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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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개벽
꼴깍.
하마란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힘의 형상을 보는 순간 점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키고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새로운 영주의 측근이라고 해도 움찔할 수밖에 없을 텐데, 혹시나 하고 떠올렸던 생각대로 진짜 수호자임이 밝혀지고서도 목숨 걸고 남자에게 꼬리칠 여자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귀스트는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하마란은 자신의 체구가 크다는 사실에 살짝 콤플렉스 비슷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상의 인식 자체가 그녀처럼 장신의 여성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보니 혹시 오귀스트도 그런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는 쪽이랄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질투의 기미를 보이는 하마란의 모습이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면 확실히 오귀스트도 콩깍지가 씌워지긴 한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강사의 소개가 끝나자,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인사법이었다.
“인사는 그 사람과 가장 처음 관계를 형성하는 시발점입니다. 다시 말해, 인사만 잘해도 접객은 반 이상 먹고 들어간다는 뜻이나 다름없지요. 자신감 있고, 친근함이 서린 목소리. 그리고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한 미소. 이 모든 것이 갖추어졌을 때, 손님은 여러분에게 신뢰를 가지게 됩니다. 먼저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있겠습니다. 조교, 앞으로.”
오귀스트의 말에, 귀여운 인상의 견습 사제 서너명이 앞으로 나섰다.
“바른 인사는 바른 자세로부터 시작됩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뒷꿈치를 모은 채 오른 손으로 왼 손을 감싸며 아랫배에 가볍게 대고…”
인사라는 게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점원들은 오귀스트의 설명과 견습 사제들의 시범을 보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시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들도 과거 성에서 시녀장들에게 기본적인 예절에 대해 배운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도식화된 예법은 들어본 적조차 없었다. 당연하다. 지금 배우고 있는 배꼽 인사 같은 것은 형진이 김밥 천국을 시작할 때 견습사제들에게 개인적으로 가르친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세계의 예법 자체가 아니니,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건 당연한 일.
견습 사제들의 시범이 끝나자, 점원들은 줄을 맞추어 늘어 선 채 인사법을 연습해야만 했다. 구령에 맞추어 자세를 갖추고 인사를 하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문득 지켜보고 있던 하마란이 작은 종을 흔들더니 이렇게 말한다.
“십분간 휴식입니다. 각자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시다가 십분 뒤에 다시 지금의 모습대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 수고하셨습니다.”
오귀스트와 견습 사제들이 인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움직이자, 점원들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벗어났다.
“화장실은 이쪽에 있습니다. 그리고, 마실 것이 필요하신 분은 이쪽에 준비되어 있으니 원하는 만큼 가져다 드시면 됩니다.”
“와, 감사합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인사 연습에 지친 기색을 보이던 소녀들은 사제들이 밀고 들어오는 손수레에 담긴 간식거리를 보며 환성을 질렀다.
막 구워서 따뜻한 수플레와 티라미수, 크림을 빵빵하게 채운 슈크림이 한쪽 수레에 가득 쌓여 있고, 또 한쪽에는 막 끓여서 향긋한 냄새가 풍겨 나오는 밀크티와 티세트들이 가득 담겨 있다. 정말 귀부인의 티타임에나 볼법한 호화로운 음식들인 셈이다.
“너무 많이 먹으면 있다가 점심 먹기가 힘들어지니까 살짝 허기만 채우도록 하세요.”
“네에!”
하마란이 흘깃 바라보며 그렇게 주의를 주었지만, 소녀들은 허겁지겁 간식들을 입에 베어 물고 행복한 미소를 짓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 음식들은 단순히 배를 채우라는 의미에서 내놓은 것이 아니다. 집중력을 높여 수업의 성과를 끌어올리기 위한 도핑용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행복한 휴식 시간이 끝나고 다시 수업이 시작되자, 점원들은 자신도 놀랄 정도로 수업 내용이 쏙쏙 머리에 들어와 박히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오늘 인사 수업은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모두 잘 해 주었습니다. 다만 인사는 접객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니 만큼, 앞으로는 매 시간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인사 연습을 먼저 한 차례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귀스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상에서 내려와 연회장 중앙에 자리잡은 구조물로 다가가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이 배우실 것은, 앞으로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관한 것입니다. 모두 이쪽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귀스트의 말에 따라 점원들은 몸을 돌려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기 보이는 이 신상은 바로 보호와 균형의 여신을 상징하는 성물입니다. 본래 이 신상은 좀 더 큰 규모로 만들어져 성소에 모셔지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만, 매장에는 이와 같이 작은 사이즈로 만들어져 카운터 한쪽에 모셔지게 됩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매장에 모셔지는 신상이야말로 진짜 일대 일 사이즈의 신상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여신을 직접 만나본 형진의 식구들 뿐이다.
“소문을 들으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성물로서 봉헌된 여신의 신상은 일정한 범위를 성역으로 선포할 수 있는 권능이 부여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그렇게 말하며 오귀스트가 살짝 신상을 향해 예를 취해 보이자, 문득 작은 이명 같은 것이 전해지며 성역이 발동된다.
점원들은 처음 보는 성역의 발동에 놀라 얼른 오귀스트를 따라 여신의 신상에 대고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인사가 끝나자 오귀스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성역 안에서는 여신이 허락한 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타인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설령 강도가 들더라도, 매장 안에서라면 그들이 여러분에게 해를 끼칠 방법은 전무하다는 뜻입니다.”
“와아…”
아직 매장이란 곳에서 뭘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신전에서 관여해서 그런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점원들이 그렇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오귀스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모르는 강도들이 혹시 매장에 침입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여러분이 직접 나서서 그들을 어찌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매장의 관리와 경비 책임을 맡은 점장이 그러한 일을 처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점장이요?”
“네, 소개하도록 하지요. 앞으로 여러분들을 지켜줄 점장님들입니다.”
오귀스트가 살짝 웃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손뼉을 치자, 문이 열리며 무언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점장이라길래 영락없이 콧수염 지긋하게 기른 중년의 아저씨거나 꼬장꼬장한 아줌마들을 생각했는데, 막상 그녀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전혀 의외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저건…”
“토끼?”
그렇다. 그것은 바로 어지간한 장정 몇은 가볍게 때려눕히는 맹수인 토끼들이었다. 게다가 그냥 토끼도 아니다. 말쑥한 턱시도를 갖춰입은 녀석부터 시작해서, 예쁜 리본을 목에 맨 작은 토끼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양도 색깔도 옷차림도 전부 각양각색이다.
직접 만나본 적은 없어도 얘기는 꽤 들었기 때문에 움찔하며 피하려는데, 다시 오귀스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앞서 말씀 드린 바대로, 바로 이들이 앞으로 매장의 관리와 경비를 맡을 점장들입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관리보다는 경비 쪽에 아무래도 업무가 치중되겠지만 말이죠.”
“토끼들이… 점장이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도 아닌 토끼가 점장이라니. 뭔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 시녀 중 하나가 되묻자, 오귀스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토끼지만 그냥 토끼들이 아닙니다.”
“그럼요?”
“이 토끼들은 본래 온순한 초식동물이었으나, 보호와 균형의 여신께서 힘을 내리셔서 지금처럼 맹수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는 보호와 균형께서 사람들에게 잊혀진 탓에 토끼들 역시 여신을 잊고 자유롭게 살고 있었습니다만, 최근 여신께서 힘을 되찾으시면서 이 토끼들도 여신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고 그 뜻을 받드는 존재로서 다시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여신의 사자인 것입니다.”
“아하…”
그냥 동물이라면 말도 안 된다 하겠지만, 여신의 사자라면 그럴 법 하다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점원들은 자신들이 들었던 맹수로서의 토끼와는 조금 다른, 어쩐지 다가가서 쓰담쓰담하고 싶은 귀여움을 지닌 이 작은 동물들의 모습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점장들에 대한 소개가 끝나자, 문득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소녀 하나가 손을 번쩍 들고는 오귀스트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매장이라고 하시는데, 정확히 저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건가요?”
오귀스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좋은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려던 참입니다.”
곧바로 그는 호주머니에서 주화 하나를 꺼냈다.
“이것이 무엇이지 아십니까?”
“주화잖아요. 가스트 주화.”
가스트 주화. 그것은 라야바르트를 비롯한 주변국들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통화의 이름이다. 이 돈은 과거 라야바르트 근처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가스트 제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가스트 주화라는 이름 또한 이런 이유에서 붙여진 것이다. 지름은 손가락 마디 반 정도이며, 주 재료는 주석이고 은과 같은 광택을 가지기 때문에 그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지구에서 주석은 희귀한 금속에 속하지만, 이곳에는 상당히 흔한 금속이며 이 때문에 가장 가치가 낮은 주화로서 통용되고 있다.
가스트 주화는 모두 같은 가치로 인정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주조 연대나 거기에 새겨진 문양이 모두 동일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이 세계에서 주석이라는 금속은 청동의 제작 외에는 그 효용 가치가 거의 없고 매장량 자체도 풍부하며 주조된 양도 압도적이기 때문에, 녹여서 다른 용도로 쓰기보다는 이렇게 계속해서 가장 낮은 가치의 통화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말씀하신 대로 이것은 가스트 주화입니다. 하지만, 또한 여러분이 일하게 될 매점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어째서일까요. 간단합니다. 이 매장에서 취급하게 될 물건들은 모두 이 가스트 주화 하나의 가치에 해당하는 품목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네?”
사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물자 부족 상황에서는 돈보다 현물의 가치가 더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가스트 주화 자체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이곳에서는 한 끼 식사를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치가 낮아진 상태라 해도, 엘 파르드를 벗어나게 되면 충분히 통화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엘 파르드의 주변국들이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대미궁을 돌파하려고 애쓰는 것에는 이런 식의 물가 차이에 따른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큰 이유일 수도 있었다. 형진이 식량을 통해 엘 파르드 전체를 삼키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일은 아니더라도, 단순히 대미궁을 통해 물자를 공급하고 시세차익을 얻는 것만으로도 엘 파르드가 보유한 자금을 엄청난 속도로 빨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 형진이 이 영지에 호구스런 퍼주기 정책을 도입하려는 생각을 드러내 보였을 때, 제랄딘이 반대한 가장 큰 이유는 엘 파르드의 상황이 단순히 구매력 부족 때문이 아님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통화량만 증가한다면, 결국 그 지역의 경제는 파탄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형진은 경제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인플레이션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물론 경제란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해서 그런 상식 수준의 지식만을 가지고 덤벼드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것 저것 생각하며 주춤거리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게다가 돈을 준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그것을 무작정 쓸 것 같은가. 대부분은 아껴뒀다가 나중에 정말 필요한 일에 쓰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생산력이 부족하면 다른 방법으로 채우면 그 뿐 아닌가.
애초에 이 영지에서 전부 다 하려는 것이 과욕이고, 그럴 생각조차 없다. 생산은 다른 곳에서 해도 된다. 애초에 이 영지는 돈이고 물자고 태부족이라 경제라는 개념을 대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지경이다.
그래서 그는 가장 먼저 이 영지에 도입할 사업으로 일명 가스트샵이라고 불리는 매장을 만들기로 했다.
이 매장에서 파는 것은 오귀스트의 말대로 가스트 주화 하나의 가치를 지닌 모든 것이다. 김밥과 같은 간단한 먹거리부터 시작해서, 세계 각지의 값싼 특산물을 주화 한 개 가치만큼의 포장으로 담아내어 판다. 작은 컵이나 스푼, 문구, 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주화 한 개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파는 곳인 셈이다.
이곳은 그냥 단순한 가게가 아니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돈 쓰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될 것이다. 또한 이것은 살인적으로 치솟아 버린 물가를 강제로 끌어내리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다.
이 매장이 들어서는 즉시, 형진은 영지 내에 공공사업을 크게 일으킬 예정이었다. 간단한 얘기다. 돈만 풀어서 문제가 된다면, 물건도 같이 풀면 된다. 어차피 이 영지는 본보기일 뿐. 본격적으로 경제를 논하는 것은 엘 파르드라는 하나의 국가를 완전히 손에 넣고, 붕괴되어 버린 산업 구조의 기틀을 바로 세우면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