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74
374====================
80. 현신
몇 번을 시도해 봐도 마찬가지다. 혹시나 싶어 다른 장소를 열어 봤다. 기르카부터 시작해서, 이 세계에 와서 단 한 번만 가본 그런 장소도 어김없이 열린다. 오직 지구만 반응하지 않을 뿐이다.
형진은 허세와 망상의 신물인 망상구현의 단장을 가만히 바라보며 오만 가지 생각을 다 떠올렸다.
혹시 지구라는 이름의 행성 역시 엘리시온처럼 누군가에 만들어진 거짓된 세상은 아닐까. 혹시 정말로 일종의 게임 같은 세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형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만약 지구가 거짓된 천국과 유사한 그런 장소라면, 요정의 문을 열려고 한 시점에서 공포와 죽음께서 그를 말렸어야 옳다. 만약 정말로 엘리시온과 비슷한 종류의 세계라면, 이것 역시 치명적인 오류를 불러올 수 있는 행동이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째서일까.
망상구현의 단장은 자신이 가본 장소에 대해서는 어디든 다시 갈 수 있도록 요정의 문을 여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법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신이 하사한 권능의 일부이기 때문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리지 않는다는 것은 망상구현의 단장이 요구하는 조건을 형진이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실제로는, 그가 지구에 가본 적이 없다는 식의.
“큭…”
갑자기 극심한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머리 속에서 서로 다른 생각들이 충돌하자, 그 반발처럼 격렬한 두통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형진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실마리. 실마리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난 이유를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기억을 떠올려 본다.
엘리시온의 운영자란 놈을 만난 뒤, 그는 포장마차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렇게 혼자 술을 퍼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에 담긴 것을 풀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이것 저것 자신의 얘기를 떠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감옥에서 전직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어?”
순간 형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여겼던, 이 세계로 넘어온 직후의 일에서 기이한 비틀림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그는 감옥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었다. 자신은 받아본 적도 없는 그런 퀘스트를. 게다가 가트 놈은 그런 자신을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앞뒤 잘라먹고 갑자기 그런 상황에 내동댕이 쳐진다는 것 자체가. 게다가 당시 가트 놈이 보였던 반응을 생각하면, 그런 의문은 더욱더 커질 수밖에 없다.
한번 이상하다고 생각하니 의문이 꼬리를 잇는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인벤토리를 넘겨주고 어디론가 가버린 주정뱅이도 그렇다. 그 자는 자신이 퀘스트를 완료한 뒤 찾아보자, 이미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어째서?”
혹시 중간에 누락된 기억이 있나 하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감옥 이전의 일에 대한 것은 어떠한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기억에 손을 댄 것인가?
가능성은 있다. 본래 이 세계에 도착하고 난 뒤 일정 시간 동안 기억나지 않는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가 공포와 죽음을 알게 되어 추종자가 되기 위한 시험을 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식의 비틀림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되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런 것이라면 어째서 지구로 통하는 요정의 문은 열리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 지금 생겨난 모든 의문의 시발점은 바로 이것에 있었다.
요정의 문에 문제가 없다면, 자신은 지구에 가본 적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타나토스에 와서의 첫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설마?”
형진은 무언가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아틀리에로 향하는 요정의 문을 열고는 그 안으로 뛰쳐 들어가 한켠에 자리 잡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걸치고 있는 옷차림은 지구에 있을 때의 그것과 다른 면이 있지만, 분명 거울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자신이 틀림없었다.
문득 그렇게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던 형진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옷을 벗고 벌거숭이 모습이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구석구석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없어…”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어린 시절, 뜨거운 콩나물국을 먹다 그릇을 엎는 바람에 생긴, 사타구니 근처의 작은 화상 흉터 자국이.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마찬가지다. 이 육체에는 그런 식의 오래된 흉터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형진은 뒤통수를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유아에게 회복을 받다보니 흉터 자국마저 사라져 버린 걸까도 싶었지만, 형진은 이미 이 상황이 그런 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밝혀진 모든 단서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해답이 무엇인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진, 가스트샵에 신규 입점할 품목인데 결재 좀…”
그때 아틀리에의 문이 열리며 제랄딘이 들어오다가 벌거벗은 채 거울을 보고 있는 형진을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
황망한 표정으로 형진이 돌아보자, 제랄딘은 잠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슬며시 몸을 돌리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있다가 다시 올게요.”
“…”
아무래도 뭔가 착각을 한 것 같지만, 형진은 제랄딘이 닫고 나가자 다시 거울로 시선을 돌렸다.
틀림없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이 몸은 본래 형진이 지니고 있던 그 몸이 아니다.
이 몸은, 바로 아바타다.
“허…”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확실하게 설명이 된다.
가봤던 장소라는 것이 육체의 기억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 몸은 지구에 가본 적이 없으니 요정의 문이 열리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된다.
만약 그가 이 아바타에 깃들기 전에 누군가가 임의로 추종자가 되기 위한 전직 퀘스트를 수락한 것이라면, 뜬금없이 감옥에서 이 세계의 기억이 시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가 이 세계에 온 뒤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이 몸이 아바타라면 역시 간단하게 설명이 될 수 있었다. 오늘 승희가 자신의 도움을 받아 단숨에 레벨 30을 돌파했던 것과 같다. 아바타가 지닌 높은 성장성이라면, 다른 추종자들보다 월등한 성장 속도를 지닌 채 순식간에 최정상급의 추종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럴 수가…”
그것 만이 아니다.
유아의 경우엔 매크로 체조를 수행하는 순간 자신이 섬기는 신을 강림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어떤 매크로 체조를 수행해도 공포와 죽음은커녕 그 어떤 신도 불러내지 못했다. 당연하다. 자신의 몸은 유아와는 달리 아바타 상태였기 때문에 매크로 체조가 반응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주 간단하게 설명되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대미궁의 코어를 통해 엘리시온에 접속했을 때 형진은 자신의 상태창이 열리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래스에 스폰이라고 당당하게 기록까지 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신체는 아바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상태창 같은 것이 열리지 않은 것이겠지.
“하… 하하…”
그 외에도 수많은 단서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겠지만, 형진은 현재 자신의 육체가 아바타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그 모든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렸으리라.
형진은 잠시 허탈한 표정으로 거울을 바라보다가 작은 탄식과 함께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지금까지 잠자코 계셨던 겁니까.”
그러자 누군가가 대답했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물론 그 누군가는 언제나처럼 그를 지켜보고 있던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이었다. 그런가. 언제나 그렇게 자신을 주시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육체 자체가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에 의해 창조된 아바타였기 때문인가.
[부정하지 않겠다.]공포와 죽음이 그렇게 조심스러운 말을 건넸지만, 어쩐지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신뢰감에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이다.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딱히 숨길 생각이었던 건 아니다. 단지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 “그러시겠죠.”형진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다시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뭐가?]
“어째서 제가 이런 상태인 겁니까.”
공포와 죽음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렇게 답했다.
[서로 다른 세상을 넘나드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허세와 망상처럼 법칙을 비틀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신이거나, 황혼과 망각처럼 법칙 자체를 무효로 만들 수 있는 신 정도니까.]과연 그런 것인가.
허세와 망상의 경우엔 공포와 죽음이 적대하던 신이니 그 능력을 함부로 빌려오기 어려웠을 것이고, 황혼과 망각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지닌 힘을 두려워 하며 방구석 폐인으로 살았던 신이었다. 즉, 아무리 공포와 죽음이라 해도 형진의 본신 그 자체를 다른 세계로 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차선책이 바로 아바타이다. 그것이라면 보통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다른 세계를 넘나들도록 만들 수 있다. 마치 허세와 망상이 만든 거짓된 천국에, 보통 사람들이 아무런 저항감 없이 접속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럼, 본래의 저는 여전히 지구에 있는 것이겠군요.”
[그 말대로다.]
“무사한 겁니까?”
공포와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당연하다. 본신에 문제가 생겼다면, 이런 식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긴…”[너의 본신은 엄중하게 보호되고 있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포와 죽음은 혹시나 싶었던지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까지 유지되어 있던 신뢰관계에 살짝 금이 가버린 형진은 그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지금?]
“네. 그리고, 기왕이면 아바타 상태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러자 공포와 죽음이 그를 만류했다.
[그냥 아바타 상태인 편이 낫지 않을까. 지금의 상태라면, 죽음 같은 위협이 닥치더라도 다시 되살아나는 것도 가능하니까.]물론 그건 충분히 매력적인 장점이다. 하지만, 자신의 본신이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상황은 공포와 죽음에게 자신의 본신이 볼모로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니까.
형진의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일까. 공포와 죽음은 작은 탄식을 섞어 다시 이렇게 대답했다.
[알겠다. 하긴… 이제는 황혼과 망각도 본래의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상황이니 굳이 아바타로 활동해야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공포와 죽음의 그와 같은 말에, 형진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어쨌든, 스스로가 섬기고 있는 신에 대한 의심이 불경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죄송합니다.”
[괜찮다.]
“그럼… 바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다.]
형진은 공포와 죽음의 대답을 듣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잠시 몽롱한 기분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무언가 포근하고 부드러운 것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응… 흐으응…”
“…”
어디선가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환청인가 싶어 다시 귀를 기울였지만 그 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청각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다른 감각들도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뜨던 형진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멍하니 지켜 봐야만 했다.
“우후후… 깨어났네요? 잠시만요… 조금만 더… 흐으응…”
처음 보는 굉장한 미녀 하나가 자신의 벌거벗은 몸 위에 걸터 앉은 채 요분질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헐떡거리며 그렇게 허리를 움직이더니, 이내 작은 탄식과 함께 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육체를 자신에게 기대왔다.
뭐랄까. 황당하다. 오랜 아바타 상태에서 깨어나고 보니 영문 모를 여자가 자신을 범하고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단 말인가.
“너… 누구냐?”
형진이 묻자 그녀는 배시시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기억 안나요? 당신을 스카웃했던 바로 그 사람인데.”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