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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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리수련
유아가 암담한 기분으로 물통 청소를 먼저 시작할 즈음, 형진은 정장을 벗고 수련용의 간단한 옷차림을 한 뒤 지하의 수련장으로 내려가 매크로 수련을 시작했다.
먹고 나서 그냥 자면 살이 찌는 것은 유아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이 게임이라면 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그렇지도 않은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핑하려고 음식을 먹으면 살이 쪄버리는 그런 게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뭐였더라.
식사 후에 너무 격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지 않은 일이라 처음에는 조금 천천히, 어느 정도 소화가 되었다 싶은 시점에서는 점차 강도를 높여가며 수련을 이어간다. 그렇게 꽤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며 땀을 빼고 나자, 경험치도 제법 많이 올랐고 몸도 가뿐해진 느낌이다.
수련을 마치고 나와 보니, 물통 청소는 마쳤는지 낑낑거리며 물을 길어 나르고 있는 유아의 모습이 어두운 달빛 아래 얼핏 보인다.
딱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 이상 보통은 적당히 농땡이도 피우고 그럴 텐데, 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성실한 여사제는 태만이라는 단어 자체를 모르는 것인지 구슬땀을 흘려가며 계속해서 물을 길어 나른다. 창가에 기대 형진이 그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지켜보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집중하면서.
고작 물 긷는 것 하나에 저렇게 집중할 수 있다니, 어떻게 보면 참 대단하다.
“후아… 다 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자, 유아는 마침내 물통을 전부 채우는데 성공했다. 시간이 꽤 걸리긴 했지만, 물통의 크기를 감안하면 대단히 빨리 일을 마친 셈이다.
“수고했다.”
“힉! 까, 깜짝 놀랐잖아요.”
창가에서 지켜보던 형진이 한 마디를 건네자, 유아는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인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모습에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어때? 배는 좀 가라앉은 것 같아?”
“네? 뭐… 그냥저냥…”
“들어와서 씻고 잘 준비해. 내일도 할 일이 많으니까.”
“네…”
씻고 잘 준비하라는 형진의 말에 또 엉뚱한 상상을 한 모양인지 경계의 시선을 보낸다.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정말 그런 의도를 담아서 한 말인지 아닌지 정도는 눈치를 챌 만도 한데, 아쉽게도 이 여사제는 여우가 아니라 곰 쪽인 모양이다. 하기야 얼어 죽을 지경인데도 차창 닫아 달라는 말조차 못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만.
“장작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으니까, 가져다 불도 좀 때. 그걸로 물 덥혀서 씻을 때 써도 좋아.”
“정말요?”
“물론. 공연히 찬물로 씻게 했다가 또 아파서 드러누우면 나로선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런 거 가지고 인색하게 굴 생각은 없어. 앞으로 씻는 물이나 난방 같은 것은 따로 나한테 허락 받을 필요 없으니까 적당히 알아서 해. 아, 물론 불조심하는 것 잊지 말고.”
“네!”
유아는 따뜻한 물로 몸을 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인지 후다닥 창고로 달려간다. 도대체 호구신은 애들을 어떻게 기르길래 고작 장작 몇 개 가지고 저렇게 기뻐하는지 모르겠다. 쯧쯧.
방으로 가서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유아가 자기 씻으려고 덥힌 물을 빼앗아와 몸을 씻은 후 잠자리에 들었다. 유아는 기껏 열심히 불 때고 물 길어다 덥혀놨더니 홀랑 가져가 버리는 형진의 모습에 볼을 부풀렸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표하지는 못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메이드라는 포지션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습이 포악한 주인인 형진 보기에 매우 흡족했다.
그렇게 다시 하룻밤이 지나고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왔다.
“일어나!”
“꺅!”
배부르게 먹고 따뜻한 방에서 폭신한 쿠션 속에 파묻혀 곤하게 잠들어 있던 유아는 갑자기 이불이 훌떡 뒤집히자 그대로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 아파라…”
“세상천지 어느 집구석에 메이드가 주인보다 늦잠을 자는지 몰라.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좋게 대해주니까 참 좋지? 정신 못 차리지? 어서 빨리 못 일어나!”
“이, 일어날게요.”
유아는 다그치는 형진의 목소리에 놀라 급히 일어나다가 자신이 속옷 차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다시 몸을 웅크린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지시를 내렸다.
“얼른 씻고 옷 챙겨 입고 내려와. 시장을 좀 봐야 할 것 같으니까 바구니 큼지막한 것도 미리 챙겨 놓고. 빨랑 움직여!”
“넷!”
형진의 외침에 유아는 후다닥 옷걸이에 걸어놓은 메이드복을 갖춰 입기 시작한다. 형진은 슬쩍 자리에서 물러나온 뒤, 주방으로 내려가 간단하게 식사를 차리기 시작했다.
아,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훌륭한 주인이 아닌가. 일부러 늦잠 자라고 수련까지 끝마친 다음에야 깨워주고, 이렇게 메이드 먹을 음식까지 챙겨주다니. 이런 은혜로운 주인을 만난 것을 고맙게 여겨야 할 텐데. 젠장.
도대체 메이드를 부리는 건지 키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혀를 차고 있자니, 조금 부스스한 모습으로 메이드복을 챙겨 입은 유아가 내려온다.
“와서 앉아. 빨리 먹고 움직여야 하니까.”
“네.”
식탁에 차려진 것은 다름 아닌 햄 샌드위치. 하지만 이것도 이제 몇 개 남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요리 수련을 시작할 참이니까 다 먹었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후아아아앙…”
그런 형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아는 이제 아예 묘한 비음까지 흘리며 전신을 휘몰아치는 감동에 몸서리친다. 이전까지 스티로폼 씹는 느낌의 빵 같은 것만 먹다가, 어제 그제 이런 저런 다양한 요리를 접하고 나니 이 햄 샌드위치의 대단함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맛있냐?”
“네… 너므 마시써요…”
입안에 든 건 좀 삼키고 말을 하던지.
“앞으로 이런 요리 정도는 질리도록 먹게 해주마.”
“정말요?”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것 봤나?”
“어, 그게… 아뇨.”
대답이 바로 안 나오고 잠시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기억 속을 더듬어 봤던 모양이다. 그리고 깨달았겠지. 절묘하게도 지금껏 거짓을 말한 적은 없었다는 사실을.
햄 샌드위치로 인해 살짝 풀어져 있던 유아의 눈동자가 살짝 두려움에 잠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이토록 철두철미한 자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었구나 하고 비로소 깨달았을 테니까. 그걸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는 점이 호구신의 사제스럽기는 하다만.
어쨌든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자, 유아는 곧바로 집 안에 굴러다니던 바구니 하나를 챙겨서 형진의 앞에 대령했다. 그녀처럼 아담한 숙녀가 들기에 적당한 작고 귀여운 바구니다. 물론 그런 게 형진의 눈에 찰 리가 없다.
“더 큰 거.”
“네?”
“못 들었어? 더 큰 거 가지고 오라고.”
“…”
유아는 이게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좀 더 큰 바구니를 챙겨왔다. 물론 이번에도 보편타당할 정도의 크기를 지닌 아담한 바구니다.
“후… 다시 정정해서 말하겠다. 이 집 안에 있는 제일 큰 장 바구니로 네 개.”
“아, 알겠습니다.”
찾아 봤더니 혼자 뛰어놀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아이가 그 안에 이불을 깔고 침대 대용으로 써도 좋을 법한 큼지막한 바구니가 몇 개 있긴 하다. 설마 이건가 싶어서 챙겨가니 그제서야 형진에게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그 정도면 딱 적당하겠군. 따라와.”
“…”
바구니 자체야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 큰 바구니에 전부 물건을 담아서 옮길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해진다.
그런 유아의 표정을 보고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무거운 걸 낑낑대며 드는 모습을 즐기기 위해 이런 주문을 한 것이 아니다. 희망과 생명의 사제에게도 공포와 죽음의 성도들이 그러하듯 인벤토리 같은 것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자 했을 뿐.
지금 표정을 보니 아마도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는 인벤토리 같은 훌륭한 기능은 제공되지 않는 모양이다. 과연 놀라우신 공포와 죽음, 그 경이로운 권능에 경의를.
그냥 물어보면 되는 일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뭐냐 라든가 말한 적도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하면 둘러대기 귀찮아진다. 대충 둘러대자면 맹한 유아의 모습을 보건데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지만, 그래도 굳이 일부러 빌미를 만들어줄 필요는 없는 일이다.
“뭐해? 안 따라오고.”
“…”
하지만 그런 형진의 의도를 모르는 유아는 정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별 수 있나. 이미 자신은 신전에서 버림받고 눈앞의 남자에게 팔려온 몸인 것을. 결국 유아는 큼지막한 바구니 네 개를 겹쳐 들고는 터덜터덜 형진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형진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다름 아닌 마시장이었다.
“노새 한 마리 보여 주시죠.”
“이쪽으로 오십시오.”
무슨 명마를 사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고를 생각이지만, 직접 기를 당사자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있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네?”
“앞으로 네가 길러야 할 놈이야. 시장 다닐 때도 함께 데리고 다녀야 하고. 내가 좀 사들일 물건이 많은 터라.”
“아…”
그제서야 이 바구니들을 전부 자신이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유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이 반짝인다. 지구로 따지면 시장 갈 때 타라고 스쿠터나 경차를 사주는 격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럼 잠시 좀 봐도 될까요?”
“물론.”
유아는 마굿간 안의 노새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물론 그녀가 말이나 노새를 볼 줄 아는 건 아니다. 단지 희망과 생명의 사제에게 부여된 힘으로, 어떤 노새가 안 아프고 건강한지를 살피는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노새를 고르는 수단이 된다.
“얘로 할께요.”
“오, 메이드 아가씨가 노새 보는 눈이 좀 있구만. 대단한 걸.”
몸집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노새 치고는 꽤 다부지고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을 선택하자 상인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렇게 감탄했다. 그냥 예쁘장하고 어쩐지 눈길 가는 메이드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걸 반전 있는 여자라고 하는 건가 싶을 정도다.
딱 봐도 성질이 좀 있어 보여서 괜찮을까 싶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의외로 유아의 손을 피하지 않고 고분고분 따르는지라 형진은 괜찮겠지 싶은 마음에 돈을 지불했다.
“내가 네 주인이다. 앞으로…”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이 망할 노새 놈이 마치 여자 비명 소리 비슷한 느낌으로 길게 울부짖으며 형진의 손길을 피한다.
“…”
이건 또 뭔 일인가 하고 잠시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자, 놀란 유아가 얼른 노새를 다독인다.
“얘, 그러면 못 써. 조용히 해.”
그러자 노새는 형진을 향해 마치 코웃음을 치듯 흥 하고 콧바람을 내뿜더니 순순히 유아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는 걸 허락한다.
“끙… 이 망할 노새 놈이…”
사실 노새로서도 억울한 면이 있었다. 느닷없이 불길한 기운이 담긴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니 본능이 민감하게 반응해서 비명을 터뜨렸을 뿐이다. 애초에 친화력 증가와 매료 같은 효과를 기본으로 달고 있는 유아와, 공포와 죽음이라는 어둠의 속성을 지닌 형진을 같은 선상으로 놓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랄까.
하지만 형진은 미처 그런 점까지는 깨닫지 못한 채 망할 짐승 놈이 주인을 몰라본다며 애꿎은 유아에게 툴툴댄다.
“쳇. 뭐해? 어서 가자고. 살게 많아.”
“네.”
유아는 삐친 듯이 보이는 형진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살짝 웃음을 짓다가 얼른 아무렇지도 않은 척 노새를 데리고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