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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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인교습
앞치마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에 잠시 멈추었던 형진의 사고는 아란의 손이 상의의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하자 미친 듯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입은 모습을 보여 달라고는 했지만, 그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형진은 아란의 손가락이 나긋하게 움직이며 단추 하나를 풀고, 그 순간 앞섶이 압력에서 해방되며 퉁 하고 벌어지는 순간을 느린 화면으로 보는 것처럼 또렷하게 뇌리에 각인했다.
벌어진 앞섶으로 비치는 투명한 속살. 그 모습에 잠시 넋을 놨던 형진은 그녀의 손가락이 다음 단추를 풀기 위해 움직이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뒤돌아섰다.
사락, 사라락.
하지만 그렇게 돌아서자 등 뒤로 옷자락의 소리라든가, 그 옷이 몸을 스치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같은 것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청각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렇게 귀를 통해 전해진 소리들은 차라리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아찔하고 짜릿한 광경들을 형진의 뇌 속에서 창조해낸다.
형진을 괴롭히는 것은 비단 청각만이 아니었다.
뭔가 달짝지근하면서도 어렴풋이 풀냄새도 섞인 것 같은 체향이 이 순간 형진의 망상을 더욱더 부추기고 있었다. 분명 아란을 인지하는 순간 급히 사냥개의 코장식을 벗어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착용하고 있는 것처럼 후각을 통해 전해지며 그렇지 않아도 미칠 것만 같은 상황을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냥 다시 돌아 볼까.
애초에 보지 말라는 얘기도 없었고, 본인도 스스럼없이 눈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했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느긋하게 봐주는 것이 예의인 건 아닐까. 기껏 보여주겠다고 나섰는데 등 돌리고 안 보는 쪽이 오히려 무례인 건 아닐까.
보지 말라는 걸 억지로 보는 것도 아니고, 어딘가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는 것도 아니다. 보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바로 코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봐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래. 보자. 보는 거다. 확실하게 눈으로 보고 마음 속의 보물로 각인하는 거다!
“이제 돌아서도 괜찮아요.”
“…”
하지만 그 결심을 차마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형진의 귀에 달콤한 아란의 목소리가 전해진다.
말도 안 돼. 벌써 다 갈아입었다고? 바니걸 슈트라는 게 그렇게 입기 쉬운 구조였나? 스타킹이라든지 스타킹이라든지 스타킹 같은 걸 생각하면 그렇게 순식간에 갈아 입는 건 불가능할텐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돌아본 형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뽀얗게 드러난 쇄골과 가슴골, 그리고 아줌마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날렵한 각선미를 망사스타킹으로 감싼 풍염한 몸매의 아름다운 바니걸이었다.
“어때요. 이상하지 않은가요?”
“머, 멋집니다. 정말 잘 어울려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하자, 싫지는 않은 듯 아란은 상기된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짓더니, 주먹을 살짝 쥐고 그것으로 형진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칭찬은 고맙지만, 불합격이에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형진을 향해 아란은 조금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중간에 돌아선 것 말이에요.”
돌아선 것이 불합격이라고? 그럼 역시 계속 지켜봐야 했단 말인가?
대답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얼떨떨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형진의 모습에 아란은 살짝 눈을 흘기고는 말을 이었다.
“진씨.”
“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죠?”
“그야…”
“우리는 각인의 집행자에요. 그리고, 각인의 집행자는 아무리 좋은 말로 둘러대도 결국은 암살자고요.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여자가 옷을 벗는다고 눈을 돌리고 무방비 상태로 등을 드러내는 암살자라니, 내가 다른 마음을 품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
차분하게 다독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형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흐릿하게 풀어져 있던 정신이 화들짝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 안돼요. 젊은 암살자가 죽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무엇도 아니고 바로 이성 때문이죠. 여성 암살자의 가장 큰 무기는 몸이기도 하고요. 진씨가 각인의 집행자로서 살아가기 위해선, 이것을 절대로 잊어선 안돼요. 알겠어요?”
멀리 볼 것도 없이 함께 시험을 치렀던 가트가 어떻게 죽었는지 떠올리자 등골에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아, 알겠습니다.”
“좋아요.”
아란은 엄격한 표정을 풀고는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내 신분을 확실하게 밝히지 않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요. 우선… 앞서도 말했지만, 전 진씨 같은 신입을 받아보는 것이 처음이에요. 정확히는 지부장이 된 것조차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야겠죠. 암살자로서 누군가를 가르쳐 본 경험도 없고, 진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 동안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한 거에요.”
“아…”
“이전까지 그란웰 지부를 맡고 있었던 분은, 당신에게 낙인을 넘겨주고 엘리시온으로 넘어간 그 분이에요. 솔직히 그분이 저를 다음 대의 지부장으로 지명한 것 자체가 너무 급작스러웠기 때문에 좀 당황했던 면도 있구요. 이해가 되세요?”
“네. 그럭저럭.”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상사는 상사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아란의 말을 새겨들으려고 노력했지만, 자꾸만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뽀얀 살결과 달달한 체향이 그런 결심을 방해한다.
훌륭하다. 자신의 몸을 교보재로 삼아 여체의 위험함을 손수 가르치려 하다니.
형진이 조금 긴장한 모습을 보이자 아란은 특유의 눈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사실 가만히 보고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현재 진씨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서였어요.”
“방향이라면…”
“굳이 암살자라는 티를 내지 않고, 그저 성실하고 솜씨 좋은 순진한 청년으로서 행동하는 것 말이에요.”
“아…”
딱히 무슨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엘리시온에서 몸에 배인 습관들이 다시 드러났을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칭찬을 받으니 뭔가 묘한 느낌이다.
“간단한 얘기에요. 만약 진씨의 눈앞에 딱 봐도 험상궂고 뭔가 살기를 품은 듯 보이는 위험한 인상의 남자와, 세상 물정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순진하고 아리따운 아가씨가 함께 서있다면 어느 쪽을 더 경계하시겠어요?”
“남자 쪽이겠죠.”
“그렇죠?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볼게요. 어느 쪽이 당신을 암살하기 더 쉬울까요.”
“그야…”
형진은 아란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알아들었다. 험상궂은 남자 쪽은 자신의 위험성을 다른 이에게 내보이고 그것으로 압박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존재감을 드러낸 이상 은밀함을 요구하는 암살을 실행하기는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다. 뭐라 해도 상대가 이미 자신을 감지하고 경계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은밀한이라는 단어에는 적합하지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하고 아리따운 아가씨라면 아무래도 마음이 풀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심성이 좋지 않은 자라면 스스로 접근하여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을 하려고 마음먹을 수도 있다. 상대의 반응이 경계심을 푸는 것이든, 좋지 않은 흉계를 꾸미는 것이든 간에 멀어지려고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암살의 기회를 잡기엔 충분한 조건이 된다.
“물론 이건 무조건 맞는 예시는 아니에요. 일부러 경계심을 한쪽으로 유도한 다음 그렇게 만들어진 빈틈을 노리는 방법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평범해 보이지 않는 사람보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이죠.”
“그렇군요.”
형진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란은 그런 태도가 흡족한지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보급이라든가 긴급운송 같은 임무가 있는 것도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물론 표적이나 조사관들의 눈으로부터 물자의 흐름을 속이려는 의도도 있지만, 그런 일들에 숙달될수록 그만큼 몸에 배인 피 냄새가 옅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씨가 요 며칠간 보여줬던 행동들은 아주 바람직했어요. 적어도 가트라는 그 애송이에 비하면 말이죠.”
“가트를… 아십니까?”
아란은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알다 뿐인가요. 그런 놈들 때문에 우리들이 쓸데없이 욕을 먹는 측면도 있으니 어떻게 보면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이죠. 다행히 얼마 전에 깨끗하게 정리가 되긴 했지만.”
뭔가 저번 임무에 대한 뒷 얘기가 더 있는 모양이다.
“어떻게 되었길래…”
“가트의 결말이야 진씨가 가장 잘 아실 테고… 문제는 그놈의 패거리였죠. 가트가 입단 심사를 받는다는 얘기를 흘렸는지, 아예 단검에 문양을 새겨가지고 들고 다니면서 자기들도 각인의 집행자라고 떠들고 다녔죠. 그것이 자신들의 명을 재촉할지도 모르고.”
“…”
단검에 문양을 새겨서 들고 다녔다는 아란의 말에 형진은 다시 한 번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나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봐요.”
“실은 오늘 산을 오르다가, 근처에서 암매장된 시신을 하나 찾았습니다.”
아란은 무슨 얘긴지 알았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근처군요. 맞아요. 가트의 패거리중 하나에요. 아무리 간이 배 밖에 나왔어도 감히 성도를 사칭하다니, 어리석은 놈들이죠.”
문득 주정뱅이가 남겼던 계율이 떠오른다.
하나, 웬만하면 공포와 죽음의 이름을 드러내지 말라.
하나, 어지간하면 성도임을 스스로 밝히지 말라.
물론 가트의 패거리는 이것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다. 놈들이 죽은 이유는, 함부로 각인의 집행자임을 사칭하고 다니면서 그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 원인이라고 봐야 한다. 예상대로 다른 어떤 계율보다 마지막 두 가지 계율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놈들은 그런 식으로 형진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딱히 심심하다고 아무나 막 죽이고 다니지 말라는 계율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의뢰 대상이 아닌 자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자칫 스스로의 신분을 드러낼 수 있는 위험한 일이다.
신분이 드러난 암살자는 더 이상 암살자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도 사실.
때문에 이런 위험성을 무시하고 의뢰 대상이 아닌 자들을 살해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지만, 성도를 사칭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은 그런 통상적인 상례에서 벗어나는 특별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형진은 가트 패거리의 죽음을 가볍게 언급하는 모습을 보면서 눈앞에서 헤프게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줌마가 실제로는 냉혹한 암살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꼈다.
아란도 그런 형진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다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할 것 없어요. 진씨도 초보지만, 저도 지부장으로서는 초보니까 서로 배워가며 잘 지내보도록 해요. 그럴 수 있겠죠?”
“네. 지부장님.”
“아란이라고 부르라니까요. 자칫 말실수로 다른 사람앞에서 그렇게 부르면 안 되잖아요.”
“알겠습니다. 아란… 씨.”
“좋아요.”
아란은 싱긋 웃음을 짓더니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고마워요. 미련을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손에 넣고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던 모양이에요.”
“저야 입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는걸요. 제 주인을 찾은 듯 해서 저도 기쁩니다.”
아란은 여전히 긴장한 기색을 보이는 형진을 향해 눈을 찡긋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혹시 지금의 이 모습이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도 좋아요. 진씨라면 특별히 보여 줄 테니까.”
“하… 하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안가지만, 그래도 당분간 밤이 좀 고달파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장 오늘밤을 어떻게 보내야할지가 막막해질 정도로, 이 아줌마의 매력은 너무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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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요약하면, 다음부터는 서비스신이 나오면 면밀하고 치밀하게 대놓고 관찰하라는 의미다.
주인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