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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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대격변
“응?”
형진이 식구들을 데리고 접속 대기실로 간 이후, 수빈과 함께 새로 얻은 권능을 시험해 보느라 정신이 없던 승희는 문득 주위의 풍경에 노이즈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왜?”
수빈의 말에 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주위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잘못 봤나.”
“뭔데?”
“주위 풍경에 노이즈 같은 것이 보여서.”
“그래?”
승희의 말에 수빈은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다. 승희 역시 다시 주위를 돌아보다가 역시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다시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시험해 보는 일을 계속했다.
“진짜 신기해. 처음에는 그냥 아무 느낌 없는 것 같았는데, 사용하면 몸도 마음도 편안해져. 피로도 싹 날아가는 거 같고.”
물론 현실에 돌아가서 확인해 보지 않는 이상, 이곳에서의 느낌 같은 건 사실 의미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다행이네. 하지만 역시 좀 더 기다렸다가 유아라는 분에게 회복 좀 받고 가.”
“응. 알았어.”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득 시야 한켠에 위치하고 있던 팬클럽 아이콘이 깜박거리기 시작한다.
[여보세요?]아이콘을 누르고 전화를 받는 느낌으로 그렇게 말을 걸자, 보호와 균형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승희님?] [여신님이세요?] [네. 아까 말씀을 드려야 했는데 깜박 잊은 게 있어서요.] [무슨…]이제 와서 권능 한 번 쓸 때마다 수명이 하루씩 줄어든다거나 하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건가 싶어서 승희는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신의 말은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제 추종자는 문양 안에 한 마리의 토끼를 담아둘 수 있어요. 정원에 보시면 여러 가지 토끼들이 있으니까, 그 중에서 마음에 드는 아이로 한 마리 고르세요. 선택을 하신 다음 이름을 지어주면 문양 안으로 들어가고, 언제든 승희님이 원하실 때 불러낼 수 있어요.] [현실에서도요?] [네. 현실에서도요.]세상에!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와아아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여신과의 대화를 마친 승희는 곧바로 수빈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까와는 달리 여러 종류의 토끼들이 그녀들의 주위로 모여든다.
“이건…”
“여신님이 한 마리 골라도 된데. 이름을 지어주면 현실에서도 부를 수 있대!”
“정말?”
수빈은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이 토끼들이 정말로 소환수였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현재는 주인이 없는 상태라는 점까지 전부 그녀에게는 놀랍기 그지 없는 일이다.
승희는 그렇게 모여든 토끼들을 면밀히 살피다가, 마침내 한 마리를 골랐다. 눈가에 사선으로 흉터가 나있고, 등짝에 용문신이 그려진 일명 건달 토끼다.
“그 녀석으로 하려고?”
“응.”
“좀 더 귀여운 아이로 하는 정하는 편이…”
“싫어. 난 얘가 좋아. 강해 보이잖아!”
“…”
개인의 취향을 뭐라고 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강해보이는 것이 아니라 불량해 보이는 것 같은데.
“네 이름은 엉아! 앞으로 잘 부탁해!”
승희가 그렇게 이름을 지어 주자 건달 토끼는 한 줄기 빛과 함께 그녀의 손등에 새겨진 문양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토끼의 모습에 살짝 놀랐던 승희는 마치 마법의 요술 램프를 다루듯 손등을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엉아. 나와 봐.”
그러자 곧바로 문양이 반짝이는가 싶더니 불량한 모습의 토끼 하나가 짝다리를 짚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아아아! 귀여워!”
“…”
어쩐지 귀찮아 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건달 토끼를 끌어안고 뺨을 부비적거리는 승희의 모습에 수빈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좀 부럽다. 처음의 인상이 남아서 무서운 기분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마치 살아 있는 캐릭터 인형 같은 느낌의 저런 토끼를 현실에서도 소환수로 부리는 건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해 봤을 법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여신님한테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지이잉.
문득 이명 같은 것과 함께 노이즈 같은 것이 주위에 나타나는 것을 목격했다.
“이건…”
아까 승희가 말했던 것이 이거였나.
하지만 이상하다.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엘리시온이라는 게임을 해왔지만 이런 식의 노이즈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초기에 가끔 랙 같은 현상이 일어나며 주위의 움직임이 끊기는 식의 현상을 목격한 적은 있었어도, 시야에 노이즈 같은 것이 끼는 현상은 처음 본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별 일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수빈은 은근히 방금 본 무언가에 대해 신경이 쓰였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이 게임 안에 진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런 사소한 작은 일도 이제는 그냥 흘려 넘기기 어렵게 되어 버린 것이다.
혹시 뭔가 문제가 생긴 건가.
하지만 당장의 그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운영자가 공지 같은 걸 날려주지 않는 이상, 그녀로서는 실제로 무슨 일이 생겨더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기껏해야 살짝 노이즈가 생기는 정도 밖에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실 지금 이 엘리시온의 내부에서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만약 사실대로 세상에 알려졌더라면, 너무나도 큰 파장을 몰고 왔을만한 그런 일이.
“안 돼! 막아! 막으란 말이야!”
“으아아아악!”
“이,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못 막아… 이건 못 막는다고.”
지구 전역에 퍼져 있는 수십 개의 지사들, 그리고 각 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수십 명의 운영팀원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비명인지 절규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아비규환.
달리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지금이라도 서버를 내려야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게임 전체가 다 털려 버릴 겁니다!”
“맞습니다. 지금의 상황을 막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외부 입력을 차단하고 완전히 밑바닥부터 파고들어서 원인을 색출하지 않으면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추정되는 외부 침입 루트만도 수천. 확인되지 않은 루트까지 합친다면 거의 일만에 달하는 경로로 엘리시온를 운용하는 서버가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운영팀은 물론이고 급히 불려온 개발팀들 역시 모두 같은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사실상 모든 방법이 무용지물이 된 상황이니, 물리적으로 외부와의 접속을 끊어 버리고 서버를 리셋할 각오로 일일이 뜯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지금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다.
“빨리 결단하지 않으면 늦습니다!”
“서버를 다 날릴 생각이십니까?”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지사장을 향해 팀장들은 거품을 물고 그렇게 달려들었다. 자칫하면 세계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게임 하나가 해커의 침입을 막지 못해 날려 먹게 생겼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그것 뿐이라면, 소리가 아니라 멱살을 잡고 흔들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지사장도 그런 사정이야 알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지사장님!”
“알아! 안다고! 난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건줄 알아!”
“네?”
“서버를 내리는 법 따위… 모른단 말이다. 염병… 서버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고.”
“…”
순간 팀장들은 침묵에 빠졌다. 그럴 수가. 지사장조차 서버를 내리는 법을 모른다면, 누가 안단 말인가.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자신들이 지금까지 만들고 운영해 왔던 게임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렇게 팀장급들이 침묵에 잠겨 있는데,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한 사람이 다가와 팀장 중 하나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는 허겁지겁 도망치듯 사라진다.
“뭔가.”
“그게…”
보고를 받은 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현재 저희 지사에 부여된 운영자 아이디를… 방금 모두 강탈당했습니다.”
“…”
웃긴 건, 이 와중에도 일반 플레이어들의 접속과 플레이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간혹 아주 약간의 노이즈 현상이 목격되기는 했지만, 플레이에 지장을 줄 정도의 일은 아니었다.
도대체… 도대체 누가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차라리 서버의 데이터가 다 날아갔다면 몰라도, 보란 듯이 서버를 장악하고 운영자들만 축출해 버리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단 말인가.
“지사장님. 사장단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끙…”
지사장은 뻣뻣해진 뒷목을 감싸 쥔 채 망연자실한 표정의 팀장들에게 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지금 이 일이 회사 밖으로 흘러나가선 안 돼. 무슨 말인지 알겠나.”
만약 게임의 운영권이 회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서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는 일이 언론 같은 곳에 흘러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단히 단속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답을 하는 팀장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함구를 시키긴 하겠지만, 자신들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 기막힌 상황이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사실상 전혀 없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하고 난리를 쳐도,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낸 당사자가 말을 흘려버리면 전부 도로아미타불이다.
팀장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들의 팀원들에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 지사장은 땀을 뻘뻘 흘리며 자신의 사무실 한쪽에 위치한 화상회의 시스템 앞에 앉았다.
그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벽 한 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니터들을 통해 세계 각지의 지사장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화면 한쪽에 자리 잡은 외국인 하나가 그렇게 묻는다. 물론 상대가 하고 있는 말은 영어다. 다만 엘리시온의 시스템 가운데 일부를 차용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하는 엘리시온의 비밀 가운데 하나이다. 존재하는 거의 모든 언어의 완벽한 실시간 번역 기능. 하지만 대부분의 기득권층에게 있어 이런 식으로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일이기에, 다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기능이 전제되어 있지 않았다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단일 서버 따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좋지 않습니다. 방금 전에… 저희 지사에 할당된 운영자 아이디가 모두 털리고 말았습니다.”
“…”
배석한 지사장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한국 지사장은 자신의 말에 굳은 표정을 짓는 그들의 모습에 자기가 뭔가 잘못 말했나 하고 겁이 벌컥 났다. 다른 이들에게는 고압적이어도, 그 역시 알고 보면 보다 높은 직급에 의해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월급쟁이에 지나지 않는다.
“뭔가… 문제라도?”
그러자 처음 질문을 던졌던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Pardon?”
“…”
엘리시온 지사장이 된 이후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한, 정말 꽤 오랜만에 들어보는 영어.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Je vous demande pardon.”
“¿Mande?”
“Wie bitte?”
“Sao ?? Anh noi gi c??”
순식간에 화상회의는 난장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갑자기 번역 시스템이 먹통이 되면서 회의 참석자 전원이 각자 자신의 나라 말로 떠들어 대기 시작한 탓이다.
아뿔싸. 이것마저 털려 버린 건가.
한국 지사장은 가뜩이나 숱이 얼마 남지 않아 훤해진 이마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흡사 바벨탑이 무너졌을 때,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처럼 떠들어 대는 소리를 들으며 절망에 빠졌다.
바로 그때, 갑자기 모든 화면이 어두워지며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지?”
이마를 감싸쥐고 있던 지사장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며 마치 사단장을 맞이한 신병처럼 각 잡힌 자세로 크게 외쳤다.
“보, 보고하겠습니다! 한국 현지 시각으로 오후 한시 이십 이분경.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서버에 침입하였습니다. 저희 지사에서는…”
지사장은 식은땀을 비처럼 주룩주룩 흘리며 오늘 일어난 사태에 대한 보고를 했다.
“끙…”
“…”
화면너머의 누군가는 지사장의 보고를 다 듣고는 잠시 그렇게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알겠다. 계속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변동되는 사항이 있다면 즉시 뉴욕 지사로 보고하도록.”
“넷! 바로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을 하고 나자, 어두워졌던 화면에는 이내 짙은 노이즈만 가득 흘러넘치게 되었다. 지사장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