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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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인교습
떡갈나무 숲에서의 은밀한 만남 뒤로 아란은 다시 급하게 마을로 돌아가고, 형진은 멧돼지의 시체를 챙겨서 마을로 돌아왔다.
성도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을 초입 근처에서 인벤토리에 담긴 멧돼지 사체를 꺼내놓은 형진은 마을 안으로 들어가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내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죄다 몰려 나와 멧돼지를 안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어이쿠. 이놈 그거 아닌가?”
“맞네. 숲주인이네. 설마 이놈을 혼자 잡은 거야?”
산더미 같은 체구를 가진 멧돼지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곧바로 괴물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이런 멧돼지를 잡아온 형진에게 향했다.
“그게… 운이 좋았습니다. 글쎄, 제가 자작나무 껍질을 캐고 있는데…”
살짝 당황한 듯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조금 버벅거리는 느낌으로 형진은 자신이 어떻게 멧돼지를 잡은 건지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자작나무 껍질이랑 버섯을 캐고 있는데 이 놈이 덮쳐왔고, 정신없이 피하다가 바위 뒤로 숨었는데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식의 얘기다.
논리적으로 뭔가 상당히 어설픈 얘기였지만, 그렇다고 이런 괴물 같은 놈을 혼자 때려잡는다는 것도 믿기 어려운 일. 몇몇은 여전히 긴가 민가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기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고, 곧바로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돼지를 해체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여러 사람이 달려드니 돼지를 해체하는 작업은 순식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형진은 자신이 먹을 큼지막한 뒷다리 하나를 음식점에 맡겨 훈제를 부탁하고는 해체를 도운 이들에게 나머지 부위를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어차피 자신은 막타를 친 것 뿐이고, 그 댓가로 귀걸이를 얻었으니 고기야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더구나 실질적으로 돼지를 잡은 아란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자네 정말 멋진 친구군. 사람이 됐어.”
“별 말씀을요. 실력으로 잡은 것도 아니고, 혼자서는 다 먹지도 못하니 나누는 게 낫겠다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걸 두고 사람이 됐다고 말하는 거야. 자, 내 잔 받게.”
“감사합니다.”
마을에는 때 아닌 잔치가 벌어졌고, 이곳저곳에 끌려 다니며 인사를 하다 보니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 있었다.
“후아…”
오랜만에 술을 많이 마신 탓인지 기분이 꽤 얼큰하다. 제대로 자리에 앉아서 퍼마신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인사하며 한잔씩 건네받은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양이 꽤 된다.
기분이 알딸딸하니 문득 아까 보았던 아란의 바니걸 모습이 떠오른다. 게다가 은은하게 전해지는 그 달달한 향기도 마치 코앞에 그녀가 서 있는 것처럼 다시 느껴지기 시작한다.
“고생했어요.”
“헉!”
하지만 곧이어 갑자기 들려온 친근한 목소리에 형진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아, 아란씨.”
“놀랐어요? 후훗.”
그야 당연히 놀랄 수밖에. 소리도 없이 들어와서 바로 옆에서 그렇게 느닷없이 말을 걸면 놀라는 게 당연한 일이다.
“어, 어쩐 일이십니까. 이런 시간에…”
이미 본래의 앞치마 차림으로 돌아와 있는 모습에 조금 실망하며 그렇게 묻자, 아란은 특유의 눈웃음을 흘리며 형진에게 말했다.
“아까 미처 건네지 못한 것이 있어서요. 손을 내밀어 봐요. 각인이 새겨진 손.”
“…”
형진이 손등을 내밀자, 아란은 자신의 손을 내밀어 각인끼리 마주보도록 하고는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형진의 시야에 메시지가 연이어 나타난다.
[축하합니다! 스킬 ‘은신’ lv.0을 습득했습니다!] [축하합니다! 스킬 ‘잠행’ lv.0을 습득했습니다!]그러고 보니 앞서 아란은 자신의 직책을 지점장 외에 스킬마스터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집행자에게 스킬을 전수하는 것도 그녀의 역할인 셈이다.
“오늘은 이미 늦어버렸지만, 내일부터는 이것도 함께 수련하도록 해요.”
“그런데, 레벨 0이라고…”
“그건 아직 완전히 체득이 되지 않은 상태라서 그래요. 일정 기간 동안 수련이 가능하도록 제가 임의로 스킬을 전수한 상태라고나 할까요. 그 상태에서 반복 수련을 통해 완전히 체득이 이루어지면 비로소 레벨 1로 올라서면서 진씨의 것이 되는 거에요.”
“아하…”
설명을 듣고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낮 시간에는 아무래도 드러내 놓고 가르쳐 주기가 어려워요. 그러니 밤 시간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괜찮겠죠?”
“물론입니다. 저야 그저 돌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죠.”
어둑한 밤에 이런 눈웃음 헤픈 아줌마와 단둘이 개인교습이라니, 당연히 감지덕지한 일이다.
“훗. 말이나 못하면.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쉬세요.”
“네.”
아란은 왔을 때처럼 기척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아마도 지금 그녀가 사용한 기술이 바로 잠행이나 은신 같은 기술이 아닐까 싶다. 과연 스킬마스터. 바로 코앞에서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데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어떻게 집을 빠져 나갔는지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몽롱한 술기운에 이대로 잠이나 잘까 싶었던 형진이었지만, 이렇게 대단한 스킬의 시연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냥 가만히 누워 잠을 청하긴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건 핑계다. 방금 전 왔다간 아란의 체향 때문에 아무래도 이대로는 잠들기가 어려울 것 같으니 적당히 땀을 빼야 할 것 같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편이리라.
형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힘과 민첩 등의 매크로 수련을 3세트씩이나 해치운 뒤에야 몸을 씻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잘 잤어요?”
“네, 뭐 그럭저럭…”
아침 일찍 일어나 씻으러 나온 형진을 발견한 아란이 살짝 눈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건넨다. 물론 그럭저럭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결국 몇 번이나 자다가 일어나 매크로 수련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손장난을 칠까도 싶었지만, 혹시라도 아란이 소리도 없이 들어오면 어쩌나 싶어서 그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곳 술이 좀 독하죠? 속이 풀리라고 고기를 넣고 매콤하게 스튜를 만들었어요. 들어요.”
“감사합니다.”
피로감이 가득한 형진의 얼굴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차피 해장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어쩐지 입맛이 좀 쓰다.
식사를 마친 형진은 멧돼지 고기 스튜의 버프 효과가 다 할 때까지 매크로 수련을 하며 번뇌를 떨친 뒤, 오늘치 물뜨기를 마친 다음에야 다시 푸딩을 먹고 어제 하다만 손수레 제작을 이어갔다.
“끙차.”
대충 골격의 완성을 끝내고 바퀴 제작을 위한 보조 도구의 제작을 끝내자 얼추 정오가 되었다.
“그런데 뭘 만드는 거에요?”
“그냥, 간단한 손수레를 만들어 보고 있습니다.”
“손수레요? 그런 것도 만들 줄 알아요?”
“그냥 흉내만 좀 내는 수준입니다. 어디 내놓고 자랑할 정도는 못 됩니다.”
“흉내만이라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에요.”
“하하…”
오늘 아란이 가져온 음식은 채소 절임과 버터 쿠키다. 버터 쿠키는 집중력을 높여주고, 채소 절임은 지구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다. 채집이나 가공과 같은 특정한 기술에 직접적으로 작용 한다기 보다는 모든 스킬 랭크 향상에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음식들이다.
“또 숲에 갈 건가요?”
“네. 임무도 하고 수련도 하고 겸사겸사.”
“숲의 주인이 어제 잡혔으니 당분간은 별 문제 없을 거에요. 아마 시간이 지나면 다른 무언가가 다시 자리를 잡을지도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알겠습니다.”
아란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부탁인데요. 어제 보니까 버섯도 캐는 것 같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럼 혹시 표고버섯을 찾으면 저한테 좀 파세요. 값은 후하게 쳐드릴게요.”
“값은요. 그 정도는 당연히 진상해야죠.”
“뭔가 불순한 의도가 느껴지는 뇌물인 것 같은데요.”
“설마요. 저만큼 순수한 청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십시오.”
그렇게 한참 되도 않는 뻘소리를 늘어놓으며 하늘같은 상사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 형진은 망태기를 챙겨 들고는 역시나 임무를 확인했다.
[물자 조달] -임무를 수행중인 형제로부터 물자 조달의 임무가 들어왔다.-필요한 물자: 숯
-수량: 50개.
-제한계급: 하급성도
-보수: 돌란 동화 20개, 팩션 공헌도 6.
(주의) 화력이 부족해서는 곤란합니다. 가급적 참나무 종류가 좋겠습니다.
제련이라도 하는 건가. 하긴 어디에 쓰든 딱히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그냥 평범하게 통나무 임무나 해볼까 하다가, 가공 스킬도 적당히 오르고 있으니 좀 더 난이도 있는 임무를 맡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이것을 골랐다.
떡갈나무도 일단 참나무 종류이고, 숯으로 만들었을 때 화력이 좋고 오래가는 점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숯으로 만드는 과정이겠지만, 엘리시온에 있을 때 수없이 해봤던 일이라 재료만 갖춰지면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어차피 오늘의 주 목표는 경황이 없어서 캐다만 송로버섯이기도 하고.
오후 내내 떡갈나무 숲을 킁킁거리며 돌아다닌 덕분에 제법 많은 송로버섯과 표고버섯을 얻을 수 있었고, 순식간에 엄청난 양의 채집 경험치를 얻을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나흘 안에 채집 전문가가 되는 것도 꿈은 아닐 것 같지만, 그때까지 버틸 만큼 송로버섯이 남아있을지가 걱정이다.
숯을 만들 떡갈나무 장작을 캔 다음에는 어제 아란에게 전수받은 은신과 잠행 스킬을 연습했다.
이 두 가지 스킬은 암살자라면 당연히 익혀야할 기초 중의 기초. 화려한 공격 기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어제 보여주었던 아란의 수준까지 숙달할 수 있다면 효율적인 침투는 물론이고 위기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구명줄이 될 수도 있다. 게임인 것 같으면서도 게임과는 차별성을 가지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특히나 더 중요할 수밖에 없는 스킬이다.
버터 쿠키와 채소 절임이라는, 어떻게 보면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음식으로 도핑을 한 형진은 버프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열심히 이 두 가지 스킬을 연습했다. 물론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히 경험치가 오르지는 않는다. 아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모르겠다. 역시 혼자서는 무리인 걸까.
어쨌든 숲 속에서 채집과 수련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형진은 간단하게 씻고 매크로 수련으로 몸을 푼 다음 아란이 방문하기를 기다렸다.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신병처럼 바짝 얼어서 부동자세로 답하는 형진의 모습에 아란은 다시 웃었다.
“아이가 잠이 늦게 들어서 빠져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어요. 그럼 시작하죠.”
“네.”
그러고 보니 아란의 남편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솔직히 좀 궁금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고, 이런 시간에 자유롭게 빠져 나오는 걸 보면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자코 입을 다물 뿐이다.
“성도들이 사용하는 은신 기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은신과는 조금 달라요.”
“어떻게 말인가요?”
“은신이라고 하면 보통 어딘가에 몸을 숨긴다거나 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죠. 수풀이나 그림자 같은 곳이라든지, 땅을 파고 들어가서 숨는다든지. 이런 식의 은신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성도들이 사용하는 은신은 일종의 권능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권능이라고요?”
“그래요. 기척을 지우고 자신의 존재감을 숨긴 다음 공간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쓰이는 것인지는 다소 설명하기 어렵긴 해요. 어느 순간 ‘아, 이런 것이었구나’ 하고 체감하는 거라서요.”
그래서 혼자 할 때는 그렇게 헛바퀴 도는 느낌이었던 건가.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것이니 직접 느껴보는 수밖에 없어요. 자, 손을 잡아 봐요.”
“…”
내밀어진 손을 말없이 잡자, 아란은 다시 말했다.
“이제 눈을 감아요.”
“…”
그녀의 말대로 눈을 감자, 형진은 무언가 자신의 존재가 붕 뜨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뭐랄까.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딛고 있는 땅조차 사라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진 것 같은 그런 기이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다시 눈을 떠도 좋아요.”
그 말에 따라 형진이 눈을 뜨자, 아란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기분이 어땠나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형진이 주섬주섬 자신의 감상을 말하자 아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좋아요. 생각보다 잘 따라와 줘서 기쁘네요. 이런 식이라면 며칠 안에 두 가지 스킬을 모두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니에요. 아주 잘 했어요. 처음인데 그렇게 단숨에 몰입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몰입이라고요?”
반문하는 형진의 모습에 아란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설마 시간의 흐름조차 잊은 건가요? 대단하네요. 진씨는 느끼지 못한 것 같지만, 수련을 시작한지 벌써 두 시간이나 지났어요.”
“네? 두 시간이라고요?”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두 시간이라니. 듣고도 믿지 못할 일이다.
“그래서 대단하다는 거에요.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이 상태라면 혼자 밖에서 수련하라고 하기도 힘들고. 어쨌거나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 괜히 혼자 수련하려고 하지 말고 오늘은 이만 푹 쉬어요. 휴식도 수련의 일종이랍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시간이 많이 늦긴 했는지 아란은 황급히 형진의 눈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거 참. 모처럼 기대한 밤 시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뭔가 좀 손해 본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