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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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결단
형진은 물론이고 유아나 미엘, 그리고 그 큰 덩치를 억지로 소파에 맞춰 앉느라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던 할 또한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잠깐. 지금…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전언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보상을 내리시면서 저에게 내리신 전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얘깁니다.”
그러자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아 있던 할이 자신을 가리켜 보이며 물었다.
“나도?”
“응. 그러니까 앉으라고 했지.”
“갑자기 무슨…”
아무래도 지금까지 지은 죄가 있다 보니 할은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움츠린다. 물론 도박 중독이 공포와 죽음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키는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떳떳한 일은 아니다. 특히나 공포와 죽음처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세세한 관심을 기울이는 타입의 신이라면 지켜보다가 분통이 터져서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스스로 나섰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고.
“크흠. 죄송합니다. 잠시 얘기가 옆으로 샜군요.”
“아닙니다.”
“다만… 제 자의적인 판단이긴 합니다만, 여러분이 이 전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알고 넘어가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형진의 물음에 힐 데 마그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건 헤르타의 지부장들에게만 전해지는 내용입니다. 물론 공포와 죽음께서 이것을 비밀로 여기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하신 것은 아닙니다만,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지금까지 대외비로 삼았던 내용이지요. 그러니 여러분들께서도 지금부터 들으시는 내용에 대해서는 가급적 다른 분들에게 말씀하지 말아주십시오. 특히, 오빠! 말하면 죽어!”
“알았어. 왜 나만 가지고 난리야.”
“당연히 제일 못 미더우니까 그렇지!”
“쳇.”
솔직히 못 미더운 걸로 따지자면 유아도 만만치 않지만, 공연히 애 기죽일 필요는 없으니 그냥 입 다물고 있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좀 덤벙대기는 해도 얘가 입은 무거운 편이다. 게다가 지금 힐 데 마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심상치 않은 내용 때문에 가뜩이나 잔뜩 긴장하고 있는 녀석한테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하긴 유아의 입장에서는 헤르타에 오면서 본 모든 일들이 그야말로 신세계일 것이다. 신녀라고는 해도 직접 그 몸으로 강림을 경험한 것 이외에는 신과 어떤 형식으로도 접촉한 일조차 없는데, 이곳에 오자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공포와 죽음이라는 존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연속되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신녀인 유아가 이 정도인데, 다른 사제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는 일. 정말 이쯤 되면 딴 세상의 일이나 다름없다.
“크흠. 제가 말씀드릴 내용은 바로 망자의 대지에 관한 것입니다. 혹시 이미 느끼고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망자의 대지는 얼핏 보면 그런가보다 할 수는 있어도 곰곰이 생각하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제법 있습니다. 이를테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때가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발생하는 페스타나, 이번에 등장한 망자의 군세가 발현한 원인이 되는 핵. 그리고 언제나 말끔히 처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어디선가 몰려드는 사악한 기운과 망령이 바로 그것이죠.”
“하긴.”
이게 던전이라면 차라리 리스폰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그뿐일 수도 있다. 아니, 리스폰 현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깐, 리스폰이라고?
그렇다. 리스폰이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한 것일까.
“설마…”
형진이 아연한 표정을 짓자, 힐 데 마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님께서는 눈치를 채셨군요. 그렇습니다. 망자의 대지에서 일어나는 페스타들은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모두 지고한 의지가 개입한 결과물이죠.”
“지고한 의지라면, 공포와 죽음 말씀이십니까?”
“공포와 죽음께서도 개입하고 계십니다만, 그보다는 신들의 총의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허…”
신들의 총의라니. 토너먼트 등을 통해 대립하는 모습은 봤어도 이런 식으로 뜻을 합해 무언가를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지라, 형진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 또한 모두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힐 데 마그는 그런 그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망자의 대지는, 일종의 집하장입니다. 이 세계 전체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악한 기운과 망령을 한데 모아 처리하는 그런 곳인 셈이죠. 의도적으로 페스타 상황을 유발하는 무언가가 있지 않은 한, 자연 발생적인 사기와 망령은 모두 망자의 대지로 모입니다. 그렇게 모인 사기와 망령들이 임계점에 달하면 이번처럼 페스타 상황이 발생하면서 집행자들에 의해 처리되는 방식인 셈이죠. 이것이 바로 헤르타 지부가 가지고 있는 비밀입니다.”
그럴 수가.
진은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곧바로 이 모든 과정의 얼개를 파악했다.
언데드란, 어떻게 보면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사이클이라 할 수 있는 생사의 과정을 어그러뜨리는 존재다. 게임이나 컴퓨터에 비유를 하자면, 그 자체로 시스템 오류이거나 컴퓨터 바이러스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그런 현상이 이 세계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게 된다면, 그만큼 관리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신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사기와 망령을 한 데 모아 처리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고, 그것이 바로 망자의 대지인 셈이다. 공포와 죽음, 그리고 거기에 속한 집행자들이 맡은 것은 이렇게 결정되어 마련된 방안을 실제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인 셈이다.
컴퓨터도 디스크 정리라든가 오류 점검등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치명적인 사태가 발생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괜히 사람들이 백신을 깔고 디스크 정리를 하고 레지스트리를 정리하는데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공포와 죽음은 이 세계 전체를 상대로 그런 식의 관리 작업을 하고 있는 존재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헤르타는 세계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이런 식의 일을 처리하기에 적합한 장소다. 얼음과 소금으로 뒤덮인 황량한 대지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인구의 유동이 적다. 설령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이 세계 각지로 흘러나갈 가능성이 그만큼 적다는 얘기다. 또한 만약의 사태가 벌어져 이곳에 거대한 재앙이 찾아오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 자체가 극히 적은 곳이기 때문이다. 핵실험 같은 것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불모지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진이나 유아, 미엘은 물론이고, 방금 전까지 동생과 투닥거리며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던 할조차도, 자신들이 접한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깨고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바로 형진이었다.
“솔직히 좀 당황스럽군요. 너무 급작스러운 얘기라.”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렇다면 공포와 죽음께서 내리신 전언은 이 망자의 대지와 관련된 내용인 겁니까?”
“아닙니다. 물론 넓은 의미로는 관련이 있습니다만, 직접적으로 망자의 대지에 무언가를 하라는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즈음 벽난로에 걸어놓은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힐 데 마그는 물이 끓는 소리를 듣자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를 가져오더니 미리 찻잎을 덜어놓았단 잔에 물을 부었다.
또르르르르…
주전자로부터 물이 흘러나와 잔을 채우는 소리가 들리고, 다시 향긋하게 찻잎이 우러나는 냄새가 방안에 들어찬다. 힐 데 마그는 그렇게 잔에 물을 붓고는 각자에게 그것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최근 들어 망자의 대지에서 발생하는 페스타의 빈도가 크게 늘었습니다. 미엘님은 이미 아시겠습니다만, 페스타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고는 해도 그 빈도는 보통 한 달에 한두 번 정도가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한 달간 발생한 페스타의 횟수는 이번까지 무려 네 번. 이것은 평균으로 따져도 두 배 이상의 수치입니다.”
“음…”
“이런 식으로 페스타가 급증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세계적으로 사기와 망령의 발생 빈도가 또한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이 됩니다. 사견으로는 현재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 이를 테면 대미궁의 발견이라든가 빈발하는 재해 등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과부하가 생기면서 세계를 이루는 근간 자체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죠.”
“그럴 수가…”
힐 데 마그의 말에 특히 경악한 것은 바로 유아였다. 그녀는 최근 들어 요정의 노동력을 이용해 각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재해 현장에 대한 구난 업무를 맡는 일이 많았고, 그래서 힐 데 마그의 설명으로부터 전해지는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유아 만큼은 아니지만, 진이나 미엘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유아에게 황금 상자가 내려지고 조력자라는 계급이 주어졌을 때만 해도, 공포와 죽음의 뜻이 혹시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서 힐 데 마그가 특별한 전언이 있다고 했을 때도, 솔직히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닌가 하는 식의 예측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이것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게다가 더 엄청난 규모의 일이었다.
이쯤 되고 보면, 두려워지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공포와 죽음은 그들에게 무슨 일을 맡기려 하는 것일까.
물론 도박 때문에 빈털터리가 된 채 비어버린 주머니를 채우러 헤르타로 돌아왔던 할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규모의 얘기에 끼어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는 탓이다.
형진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고는 눈앞에 놓여진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아마도 힐 데 마그는 처음 얘기를 꺼낼 때부터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차를 준비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따뜻한 차로 조심스럽게 목을 축였다. 그러자 마치 연쇄 반응처럼 유아와 미엘, 그리고 할 역시 차로 손을 가져간다.
따뜻하고 향긋한 차를 마시고 나니 조금이나마 긴장으로 인해 굳었던 신체와 정신이 이완되는 것을 느낀다. 형진은 찻잔에 담긴, 이름을 알 수 없는 차를 전부 비우고 난 뒤에야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힐 데 마그는 비어버린 그의 찻잔을 다시 채워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말씀하십시오.”
형진은 또르르 소리를 내며 채워지는 찻잔을 바라보며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망자의 대지나 뒤에 이어진 말씀은 잘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쯤 되고 보니 막상 공포와 죽음께서 저희들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시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분명 저희들은 다른 집행자들과는 차별화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이런 식으로 큰 규모의 일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의문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규모의 사안을 해결하는 것이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형진의 말에 힐 데 마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한 말씀이십니다. 신과 인간의 영역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고, 그 역할의 한계 또한 분명히 구분되어 있죠.”
하지만 힐 데 마그는 뒤이어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공포와 죽음께서 전하시고자 하는 뜻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지금 제 앞에 앉아 계신 여러분만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라니.
형진은 요리와 세공에서 장인을 찍었다. 또한 희망과 생명의 대리자이며, 허세와 망상의 추종자들인 요정을 통치하는 요정왕으로 불린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는 말하지 않은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인 인스턴트 킬을 가지고 있다.
미엘은 환수다. 집행자 가운데서도 최상위 3등급 가운데 하나인 종결자에 해당하는, 만약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에 비견될 만한 막강한 힘을 가진 그런 존재.
유아는 신녀다. 직접 그 몸에 여신을 강림시킨 적도 있고, 또한 숨만 붙어 있다면 설사 팔 다리가 갈기갈기 찢겨진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할지라도 본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기적의 성광과, 발현한 것만으로 언데드를 침묵시키고 본래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도록 만드는 은혜의 성광이라는 능력을 가진, 아마도 역사상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그런 신녀다.
할 데 마그는… 음, 잘 모르겠다. 상당히 강할 것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기는 해도 현재로서는 도박 중독에 빠진 남자라는 것 밖에는.
어쨌든 면면은 분명 화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도대체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설마 요리를 퍼뜨려 세상을 행복함으로 젖어들도록 만들라든가 하는 식의 황당무계한 얘기는 아닐테고.
얘기가 계속될수록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형진을 향해, 마침내 힐 데 마그가 입을 열었다.
“공포와 죽음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그녀의 시선은 이 순간 다른 누구도 아닌 형진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엘 파르드로 가라. 그리고 더 이상 그곳에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억울한 죽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라. 그리하면 모두가 평안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