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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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그곳에는 유령이 산다.
흠칫.
또다시 형진이 사악한 웃음을 흘리기 시작하자 여신은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여신씩이나 되어서 고작 인간에게 이런 식으로 겁을 먹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이럴 때의 형진을 보면 가급적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형진은 여신이나, 그녀의 옆에 늘어지게 누워있던 하엘이 저 변태 악마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떠올린 건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곧바로 결투장을 향해 내려갔다. 그러자 여신은 화들짝 놀라며 얼른 하엘의 등에 채워진 안장에 오른 뒤 급히 그를 따른다.
잠시 본능적으로 겁을 먹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서 형진은 어둠을 밝히는 등대나 다름없다. 누구 하나 따르는 이 없던 쓸쓸한 잊혀진 여신에서 지금만큼이라도 신도가 늘어난 것이 누구 덕분이던가. 원래부터도 의존증이 있던 그녀임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어미 오리를 따르는 아기 오리 같은 반응을 보이는 건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형진은 그렇게 결투장에 내려가더니 곧바로 집행자의 단검을 빼들었다.
“설마… 다 죽이려고요?”
“아뇨.”
솔직히 말해 그것이 지금 가능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정확히는 지금 석상처럼 굳어 있는 저 유저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건지부터 확인을 해 봐야 한다.
형진은 곧바로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유저에게로 다가섰다. 아마도 대검 전사인 모양인지 커다란 대검을 들고 무언가를 크게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형진은 잠시 그가 걸치고 있는 장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씨익 웃음을 지었다. 그가 걸치고 있는 장비의 약점을 찾아낸 것이다.
단검으로 장비를 콕 찌르자, 유저가 걸치고 있던 제법 그럴 듯한 외형의 판금 갑옷이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여신님.”
“네?”
“이 가루들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가루요? 아, 알았어요.”
아이템을 집으라는 것도 아니고, 바닥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치우라는 말에 여신은 살짝 당황했지만 이내 하엘을 타고 어딘가를 다녀 오더니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유저 주위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싹싹 쓸어 담기 시작한다.
형진은 그 모습에 피식 웃고는 다시 유저가 들고 있는 아이템을 하나 하나 파괴하여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다.
“…”
여신은 차마 남자의 벗은 몸을 직시하기가 어려웠는지 고개를 들지 않으려 애쓰며 부지런히 부스러기를 자루에 쓸어 담고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형진은 유저들을 돌며 그렇게 모두를 벌거숭이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결투장 안은 기본적으로 사망으로 인한 겅험치 하락 같은 패널티로부터 안전한 장소다. 굳이 이벤트를 이곳으로 연 것도 설정을 조금만 고치면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보스전 같은 것을 안전하게 치룰 수 있기 때문.
그래서 사실 이곳의 유저들을 죽이는 건 별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육체를 죽이더라도 실제로 그들이 입는 피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반드시 그럴 생각이 있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유저들의 몸을 하나 하나 전부 결투장 밖으로 끌어내어 그곳에서 죽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꼭 죽여야겠다 싶은 놈이 있으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은 이상은 너무나 비효율적인 방법이다. 무엇보다도, 점검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 유저들을 전부 들어서 옮기고 있나.
하지만 그들이 걸치고 있는 아이템이라면 어떨까.
본래는 결투장 안에서 적용되는 사망 패널티 무효 외에 아이템 완전 파괴 불가 기능까지 적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역이 동결 상태로 들어갔고 당연히 이벤트 상황도 사라졌으며, 그로 인한 추가 효과도 함께 상실된 상태. 원래는 파괴되지 않는 아이템이 파괴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사실 사망으로 인한 경험치나 숙련도 감소 같은 것은 속이 좀 쓰리긴 해도 시간을 들이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공들여 하나씩 맞춰놓은 아이템이 파괴되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유저로서는 정말 마음속에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번뇌와 상념을 굳은 신념과 수도로서 가라앉히며 지워버리거나, 지우는 김에 집에 들어놓은 접속기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수밖에 없다. 운영자에 의해 복구가 되지 않는다면.
하지만 복구라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도 아니다.
유저는 최소 며칠에서 몇주는 피 말리는 시간을 보내야 하며, 운영진은 쏟아지는 업무량에 치여 피가 마르다 못해 타들어가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렇다.
지금 형진이 하고 있는 행동은, 유저든 운영자든 그것을 직면하는 순간 자신들이 종교를 믿건 그렇지 않건 간에 일단 신을 저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런 극악한 행동인 것이다.
“룰룰루…”
처음에는 좀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아주 신속 정확하게 유저들이 걸치고 있는 아이템을 속옷 하나 남기지 않고 부수는데 재미를 붙여 버렸다. 추가로 여신은 땀까지 뻘뻘 흘러가며 그렇게 부서진 아이템의 부스러기를 청소하느라 여념이 없고.
게임 속이라 그런지 남자고 여자고 간에 아주 몸매들이 쭉쭉빵빵이다. 물론 개중에 변태적인 취향을 가지고 있거나, 남들과 똑같은 성형 미인은 싫다거나, 다 예쁜 와중에 혼자 못난이면 그만큼 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관심병 환자들 같은 경우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아주 눈요기는 기가 막히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신이 땀을 뻘뻘 흘리며 헉헉거릴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형진의 손이 멈추었다.
“음…”
하지만 이 변태스런 남자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다.
“아무래도 뭔가 부족해.”
잠시 그렇게 중얼거리던 형진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
이제야 끝났나 하고 숨을 돌리고 있던 여신은 형진이 하는 짓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그가 새로 시작한 것은 바로 마네킹 놀이였다.
알몸이 된 채 굳어있는 유저의 몸을 움직여 인위적으로 자세를 만들거나 하는 식의 놀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어서 변태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단지, 뒤돌아 떠올렸을 때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갖가지 포즈를 만들어 내고 있을 뿐. 망상필드가 펼쳐졌을 때의 요정들이나 취할 법한 그런 느낌의, 어쩐지 흑역사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듯한 그런 느낌의 포즈들이다.
“음, 아주 좋아. 하하하.”
그렇게 모든 인원들의 자세를 교정해 준 형진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그제서야 다시 본래 자신이 있던 관람석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뒤를 따라 다니며 고생한 여신의 배고픔 게이지를 다시 채워주는 일을 시작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여신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주 힘들었을 겁니다.”
“아하하하하…”
여신은 그렇게 대답하며 어른 주먹만 한, 안에 싱싱한 딸기 과육이 통째로 들어간 크림 소보로를 베어 물면서 흘깃 아래쪽 결투장에 자리 잡은 사람들을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아… 왜 하필 오늘 이 시간에 여길 와서 저런 꼴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여신은 입 안에 크림 소보로를 가득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으며 저 아래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어쩐지 성의가 좀 없어 보이는 기도지만, 적어도 분위기만은 엄숙하다. 그것이 천상의 맛을 지닌 크림 소보로를 먹느라 그런 것인지, 정말로 불쌍한 영혼들의 명복을 기원하느라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렇게 아래쪽에 펼쳐진 때아닌 흑역사 누드쇼를 관람하며 티타임을 즐기다가 적당히 여신의 배고픔 게이지가 다시 만복 상태가 될 즈음, 잿빛으로 물들었던 세상이 다시 본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일단 세상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그와 동시에 유저들의 몸이 일종의 막에 감싸이며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형진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의 몸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앞서 나타났던 막에 의해 보호 상태로 전환된 것 뿐이라는 사실을. 본래 정상적인 로그아웃 과정이 선행되었다면 저런 보호 상태가 먼저 실행되었어야 한다.
버그를 찾아내려고 난리를 치다보니 미처 운영진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긴 하지만, 형진에게는 오히려 더 잘 된 일이다. 원인 불명의 일이 있었는데, 그 전에 운영자의 실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 알 수 없는 원인이 운영자의 실수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어쩐지 하늘까지 형진을 돕는 듯한 느낌이다.
“좋아. 좋아.”
의도한 일은 아니었지만, 운영자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까지 확인한 형진은 흡족한 모습으로 웃으며 손에 묻은 크림을 쪽쪽 빨아먹고는 자리를 정리한 뒤 그대로 은신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자, 드디어 유저들이 하나둘씩 로그인을 시작했다.
“어?”
“응?”
로그인이 가능해지기가 무섭게 부랴부랴 접속한 유저들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뭔가 허전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허전함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아래쪽으로 향한 그들은 벌건 대낮에 자랑스럽게 몸매를 드러낸 채 괴상한 포즈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
“…”
사람이 너무 놀라면 잠시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서 고객 센터며 유저 커뮤니티 같은 곳에 잔뜩 화풀이를 하고 조금은 개운한 기분으로 어떤 보상이 나왔을까 기대하며 접속했는데, 느닷없이 누드 패치를 한 것 같은 꼴로 이상한 포즈를 한 채 서있는 자신의 캐릭터를 발견했다. 과연 그들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이 무엇일까.
몇몇은 버그 때문에 누드패치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주위의 모습을 동영상과 스샷으로 담았다.
또 몇몇은 혹시 다른 치명적인 버그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는 얼른 상태창을 열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이 벗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주 일반적인, 게임보다는 상식적인 사고를 우선하는 사람들 몇몇은 자신의 상태를 깨닫기가 무섭게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런다고 보일 것이 안 보이겠는가 싶긴 해도, 최대한 몸을 가리고자 하는 반사적인 본능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GM 라야입니다. 먼저 이번 일로 인해 유저 여러분께…]딱 봐도 이름부터가 GM 그리칸의 상급자라는 느낌을 풍기는 운영자 하나가 막 접속한 이들에게 공지를 보내다가 그대로 말을 멈추었다. 유저들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결투장을 바라보다가 허여멀건 궁둥이를 드러낸 채 이상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수십명의 유저들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어? 어어?]너무 놀라면 사람은 잠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건 운영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GM 라야가 그렇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안, 뒤늦게 로그인이 가능해진 것을 알고 결투장에 있던 유저들 모두가 빠르게 접속을 개시했다.
“…”
“…”
그리고 그들 역시 로그인이 되기가 무섭게 주위에 나타난 살색의 풍경에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어, 어어어어…”
처음에는 당황이었다. 그리고 경악이 스쳐 지나간 다음, 패닉이 일어났다.
인벤토리에 보조 장비라도 갖추고 있는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은 잠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다가 그대로 마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거래소든 창고든 아니면 하다 못해 마을 상점이든 간에 일단 몸을 가릴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였다.
“원래… 속옷 못 벗는 거 아니었어?”
“이 게임 계속하다보면… 언젠가 성인용 컨텐츠도 뜨겠지?”
“결정했다. 나, 이 게임에 뼈를 묻으련다.”
개중에 몇몇은 그런 기이한 열망과 기대를 품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뛰어가다 말고 뒤늦게서야 로그아웃을 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로그아웃 하면 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다가 앞서가는 누군가가 로그아웃을 하자 그제서야 따라하기 시작한 것이다.
“끅끅… 끅끅끅끅…”
여신은 배를 잡고 끙끙거리며 힘들게 웃음을 참고 있는 형진의 모습에 한숨을 포옥 내쉬다가 콧잔등에 크림이 묻어있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얼른 그것을 손가락으로 닦았다. 그리고 크림이 묻은 손가락을 닦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형진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한 것을 살피고는 얼른 그것을 핥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