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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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충돌
엘 파르드에 대한 장악 계획을 알고 있는 이들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이해했고, 계획을 알지 못하는 이들도 어렴풋이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던전은 기본적으로 자연적인 구조물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구조 자체가 상당한 복잡성을 띄며 전체를 조감하기 힘들기 때문에 돌파하기가 쉽지 않다. 대미궁의 경우엔 여기에 더해 서브 코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규칙성을 파악하기가 일반적인 던전에 비해 훨씬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이해하고 충분한 경험을 갖춘 모험가와, 그들의 탐색을 도울 수 있는 무력과 자금이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지원된다면, 아무리 복잡한 구조를 가진 대미궁이라 해도 더 이상 정복 불가능한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번 공작가의 서브 코어 장악으로 증명된 셈이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처음에 다소 어렵더라도 그 한 번의 고비를 넘긴다면 다음부터는 제법 수월하게 일이 진행되기 마련.
그러나 마침 엘 파르드에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형진으로서는 공작가의 이런 성과가 절대로 달갑지 않은 일이다. 자칫 일이 제대로 마무리 지어지기 전에 국가 간의 전쟁 상황이 발생한다면 분열되어 있던 세력들이 단숨에 통합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내부적인 분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외형적으로만 잠시 힘을 합치는 상황이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작게 나뉜 세력을 상대하는 것과 하나로 합쳐진 세력을 상대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대미궁으로 인해 촉발된 위협이 잠시나마 무력화되었을 경우 잠시나마 크고 작은 세력으로 결집되어 있던 엘 파르드의 상황이 다시 분열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특히나 몇 년 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극심한 물자 부족이 신전 세력을 통해 해소되면 잠시나마 힘을 합쳤던 것을 무효화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들 개연성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렇게 분열된 자들을 채권 추심으로 흡수하는 작업은 아무리 빠르게 진행하더라도 몇 개월은 소요될 수밖에 없다. 형진에게는 바로 그 몇 개월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고, 그 때문에 인위적인 던전 창조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공작에게 천천히 공략하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라야바르트만 대미궁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는게 아니라는 사실. 그렇다면 공연히 기밀을 누출하는 것보다는 공략 자체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효과적이다. 애초에 대미궁의 장악은 처음부터 고려했던 사항이기도 하고.
물론 크루그나 오귀스트는 이런 세세한 상황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형진이 던전 창조를 통해 대미궁의 돌파를 막으려는 것이 엘 파르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때문에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얼마 전에 식구가 된 할 데 마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문득 제랄딘이 비서관 전용의 메신저로 말을 걸어온다.
[진.] [왜? 제랄딘.] [제가… 이 일을 계속 맡아도 좋은 가요?]그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형진이 대미궁을 틀어막으려고 생각한 이상, 제랄딘의 본가인 브라드로슈 공작가는 어찌 보면 잠재적인 형진의 적대 세력이 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가문의 영애인 자신이 엘 파르드 장악 계획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식량 대여를 전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형진 아래 좀 더 복잡하고 전문성을 갖춘 참모부가 존재했다면, 그들은 이 계획을 제랄딘에게 계속 맡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경고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형진이 거느린 이들이 좀 더 정치적으로 복잡한 구성원을 지니고 있었다면, 이것은 의견 충돌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명분일 수도 있었다. 제랄딘의 질문은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제랄딘은 유아나 미엘과는 달리, 다분히 정략적인 이유를 가지고 형진과 결합한 처지. 그것은 다시 말해 정략적인 이유가 사라지면 그 관계 또한 얼마든지 청산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의 이 질문은 제랄딘에게 있어 운명 그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제랄딘은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가문이나 아버지, 어느 쪽도 중요하지 않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바라고 이었다. 자신에게 굴레처럼 씌워진 가문과 아버지라는 이 두 가지 요소에서 벗어나 제랄딘이라는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원하고 있었다. 이번 엘 파르드에서의 일은 자신이 그러한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토대. 때문에 이 일에서 밀려나고 싶지 않았다.
가문과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가문과 아버지 때문에 잃을지도 모른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그래서 제랄딘은 가슴을 졸이며 형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랄딘.] [네.] [요새 일이 많이 편한가봐?] [네? 그게 무슨…] [일이 너무 쉽고 편해서 막 딴 생각이 나고 그래? 그런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기대했던 대답과는 전혀 다른, 어째 이게 아닌데 싶은 대화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미엘, 어떻게 생각해?] [뭘요?] [제랄딘이 아무래도 벌을 받고 싶은가봐.] [어휴. 왜 당신은 항상 그런 식으로 발상이 이어지는 건데요.] [내가 뭘?]그러자 형진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 걷고 있던 유아가 볼을 부풀리며 대화에 끼어든다.
[저는요? 저는 벌 안줘요?] [넌 또 왜? 뭔가 잘못 했어?] [네. 아주 아주 큰 죄를 지었어요.] [호오. 스스로 죄를 밝히고 벌을 청하다니, 아주 바람직한 메이드로군. 그래 무슨 죄를 지었는데?] [진이 자꾸 미엘님이랑 제랄딘님한테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서 막 질투심이 나요. 그러니 벌을 주세요!]이게 무슨 조선왕조 오백년이냐. 질투했다고 벌을 주게.
[유아… 요새 많이 대담해졌구나.] [싫어요?] [아니, 싫은 건 아니다만. 하긴 요새 가슴 키우기에 좀 소홀하긴 했었지. 오늘 아주 날을 잡을까? 마침 좋은 방앗간도 지어졌으니.] [벼, 변태!]자기는 나름대로 심각한 기분으로 질문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이 받아넘기고 다른 여자들과 꽁냥거리고 있으니 제랄딘으로서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어쩐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정도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형진이 처음부터 자신을 가문과 결부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거면 된 거다. 애초에 그걸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제랄딘은 그제서야 웃으며 얼른 형진의 남은 팔 하나를 꽉 끌어 안았다.
[엇, 제랄딘은 또 왜 그래?] [왜요? 제가 팔짱끼는 거 싫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이래서는 걷기가 좀 힘든데.]더구나 지금은 산책을 나온 것도 아니고 던전을 탐색하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양 팔을 못 쓰게 만들다니.
그때 선두에서 걷고 있던 할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거… 좀 이상한데요? 처음의 공격을 빼고는 달리 위협적인 뭔가가 느껴지질 않습니다.”
“그렇군요. 이쯤 되면 뭔가 나올 법도 한데.”
오귀스트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을 받자, 그제서야 형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 그거 사실은 제가 던전의 기능을 조종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네?”
일행들은 다시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함정 작동을 좀 멈추고 소환된 몬스터들을 다시 되돌려 놨을 뿐입니다. 저도 이번에 새로 만든 스킬이니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해볼 필요가 있어서.”
“…”
그저 던전만 덜렁 만들고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만든 던전의 세세한 부분까지 조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
“허허…”
오랫동안 모험가로 활동해 왔던 오귀스트는 허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지난 세월 동안 어두운 지하를 헤집고 다녔던 것이 다 멍청한 짓으로 느껴질 정도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형진이 말했다.
“이 참에 이렇게 해보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또 무슨 엉뚱한 생각을 떠올린건가 싶어 돌아보는 사람들 가운데 오귀스트를 향해 형진은 씨익 웃어 보인다.
“오귀스트님. 이 참에 던전 마스터 역할을 한번 해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던전 마스터… 입니까?”
“네. 만드는 건 제가 할 수 있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할 일이 좀 많잖아요. 오귀스트님은 오랫동안 모험가 생활을 해오셨으니, 그들이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이는지를 잘 아실 겁니다.”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러니 적당히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고 헤맬 정도의 난이도로 관리해 주십시오. 제가 관리했다간 다 죽어나갈지도 모르는데, 역시 그건 좀 찜찜한 일이기도 해서.”
사실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보다도, 브라드로슈 공작 가문이 입을 피해가 조금 신경 쓰인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뭐라해도 제랄딘의 본가이니 대미궁을 장악하는 것은 막는 건 그렇다쳐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 건 좀 미안하달까.
오귀스트 역시 친구인 그랙커스를 비롯해서 친분이 있는 기사들이 많은 관계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밥값을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미안했었는데, 그런 일이라면 충분히 제가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밥값이라뇨. 무슨 그런 말씀을. 다 같은 식구끼리.”
하마란과 함께 날파리들을 청소하는 일을 못하게 된 것이 좀 아쉽긴 하지만, 현재는 저택이 사실상 비어 있는 상황이니 따로 청소를 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정 뭐하면 할 데 마그에게 자신이 하던 일을 맡겨도 되는 일이고.
“그런데, 던전의 관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도 있는 거에요?”
“보니까 되더라고.”
“헤에…”
“왜? 해보고 싶어?”
“아뇨! 절대 아니에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어 보이는 유아의 모습에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형진의 안내를 받아 지하에 자리 잡은 코어의 모습을 살펴보고는 요정의 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왔다.
“일단 던전의 기능은 동결시켜 놨으니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안에 들어가서 길을 잃는다거나 할 수도 있으니까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결계를 쳐줘.”
“안 그래도 준비하고 있었어요.”
미엘이 결계를 치자, 형진은 튼튼한 석재를 가져다가 입구에 문을 달고 자물쇠를 채웠다.
“혹시 수련 같은 걸 하고 싶거나 스트레스가 쌓여서 풀고 싶다 하시는 분은 말씀하세요. 언제든 열쇠를 빌려드릴 테니.”
“알겠습니다.”
간단하게 실험용 던전의 탐사가 끝나자, 형진은 곧바로 인벤토리 안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인챈트용 구슬들을 꺼내 던전 코어를 제작하는 일을 시작했고, 마침내 제작이 끝나자 요정의 문을 통해 대미궁으로 향했다.
“던전 코어를 직접 만들 수도 있다면, 기존에 존재하고 있는 던전 코어를 장악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대미궁 안에 새로운 서브 코어를 심는 동시에, 그것의 위치를 확인하고 관리 권한을 넘겨받기 위해 따라온 오귀스트가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는 좀 더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더라도 코어의 기능을 정지시킨 후 새로운 사념체를 집어넣는 방법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죠.”
“아하, 하긴 그런 방법도 가능하겠군요.”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대미궁 안으로 돌아다니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듯한 소음이 들려온다.
“선객이 있는 모양입니다.”
“굳이 상관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조용히 지나치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형진과 오귀스트는 은신과 잠행을 펼친 뒤 조용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어느 정도 접근해서 그곳의 상황을 확인하는 순간 형진과 오귀스트는 말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얼굴을 찌푸렸다.
[저건… 소그마 경이 아닙니까.] [제 눈이 잘못 된 건가요? 소그마 경이 누군가에게 밀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소그마는 본래 황자에게 속해 있다가 브라드로슈 가문으로 소속을 옮긴 상급 기사다.
[저도 그렇게 보이는 군요. 다만 소그마 경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아무래도 독 같은 것에 당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살펴보니 그나마 제대로 움직이는 것은 소그마 정도가 고작이고, 나머지는 부상을 당했거나 이미 숨이 끊겼는지 바닥을 뒹굴고 있다. 더구나 그나마 버티고 있는 소그마 역시 눈에 띄게 몸이 둔해져 있는 상황이라 이대로 가만히 놔두면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듯한 모습이다.
[쳇. 그냥 모른 척 지나치려고 했는데.] [도우시겠습니까?]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죽는 걸 그냥 보고 지나치긴 좀 그렇겠죠.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궁금하고.] [알겠습니다.]상의가 끝나자, 오귀스트와 형진은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