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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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눈덩이
면접이 끝나기가 무섭게, 형진은 우선 스케치북을 가지고 나와서 해변을 배경으로 꽃과 바람의 모습을 스케치하는 일을 시작했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하고 기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준비를 마치고 나왔던 카트린은, 형진이 엘리시온에 갈 생각은 않고 해변에서 그림 그리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신님. 오빠 뭐하는 거에요?”
“카트린. 실은…”
보호와 균형은 아까 식사 시간에 소개를 했던 꽃과 바람이 형진에게서 면접을 받고 계약을 마친 뒤, 지금 그림의 모델이 되어 있는 것을 소상히 카트린에게 설명했다.
“노래요?”
“네. 아무래도 저랑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릴 모양이에요.”
“아하. 그럼 혹시 인어공주에 나오는 그런 노래도 부르고 그러는 건가요?”
“네?”
카트린의 말에 여신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래라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던 그녀는 어제 보았던 인어공주에 나왔던 노래를 이제야 떠올렸던 것이다.
인어공주는 영화 가운데서도 실제 인물의 모습이 등장하지 않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게다가 보통 애니메이션도 아니고 뮤지컬 느낌이 가미된 스타일. 그런 영화에서는 영상미 또한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우들의 연기와 음악, 노래 등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보호와 균형은 물론이고 카트린도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큰 감동을 줄 수 있는지는 이미 너무나도 확실하게 체감한 상태. 도대체 형진이 어떤 식으로 꽃과 바람을 띄우려고 그러는 건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던 여신은 그제서야 뭔가 확 하고 이미지가 들어와 박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와아, 부럽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은데. 헤헤.”
“카트린도 노래를 잘 하니까 나중에 오빠한테 말해봐요.”
“에이, 여신님도 참. 말도 안 돼요. 제가 무슨.”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형진은 신들린 듯한 솜씨로 스케치북에 꽃과 바람의 모습을 몇 장이나 그리고는 뒤늦게서야 시간을 살폈다.
“이크. 벌써 시간이. 일단 지금은 이 정도로 하고 나중에 이어서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하셨어요.”
꽃과 바람이 지시를 받은 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바다를 즐기라는 것 정도. 구체적인 지시가 없어서 막막하긴 했지만, 이내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들이 몰려오자 그런 막막함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바람. 그녀에게 있어 바람이란 또다른 자신이나 마찬가지였다.
형진의 스케치북에는 그렇게 바람과 어우러져 춤을 추는 여신의 모습이 몇 장이나 담겨져 있었다. 이전에 유아와 제랄딘의 모습을 포스터로 그려 홍보에 썼던 것처럼, 이번에는 지금 그려진 스케치들을 바탕으로 포스터와 신상을 만들 생각이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가볼까요.”
“네!”
어제 카트린과 여신이 하도 영화에 대한 것을 즐겁게 얘기를 한 터라, 오늘은 식구들 모두가 함께 영화를 관람하기로 했다. 한창 일에 바빠서 엘리시온에는 발길을 들이지 못하고 있던 제랄딘은 물론이고, 꽃과 바람의 조난을 발견하는 공을 세운 몽마들까지 함께.
“흑흑… 드디어 이런 날이…”
“여신님 고마어요오…”
그렇게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마유나와 라트나의 모습을 흘깃 본 형진은 림과 람을 따로 불러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요며칠, 우리들이 어딘가를 다녀오는 건 알고 있을 거다.”
-네.
-들었어요. 일단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허세와 망상의 신도라 할 수 있는 요정들이기에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까 싶어 함구를 해왔지만, 카트린과 여신에 의해 영화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더 이상은 비밀로 놔둘 수도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아직 요정들 모두에게 허세와 망상이 만들어낸 거짓된 천국에 대한 것을 밝히는 것은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들을 간접적으로나마 통솔하는 입장인 림과 람에게는 언질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요정들도 이 일에 동참시키고 싶지만, 문제는 바로 신들이다. 내가 여러 신들의 일을 함께 살피고 있는 것은 다들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요정왕님은 우리들의 자랑입니다!
그 와중에도 아부를 서슴지 않는 람의 모습에 형진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
“요정들을 데리고 갈 수 없는 것도 그래서다.”
-아… 그런…
-그렇군요.
구체적으로 언급이 되지는 않았지만, 림과 람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에 허세와 망상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음을 이해했다.
“요정들을 못 믿는 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나의 백성이니까. 하지만 신들이 관련되어 있는 일은 그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저, 스승님.
“응?”
-그럼 저희들은 그 영화라는 걸 볼 수 없는 건가요?
“…”
그렇다. 사실 요정들이 허세와 망상의 신도라고는 해도 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그럴 수준의 광신도인 건 아니다. 뭐라고 해야 할지. 그저 코드가 맞는 것뿐이라고 해야 하나. 요정들의 중2병 기질이 허세와 망상의 기질과 맞아 들어간 것뿐이라고 하면 그게 전부일 수도 있었다.
때문에 요정들에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복잡하고 난해한 신들의 관계 같은 것보다는 카트린과 여신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감탄을 연발하고 있는 영화쪽이다. 림의 질문은 그런 그들의 의사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일전에 요정들을 모아놓고 허세와 망상의 교단을 확대하지 않는 것에 대해 형진을 질타하던 람마저 이 모양이면 다른 요정들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기야 요정들에게 뭘 바라겠나 싶긴 하다만.
형진은 어쩐지 좀 허탈한 기분마저 느끼며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준비 중이다. 조만간 회합장에 영화관을 만들 예정이니까 그곳을 이용하면 된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역시 스승님이 최고!
-요정왕 만세! 만세!
뭔가 좀 얼렁뚱땅이긴 하지만 내부적으로 중대한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요정들의 일을 그렇게 해결한 형진은 기다리고 있는 모두를 데리고 대미궁의 접속 대기실에 도착한 뒤 곧바로 엘리시온으로의 접속을 실행했다.
“카트린. 오늘은 네가 대장이야. 모두를 데리고 잘 다녀오도록 해.”
“오빠는 안 가요?”
“난 할 일이 있어서.”
그러자 보호와 균형이 얼른 형진에게 따라 붙는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네? 여신님은 그냥 다 같이 영화를 보시는 것이…”
“아니에요. 전 어제 이미 봤기 때문에 괜찮아요.”
안 된다고 해도 억지로 따라붙을 기세라 형진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꽃과 바람 역시 머뭇거리며 형진에게 다가선다.
“저기… 저도…”
하지만 이번에는 형진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신님은 안 됩니다.”
“네? 하지만…”
보호와 균형에게 듣기로는 교단을 다시 일으키는 보수로 자신 역시 일을 해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꽃과 바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모두 함께 보게 될 영화는 여신님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종의 예시이기도 합니다. 제가 백날 말로 설명해 봐야 한 번 보는 것과 같을 수는 없는 일. 적어도 오늘 오전에는 모두와 함께 영화를 보도록 하십시오. 정 마음이 쓰인다면 두 분이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제 일을 도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러면 되겠다. 진님 말대로 해.”
보호와 균형까지 그렇게 형진을 두둔하고 나서자, 꽃과 바람은 둘의 기세에 밀려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저희는 먼저.”
“수고하세요.”
“다녀오세요!”
형진과 여신이 먼저 길드 하우스를 나서자, 다른 이들은 기대에 가득 찬 모습으로 영화관을 향해 우르르 몰려가기 시작한다.
딱 봐도 귀부인의 느낌이 나는 제랄딘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완연하게 호구신의 신녀 역할이 몸에 배인 유아, 그리고 지난 거점전에서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하마란까지.
여기에 덩치만으로도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할, 신사의 이미지와 기사의 근엄함을 모두 갖춘 오귀스트, 그리고 누가 봐도 절로 감탄이 나올 만큼 귀여운 느낌의 남매인 크루그와 카트린까지 더해지니,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저 사람들… 길드성의 그 사람들 아닌가?”
“맞아. 그런데 거점전 때는 없었던 사람들도 있는데.”
“그러네. 역시 그때 나왔던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엘리시온에 처음 들어와 보는 제랄딘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회합장을 좀 더 확장시킨 정도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사실상 새로운 세상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거짓된 천국이라… 과연 신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문득 제랄딘은 의문이 생겼다. 이 정도로 거대하고 세밀한 느낌의 세계를 만들어 내려면 그만큼 많은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가 알기로 허세와 망상은 신도가 남아있다고는 해도 요정들 정도가 고작인데, 추종자도 없이 그 정도 신도만 가지고 이런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하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닌가.”
하지만 이런 정도의 추측이라면 당연히 형진도 떠올렸으리라는 생각에 제랄딘은 이내 그런 의문을 머리속에서 지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형진이 본래 거짓된 천국이라 일컬어지는 이 엘리시온이 게임이라는 형태의 미디어로 존재하던 세상에서 왔기 때문에, 그 존재 자체에 대해서 딱히 의문을 품지 않은 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상태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극장으로 향하던 그들은 문득 극장 앞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과 마주쳤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쭈뼛거리며 다가서는 그 인물은 다름 아닌 수빈이었다. 어제 길드원들에게 공언했던 대로, 길마의 자격을 넘겨주고 이렇게 그들을 만나기 위해 극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반드시 극장에 다시 올 거라는 식의 확신은 없었다. 그냥 여기서 기다리면 그들 중 몇이라도 우연히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기대가 전부였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길드성을 찾아가서 자신을 받아달라고 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입구를 지키고 있는 소환수 토끼들이 무섭기도 했고.
“아… 그때 그분이시네요. 안녕하세요.”
카트린이 대번에 알아보고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수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못 알아보고 무시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이 귀여운 소녀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첫 번째 관문은 무사히 넘어간 것이다.
“안녕하세요.”
“영화 보러 오신 거에요?”
“네? 네. 뭐… 일단은.”
“그럼 같이 가요. 저희들도 영화 보러 왔거든요.”
“그래요?”
수빈은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일행들의 모습을 살폈다. 그리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인원들이 여럿 있는 것을 보고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이들이 타나토노트10 길드의 길원들임을 바로 눈치 챘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스푼’이라는 캐릭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좀 과도할 정도의 예의. 부동자세로 선 채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에 가스트샵의 교관으로 활동중인 오귀스트와 하마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열의가 넘치긴 해도 인사에 담긴 진심은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그렇게 격식을 차리실 것 없어요. 카트린이랑 아는 사이라면 저희들과도 남이 아니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역시나 호구신의 신녀다운 자애로운 모습으로 유아가 나서는가 싶더니, 곧이어 제랄딘이 한 마디를 건넨다.
“제가 보기엔 단순히 영화를 함께 보려고 기다린 건 아니신 듯한데, 따로 기다린 이유가 있으신지요?”
유아와 제랄딘이 그렇게 어르고 달래는 식으로 연타를 날리자 수빈은 역시나 만만치 않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자신이 그들을 기다린 목적을 털어놓았다.
“그때… 진이라는 분이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밑으로 들어가면 보호해 주시겠다고.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비록 전에 있던 길드에서 나와 홀몸이긴 합니다만, 이런 저라도 받아주실 수 있는지 묻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