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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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장악
“어떻게 된 거지.”
“글쎄.”
자신들을 이끌던 마법사가 갑자기 불덩이로 변하더니, 검은 그림자의 악마와 함께 던전 천장으로 뛰쳐나가 버리자 남겨진 공략대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하고 있었다.
파스파 왕국의 공략대가 여기까지 무리 없이 전진할 수 있었던 것에는 하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법사의 힘이 절대적이었음을 공략대에 속한 자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하엘은 라야바르트에서 황제가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남과 동시에 각국에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한 결계 강화에 즈음하여 파스파에 나타난 인물이다. 항상 두꺼운 장포로 몸을 가리고 있어서 정확한 실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결계 마법과 화염 마법에 통달해서 왕궁의 상급 기사로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도는 인물이었다.
하엘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빠르게 대미궁의 중심 영역에 들어설 수 있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결계로 수십 개가 넘는 베이스 캠프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공략대가 감당 못할 적이 나타나면 스스로 나서서 물리치기까지 했다. 물론 트래커라든가 다른 병력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하엘이 없었다면 파스파 왕국은 현재 위치는커녕 그 반의 반도 제대로 돌파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하엘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자 공략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무사히 그가 돌아와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그건 무슨 마법이었을까.”
“대단했지. 몸 전체가 화염으로 뒤덮여 버릴 정도였으니.”
“이기셨겠지?”
“당연하지. 하엘 님이시잖아.”
병사들은 그렇게 목소리를 낮춘 채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위쪽에서 맹렬하게 들려오던 폭음과 진동이 사라지자 조금씩 불안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싸움이 끝난 것 같기는 한데, 아무런 기별이 없으니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기사 하나가 나섰다.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을 때는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그 소리가 멈추니 호기심을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슬그머니 다가가 구멍이 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움츠렸을 때는 그냥 좀 흐린 하늘이 보일 뿐 별 것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개를 내미는데, 문득 차가운 물방울이 구멍으로부터 흘러 들어와 기사의 얼굴을 때린다.
“앗, 차거.”
깜짝 놀라서 기사가 얼른 물러나자 지켜보고 있던 공략대들이 흠칫 놀라며 무기를 치켜든다.
“뭐야? 왜 그래?”
공략대의 부조장을 맡고 있는 다른 기사가 묻자, 얼굴에 비를 맞은 기사는 손을 들어 올리며 괜찮다고 말한 뒤 다시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갑자기 시커먼 무언가가 기사의 얼굴을 향해 그대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꽥!”
우아함이나 근엄함이나 경건함 같은 단어와는 백만 광년 정도는 떨어진 비명과 함께 기사는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무언가에 밟히며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어라.”
검은 기운이 풀풀 풍기는 꼬리로 몸을 감싼 채 구멍을 내려온 형진은 발밑에 깔려 있는 기사의 모습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럴 생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하게 기사 하나를 넉아웃 시켜 버렸으니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힉!”
“악마가 돌아왔다!”
불덩이로 모습이 바뀌어 던전 밖으로 뛰쳐나갔던 마법사가 아닌 악마가 나타나자 공략대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이해했다. 마법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렇지만 악마 혼자 이렇게 미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결국 그들을 이끌던 마법사가 악마에게 패배했다는 뜻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어쩌죠?”
“크윽. 이제야 겨우 대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했는데.”
기사는 분하다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고, 그것은 기사의 말을 들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대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이런 터무니없는 존재가 나타났다는 것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일이겠는가.
“이럴 수가.”
“그럼… 이 악마는… 대미궁에서…”
“대미궁의 악마…”
그 순간 공략대의 뇌리에는 대미궁의 악마라는 말이 화인처럼 강렬하게 새겨졌다.
딱히 자신이 뭔가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알아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고 앉아 있는 공략대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다가 이내 환영의 반딧불을 사용해 위치를 옮겼다.
“사라졌다!”
“어디로 갔지?”
갑자기 사라져 버린 형진의 모습에 당황해 하던 공략대들은 갑자기 뒤에서 터져 나온 강렬한 무언가에 그대로 허공을 훌훌 날아 던전의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악”
“컥!”
입고 있는 갑옷과 체중, 그리고 가지고 있는 물품들의 무게를 합하면 공략대 개개인의 무게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그런 자신과 동료들이, 마치 가을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우수수 날아다니는 모습이라니.
충격으로 인해 머리가 딩딩 울리고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공략대는 이 악마가 자신들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임을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하기야 그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던 마법사도 당해내지 못했는데, 정예라고는 해도 결국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자신들이 무슨 수로 감당한단 말인가.
“큭! 정신 차려라! 부상자를 데리고 얼른 빠져 나가 이 사실을 알려라! 여기는 내가 맡겠… 꽥!”
부조장을 맡고 있던 기사가 검을 뽑아들고 그렇게 장렬하게 외쳤지만, 채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아온 무언가에 맞아 역시나 훨훨 허공을 날아 벽에 부딪히며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물러나! 어서! 방패수들, 뭉쳐라!”
“젠장!”
그래도 최전방의 공략대를 맡을 정도의 정예병들이라 그런지 앞서 봤던 공략대처럼 머리를 싸매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방패병들이 모여 진형을 짜고 다른 병사들이 부상자들을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진형은 채 몇 초 유지되지도 못했다.
길 안내를 맡고 있던 트래커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한 탓이다.
“앗! 저 놈들이!”
“젠장! 따라가! 여기서 길을 잃으면 끝장이다!”
악마에게 당해도 죽지만, 대미궁에서 길을 잃으면 그것 역시 죽음에 이르는 가장 간단한 방법 중 하나가 된다.
생존에는 흔히 3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공기 없이 3분, 셸터 없이 3시간, 물 없이 3일, 식량 없이 3주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렵고 개인 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생존에 필요한 조건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특히 이런 던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과 식량이다. 어떻게 보면 대미궁에서 생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이 두 가지인데, 적절한 시간 안에 이것을 보급 받지 못하면 아무리 강력한 무력을 지니고 있어도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린다.
던전 안에서 트래커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이 있어야 보유한 물자를 감안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필요한 활동을 하고 던전을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엘이 만든 베이스 캠프 역시 이런 식의 탐색 활동에 있어서 그 범위와 시간을 획기적으로 늘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트래커를 놓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바로 대미궁에서 길을 잃게 된다는 뜻이고, 곧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에 직면한다는 의미가 되어 버린다.
굳센 방어도 결국은 퇴로가 마련되어 있다는 전제 하에서나 가능한 행동. 트래커가 그렇게 도망쳐 버리자, 모처럼 방패를 치켜든 채 다잡았던 병사들의 마음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결국 그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진형을 무너뜨린 채 부상자를 챙겨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휴…”
공략대를 모조리 죽여 버리는 줄 알고 가슴을 졸이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진은 그런 여신의 모습에 피식 웃고는 품에 안고 있던 작은 여우 모습의 하엘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엘은 그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애완동물 취급 하는 것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반항할 수도 없었다. 여신의 얌전히 있으라는 명령이 그녀의 행동을 강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엘이 굴욕감에 몸을 떠는 모습을 잠시 즐기던 형진은, 더 했다가는 분을 참지 못해 거품을 물고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 되어서야 그녀를 땅에 내려놓고는 여신에게 배낭을 돌려주며 말했다.
“슬슬 몰이를 시작해야겠군요. 천천히 따라 오십시오.”
“몰이요?”
“네. 사실은 몰이라기보다는 안내가 맞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중간에 미궁의 구조가 바뀌어 버린 탓에 원래의 길만 염두에 두고 도망쳤다가는 길 잃어버리기 딱 좋다. 그래서 그들을 온전하게 내보내기 위해서는 적당히 몰이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더해 대미궁 안에 만들어진 파스파 왕국의 베이스 캠프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도 또 하나의 목적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형진에게 내몰린 파스파 왕국의 공략대들은 채 며칠이 지나기도 전에 기껏 만들어 놓은 베이스 캠프들을 모두 잃고 미궁 밖으로 완전히 내몰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파스파 왕국의 정부 수뇌들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대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했다고 축배를 올린지 고작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그동안 이루었던 성과를 모두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책에 부심하던 파스파 왕국의 정부 수뇌들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리고는 희망과 생명의 우편 서비스를 이용해 라야바르트 왕국에 급한 전갈을 보냈다. 그곳 왕궁에 머물고 있는 수호자들에게 대미궁의 악마를 퇴치하는 일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토너먼트 관람차 라야바르트 왕국의 수도 라야를 방문했다가 엉겁결에 국가의 중대한 역할을 맡게 된 귀족은 전갈을 받기가 무섭게 라야바르트의 왕궁을 찾아가 수호자와의 접견을 청했다.
하지만 수호자의 대장인 아디슈는 파스파 왕국의 귀족에게서 요청을 받기가 무섭게 이렇게 반문했다.
“파스파 왕국에서 대미궁을 돌파하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네? 그것은… 인간들을 위협하는 대미궁의 악마를 처단하기 위해서… 힉!”
귀족은 얼른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을 했지만, 순간 아디슈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에 직면하고는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 귀족만이 아니다. 귀족을 호위하기 위해 함께 왔던 기사들 역시 사방에서 몰아치는 강대한 기세에 억눌려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감히 너희가 신을 능멸하려는 것인가!”
“아, 아닙니다. 저희는 정말로…”
“너희들이 대미궁을 돌파하고자 하는 것은 엘 파르드를 침공하기 위한 통로를 개척하기 위한 일. 게다가 대미궁의 악마는 미궁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올 수 없다. 내 말이 틀린가!”
“힉!”
“감히 신의 추종자를 자신들의 전쟁에 장기말로 쓰고자 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파스파 왕국은 신을 능멸한 댓가를 받게 될 것이다!”
결국 귀족과 그 호위 기사들은 수호자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거지꼴로 쫓겨 날 수밖에 없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 왕궁에서 쫓겨나는 파스파 왕국의 귀족과 그 호위기사들을 바라보는 아디슈의 등 뒤에서 문득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형진이다.
“수고했어.”
아디슈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딱히 당신의 일에 협조하려던 것은 아니다. 다만 감히 신을 자신들의 사리사욕에 이용하려 드는 무도한 자들에게 분노했을 뿐.”
“그런가.”
아디슈의 대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따지고 보면 개인의 사리사욕에 신을 이용하기로는 자신보다 더 한 사람이 없을 텐데 라는 생각을 떠올리며.
“그런데 자넨 나이도 어린데 왜 나한테 자꾸 반말인가.”
“싫어?”
“그야 당연히…”
잘 해야 자식 뻘 밖에 안 되어 보이는 녀석이 자꾸 반말을 틱틱 하니 솔직히 기분이 좋지 못하다. 게다가 아디슈는 혹시라도 하마란과 그가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는 상황이기까지 하다.
그런 아디슈의 생각을 읽은 형진이 씩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나랑 하마란이 엮일 일은 없어.”
“어째서?”
“그 녀석 다른 사람과 연애중이거든.”
“헉. 그, 그게 누구지?”
“글쎄. 아직 본인은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좀 더 기다려 보도록 해. 괜히 옆에서 아는 척 해서 딸 혼사길 막지 말고.”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