“글쎄.”
스킬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것이,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이 빛은 살아있는 무언가를 죽이는 데는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였다. 그냥 느낌만 그런 게 아니라, 빛을 쐬고 있는 당사자들에게 피해는커녕 달리 어떤 변화조차 일어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좀 따뜻하고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는 듯한 기분이라는 정도. 그리고, 어쩐지 빛을 발하고 있는 여자에게 은근하게 호감이 느껴진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어쨌든 그렇게 집행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유아는 마침내 보이는 모든 망령들을 사라지게 만들고, 그 망령들이 에워싸고 있던 핵으로 다가섰다.
“이건…”
“티아라로군. 그것도 베일이 달린.”
파릇한 봄에 새로 신부가 되는 아리따운 아가씨가 쓰면 딱 어울릴 듯한 그런 느낌의, 왕관을 닮은 장신구와 그것을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베일이 하느작거리며 허공에 떠있다.
역시나 던전과 마찬가지로 힘을 지닌 아이템이 망자의 군세라 불리는 상급 언데드의 핵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제 힘으로는 여기까지인 것 같아요.”
“그런가.”
유아가 이번에 발현한 힘은 언데드로 하여금 저항 자체가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위력적이었지만, 이렇게 실체가 있는 무언가의 안에 깃든 악의와 저주의 힘까지 날려버리는 것은 무리였던 모양이다. 힘이 약해서라고 하기 보다는, 그 힘의 성격과 용도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이 티아라에 얽혀 있는 악의와 저주는 물품 그 자체와 거의 동화되어 있다. 때문에 지금까지 페스타에서 망자의 군세를 제거할 때마다 집행자들은 핵이 되는 물품이나 다른 무언가를 다시 본래대로 되돌리기 보다는 완전히 형태를 잃어버리도록 파괴해 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따지고 보면 마그 남매 중 동생이며 헤트라의 지부장인 힐 데 마그가 대장간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렇게 파괴된 물품들을 완전히 녹여 후환을 제거하던 중에 그 일 자체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가장 간단한 해결 방법은 이 티아라를 단숨에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형진은 던전의 코어처럼 이 티아라도 그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후와아악!
순간 형진의 몸 주위로부터 하나의 돌풍이 일어난다. 바로 라이언하트를 발동한 것이다.
“꺅!”
갑작스럽게 생겨난 바람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유아를 품으로 끌어당겨 안은 형진은, 집행자의 단검을 꺼내 손에 쥐고는 티아라를 향해 다가갔다.
부르르.
형진이 다가서자 티아라가 떨리기 시작한다. 정확히는 티아라 자체가 아닌, 그 안에 깃든 악의와 저주가 떨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님에도, 어쩌면 사념에 가까운 그런 형체가 없는 무언가임에도 다가서는 형진의 모습으로부터 은연중에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긴, 망자의 군세를 이루는 핵이 된 시점에서 이미 하나의 유사 생명체로 완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구에서 생명을 분류하는 기준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니 생명체라는 단어가 적합하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형진은 느릿하게 단검을 들어 그대로 티아라를 찔렀다. 마치 티아라를 부수려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다음 순간 티아라 안에 웅크리고 있던 힘이 유리조각처럼 박살나 사라지고 어딘가로부터 짤막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허공에 떠 있던 티아라는 그대로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끝난 건가요?”
“아마도.”
형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티아라를 집어 들었다. 마법 처리가 된 것인지, 티아라 주위를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베일은 바닥에 떨어졌음에도 사소한 티끌조차 묻지 않은 채 사락사락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템정보
명칭 : 봄의 베일
등급 : 진귀
착용제한 : 여성
설명 : 따뜻한 봄의 기운이 담긴 베일. 착용자의 심신을 보호한다.
효과 : 모든 방어 증가. 능동 방어 활성화.
강화시 효과 : 모든 방어 증가.
“헐.”
모든 방어 증가라니. 처음 보는 옵션이다. 하지만 이건 풀어서 생각하자면 모든 유형의 공격을 방어하는 능력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리적인 공격이나 마법 공격, 그리고 정신 공격이나 독, 저주에 이르기까지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수단은 엄청나게 다양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방어하는 수단이라니. 정확히 어느 정도의 방어효과가 있는지 수치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설령 아주 적은 수치라 하더라도 형진에게는 강화와 세공을 통해 그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것만이 아니다. 능동 방어라는 생소한 옵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정확한 건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이 단어의 뜻대로라면 단순히 들어온 피해를 경감시키는 것을 넘어 그 공격으로 인해 피해를 입기 전에 사전에 차단하거나 요격하는 능력마저 갖추고 있다는 얘기 아닐까.
정말로 그렇다면, 이건 정말 엄청난 방어구인 셈이다. 옵션은 두 개 뿐이지만, 그 두 가지 옵션만으로도 지금까지 형진이 습득했던 그 어떤 방어구보다 놀라운 방어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거의 틀림이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헤르타 지부 인근에 발령되었던 페스타는 이로써 해제됩니다.] [페스타 상황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신 집행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집행자 여러분의 헌신적인 행동에 매우 기뻐하시며 포상을 내리셨습니다.]형진이 티아라를 손에 쥐고 그것을 살피고 있는 동안, 다시 메시지가 전해지며 페스타가 해결되었음을 알리더니 하늘로부터 황금빛 상자가 그곳에 모인 이들에게 내려왔다.
“어?”
거기까진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유아에게도 황금빛 상자가 내려오는 것이다. 애초에 공포와 죽음에 속하지도 않은 그녀에게까지 보상이 내려오다니!
“이게 뭐죠?”
느닷없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손 안에 내려앉은 황금 상자의 모습에 유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황당하기는 형진이 더했다.
“어… 그게, 공포와 죽음께서 이번 일을 해결한 것에 대한 보상을 내려 주신 거야. 하지만 유아는 집행자도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그러게요.”
물론 이번 페스타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유아의 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했지만, 설마 자신의 성도조차 아닌 그녀에게까지 보상을 내려주실 줄이야. 역시 공포와 죽음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놀란 건 형진만이 아니었다. 조금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미엘 역시 얼른 달려와 유아에게 말했다.
“한 번 열어보세요. 공포와 죽음께서 유아님에게 뭘 내려주셨을지 기대가 되네요.”
“그럴까요.”
유아는 미엘의 말을 듣고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행동에 매우 흡족해 하시며 특별히 ‘조력자’의 계급을 수여하셨습니다.] [조력자는 집행자처럼 직접 임무를 받을 수는 없지만, 임무 수행에 도움을 줄 경우 그 혜택을 나누어 받을 수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행동에 매우 흡족해 하시며 풍족한 포상을 내리셨습니다.] [포상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이겔 기념 금화 1개, 가스트 주화 2000개.고급 액세서리 상자.
인벤토리 2칸.
무게 +20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십니다.
-앞으로도 훌륭한 조력을 기대하겠습니다.
유아는 쏟아져 나온 메시지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로서는 이런 식으로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 자체를 처음 보는지라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다른 사제들은 물자 조달 의뢰의 공유가 시작되면서 그나마 이런 식의 시각화된 메시지를 접할 기회라도 있었지만, 유아는 그렇지도 않다.
“어, 이게… 무슨…”
“왜? 뭐라고 나와?”
“그게… 조력자인가 하는 계급이 부여되었다고 나오는데요.”
순간 형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이나마 공포와 죽음의 진의를 훔쳐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