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
31====================
6. 역마차
“끙…”
무겁긴 더럽게 무겁네. 뭘 먹었길래 이렇게 무겁나 몰라. 몸집이 그렇게 크지도 않은데 이렇게 무거운 걸 보면 완전 통뼈인 듯.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들어가 다소곳하게 내려놓는다. 이건 호구라기보다는 차라리 머슴 본능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아줌마들이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알아본 듯 싶다.
“후… 어디 보자.”
아무래도 죄수 놈이 방귀를 뀌는 바람에 차창을 열어놓고 갔던게 문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가뜩이나 날씨도 쌀쌀한데 비 들이치는 창가에서 쌩쌩 부는 바람 맞아가면서 한 나절 동안 마차를 타고 움직였으니 탈이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도면 자리를 바꿔달라든가, 하다못해 차창이라도 좀 닫을 일이지. 약은 척은 혼자 다 하더만 완전히 미련곰탱이가 따로 없다. 도대체 뭘 믿고 혼자 세상에 나온 건지 원. 이러니 호구신의 사제라는 말을 듣지.
어쨌든 일단 눕혀 놓기는 했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화로부터 들여놔야겠군.”
형진 혼자라면 따로 화로 같은 거 안 들여놓고도 그냥 시트나 이불 대용의 가죽 뭉치만 대충 덮고 자면 되는 일이지만, 이 여자는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니 좀 더 난방에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젠장, 이게 다 돈인데.”
결국 형진은 따로 비용을 더 지불하고 화로를 방 안에 들여놓았다. 화로를 가지고 온 여관 주인이 여자를 힐끔 거리며 뭔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씩 웃는다. 확 눈알을 지져 버릴라.
“따뜻한 음식 뭐 없습니까?”
“음… 스튜 정도 밖에는. 필요하시면 스프 정도는 지금이라도 끓여드릴 수 있습니다만.”
“그거 좋군요. 나 먹을 저녁 식사랑 스프랑 같이 해서 좀 가져다주시죠.”
“알겠습니다.”
주인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민다. 당연히 선불이란 얘기다.
“쳇.”
“하하, 그럼 바로 올려 보내 드리겠습니다.”
주인이 나가자, 형진은 침대에 누워서 여전히 쿨럭 거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일단 다른 건 대충 끝났으니 이제는 옷을 벗길 차례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체온 어쩌구 하는 건 둘째 치고, 딱히 갈아입을 것도 없는 판에 저거 그대로 입고 자면 내일 아침에 냄새가 아주 쩔어 줄 수밖에 없다. 더구나 이 여자가 입고 있는 것은 무려 가죽갑옷. 그냥 옷도 안 말리고 그대로 놔두면 냄새가 미치는 판에 무두질이나 제대로 된 건지 의심스러운 가죽갑옷이라면 그건 뭐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여자라고 냄새 안 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서 그 냄새 다 맡아줘야 하는 형진 입장에서는 매우 곤란한 일이다.
“이거… 어떻게 벗기는 거야?”
앞쪽에 매듭 몇 개가 있는 게 보여서 일단 그거부터 풀어보려고 낑낑 대는데, 하필 그때 여자가 눈을 뜬다. 끙끙거리며 정신없이 앓고 있는 와중에도 누군가 자신의 옷을 벗기려고 하자 그래도 여자라고 본능적으로 깨어난 것이다.
“…”
잠시 멍하니 자신의 가슴 어림을 바라보며 끙끙대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여자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것이 정조의 위기임을 깨닫고는 팔을 휘둘렀다. 갑옷을 벗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형진은 난데없이 날아든 주먹질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으앗! 깜짝이야. 무슨 짓입니까?”
“그, 그쪽이야 말로… 쿨룩! 이게 무슨 짓이에요? 쿨룩! 쿨룩!”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몸을 움츠린 채 그렇게 묻는 여자의 모습에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나 원. 다 죽어가는 걸 데려다 놨더니 이젠 주먹질이네. 아무튼 어떻게 벗기는 건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던 참인데 잘 됐네요. 그거부터 일단 벗으시죠. 가뜩이나 눅눅한 침대 완전히 다 적셔 버릴 생각 아니면.”
“…”
그제서야 여자는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이 자리를 잡았던 곳은 싸늘한 냉기가 가득한 마굿간이었는데, 이곳은 제대로 된 여관방이다. 게다가 침대 옆에는 한창 따뜻하게 타오르는 화로도 놓여져 있다.
“쿨룩! 쿨룩!”
다시 한 번 기침이 터져 나오면서 순간 머리에 핑 하고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아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이 먼저 떠오르고, 자칫 하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겁이 덜컥 난다.
“나도 빨리 씻고 자야 하니까, 좀 빨리빨리 끝냅시다. 안 벗으면 확 다 찢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버, 벗을게요. 벗으면 되잖아요.”
형진이 으름장을 놓자 여자는 등을 돌린 채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을 벗기 시작한다. 그런데 하필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식사 나왔습니다아!”
“놓고 가요.”
“네에.”
여급이 입구 근처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다가 등을 돌린 채로 옷을 벗으려다 말고 눈치를 보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는 역시나 씨익 웃음을 지으며 밖으로 나간다. 모르긴 해도 내일 아침 일어났을 때 어떤 얘기가 퍼져 있을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 벗으면 이거 먹고.”
“…”
여자는 형진이 내민 스프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쿨룩거리며 물었다.
“저…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니까 다행이네요. 지금도 확 스프를 얼굴에 끼얹어 버리고 싶은 걸 참는 중이니까 빨랑 옷이나 벗으라고.”
“…”
그러자 여자는 주룩주룩 눈물을 흘리며 옷을 벗기 시작한다. 소리도 안내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리는 모양새가 이대로 꼼짝없이 잡아먹히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 원. 저러니까 호구신의 사제라는 소리를 듣지.”
혀를 차며 형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여자의 움직임이 순간 우뚝 멈춘다.
“어, 어떻게 알았어요?”
“뭐가요? 희망과 생명의 사제인거?”
“…”
“좀 숨기려면 제대로나 숨기던가. 아, 진짜. 빨랑 옷부터 벗으라니까!”
“네, 넷!”
여자는 후다닥 갑옷과 기타 옷가지들을 벗어 놓았고 형진은 그것을 받아 화로의 열기로 말릴 수 있도록 의자와 탁자 같은 것을 이용해 널어놓았다.
이 여자, 벗으란다고 속옷까지 다 벗어 놨네.
형진은 투덜거리며 망토를 벗어 걸고는 역시나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어서 말리기 시작했다. 물론 여자처럼 다 벗진 않고 홑옷에 바지 정도는 걸친 상태로. 속까지 다 젖은 건 아니니 어떻게 대충 버텨보는 수밖에.
“내일 또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그거 먹고 빨리 자요.”
“…”
여자는 형진의 눈치를 살피면서 스프를 후룩후룩 마시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는 어제부터 꼬박 굶었다. 마차 삯을 내는데 돈을 다 써버려서 식비는커녕 따로 먹을거리를 살 돈조차 남기지 못한 것이다.
금식 기도 때를 생각하고 사흘만 어떻게 버티면 될 거라고 가볍게 여겼던 것이 화근이다.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드리면 되는 상황과 아무리 마차 안이라 해도 들이치는 비바람을 맞으며 가는 상황은 애초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빵 먹을래요?”
“…”
여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형진은 자기 몫의 빵을 반 나누어 주었다. 스프는 그나마 조금 자제하는 것 같더만 일단 빵이 입에 들어가자 참지 못하겠는지 허겁지겁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천천히 먹어요. 안 빼앗을 테니까. 여기 물도 좀 들고.”
“감사… 합니다.”
근데 이 빵, 인간적으로 너무 맛없다. 거의 무슨 스티로폼을 우걱우걱 씹어 삼키는 느낌이라 스튜에 찍어서 대충 먹어볼래도 도저히 안 넘어간다.
결국 형진은 남은 빵을 전부 그녀에게 넘기고 자신은 인벤토리에서 다시 샌드위치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햄 샌드위치’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쳇. 피 같은 도핑용 요리들인데. 그리칸에 도착하면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요리부터 올리든가 해야 할 것 같다. 최소한 그렇게 하면 이렇게 도핑할 때마다 옆집 아줌마 생각이 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사제면 질병 치료 같은 능력 없어요?”
“네… 전 아직 견습 사제라.”
“흐음.”
“그런데… 진짜 어떻게 아셨어요?”
“비밀입니다.”
“…”
어쨌든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나자 형진은 식기를 쟁반에 담아 출구 쪽에 가져다 놓고는 다시 말했다.
“비켜 봐요.”
“네?”
“나도 자야하니까 안쪽으로 좀 들어가라고요.”
“…”
여자는 이제야 올게 왔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기침을 했다. 혹시 기침을 하면 옮을까 싶어서라도 앞으로 일어날 사태를 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거 참 연기 한 번 더럽게 못하네. 아, 얼른 안으로 들어가라니까!”
“네, 넷!”
결국 여자는 본전도 못 찾고 구석으로 밀려났고, 형진은 당당하게 화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위치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신사라면 여자만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서 잔다든가, 아니면 하다못해 화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자리라도 양보한다든가 할 것이다. 거기서 좀 더 신사로운 인간이라면 아파서 콜록거리든 말든 체온을 높여 준답시고 피부마찰을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형진은 당당하게 따뜻한 자리를 차지한 다음 바로 불을 꺼버렸다. 아파서 콜록거리는 여자를 덮칠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괜히 착한 척 하며 좋은 자리를 양보할 생각도 형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먹여주고 재워줬으면 됐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다 챙겨줘야 할까.
여자는 형진을 등진 채 몸을 웅크리며 최대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려 했지만, 대뜸 형진의 호통을 들어야만 했다.
“똑바로 안 누워요? 가뜩이나 좁아 죽겠구만.”
“죄, 죄송합니다. 콜록! 콜록!”
울며 겨자 먹기로 바로 누운 여자는 곧바로 u쳐 올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게 어찌된 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반응이 없다. 아니, 조금 더 지나자 코를 골며 자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
이런 걸 뭐라고 해야 하나. 황망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는 것도 들켰고,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은 채 홀딱 벗기까지 했는데, 정작 옆에 누운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으니 오만가지 상상을 다해가며 떨고 있던 그녀로서는 황당할 수밖에.
결국 그녀는 그날 밤 잠을 설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에 뭔가 이상한 느낌에 깨고 보니, 여자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잠이 들어 있었다. 딱히 어제 뭔가 했던 기억도 없는지라 이상하게 여기던 형진은 아무래도 날이 쌀쌀해지자 본능적으로 따뜻한 자신의 품으로 들어와 안긴 것이 아닐까 하는 판단을 내렸다.
거참. 나 잡아 잡수 하는 것도 아니고. 어제는 그렇게 발발 떨고 생난리를 치더만 이건 또 뭔지.
뭐… 그래도 숨소리가 안정적으로 바뀐 걸 보니 따뜻한 음식과 형진의 체온이 아주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형진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가슴팍에 기대어진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떠밀며 말했다.
“아침입니다. 일어나시죠.”
“우웅… 조금만 더…”
뭐래는 거야, 이 여자가.
“일어나라고요. 아침이니까.”
“웅?”
여자는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형진의 맨가슴에 얼굴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음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렇게 일어나자 시트가 벗겨지며 그녀의 벗은 몸이 그대로 드러난다.
“꺅! 보, 보지 말아요.”
“뭐 별로 볼 것도 없구만.”
“…”
그 와중에 침까지 흘리고 주무셨는지 가슴팍이 축축하다. 아니, 이건 눈물인가. 어느 쪽이 되었든 민폐인건 마찬가지다.
형진은 침대에서 일어나 화로 근처에 말려둔 옷의 상태를 살폈다. 아직 좀 눅눅한 기운이 남아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못 입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아침 먹을 거요?”
“아, 아침이요?”
급히 시트로 몸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어제 저녁에 먹었던 음식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꿀꺽 삼켰다.
“주신… 다면야…”
죽어도 싫다는 소리는 않는다.
“그럼 얼른 옷부터 입어요.”
형진은 그녀의 옷을 대충 집어 침대 쪽으로 던져 주고는 자신 역시 옷을 입으며 다시 말했다.
“아, 참고로 빚은 확실하게 받아낼 테니 걱정 마시고.”
“네?”
“생명은 무엇보다도 존귀한 것. 설마 희망과 생명의 사제께서 목숨 빚을 간단하게 잊지는 않으시겠죠?”
“…”
“제 수고료까지 톡톡히 쳐서 받을 테니 각오하시고. 참고로 전 몸값이 꽤 비쌉니다.”
말문이 막혀서 대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여자를 보며 형진은 씩 웃었다. 모처럼 희망과 생명의 사제라는 쓸만한 호구 노예를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써먹는 게 좋을까 하는 궁리를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