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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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요리수련
형진이 요리 스킬을 올리고자 마음먹었을 때 가장 고민했던 것이 게임과의 차이점이다.
요리로 도핑을 하고자 한다면 최소 숙련 단계까지는 레벨을 올려야 한다. 문제라면 그 단계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포만감 외의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점. 이 때문에 게임 상에서는 식초나 술, 기타 소스류 같은 부재료 같은 것을 낮은 등급에서 대량으로 만든 후, 숙련 단계 이후에 그것을 가지고 본격적인 요리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식초나 술 같은 것을 이곳에서 만들자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막걸리처럼 일차로 발효된 재료를 사용해도 석 달 가량이 소모되고, 곡물이나 과일을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면 이 시간은 더 길어질 수밖에 없다. 발효 자체가 게임처럼 레시피 대로 재료 넣는다고 뚝딱 만들어지는 종류의 일이 아닌 것이다. 요리 스킬 올린다고 항아리만 쳐다보다가 해가 바뀌고 나이가 한 살 많아진 자신을 깨닫는다면 그것처럼 난감한 일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형진이 고민 끝에 내놓은 결론은 편법이 아닌 정석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음식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경험치를 쌓아 숙련 단계를 만드는, 아주 무식하고 단순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문제가 있다.
만드는 건 그렇게 만든다 쳐도, 그 많은 음식을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아무리 유아라는 식충이가 자신의 집에 기생하고 있다 해도, 숙련 단계까지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야 할 음식의 양이라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문제로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문득 깨달았다. 유아 급의 존재 들이 드글드글거리는, 마치 마계와도 같은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그 장소는 다름 아닌 호구신의 신전이다.
솔직히 형진의 입장에서는 제대로 만든 것도 아닌, 그런 되다 만 음식들을 누군가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그러나 스티로폼 씹는 느낌의 빵도 아주 맛있게 먹던 유아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곳 신전의 아이들이라고 해서 그리 다를 것도 없을 것 같다.
명분도 있다. 유아를 식구로 맞이했으니, 그 친정이라 할 수 있는 신전의 가족들에게 음식 대접 한 번 정도 하는 걸로 치면 되는 일이니까. 호구신의 자식들은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으니 좋고, 형진은 요리 스킬을 마음껏 올릴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저거, 주시죠.”
“이것도.”
“그것도.”
“저것도.”
뭘 사려고 노새까지 사서 가나 싶었던 유아는 형진의 씀씀이에 안색이 시퍼렇게 질리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고작해야 자신과 형진 둘 밖에 살지 않는 집인 걸 뻔히 아는데 누가 다 먹는다고 저렇게 식재료를 포대 단위로 산단 말인가.
설마… 저걸 다 자신보고 먹으라는 건 아니겠지?
유아는 어릴 적에 사제님이 읽어 주었던 동화의 한 자락이 떠올랐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보이는 사람이 아이들을 데려다가 배불리 먹여 살을 통통하게 찌운 다음,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면 맛있겠다 하고 냉큼 잡아먹는다는 그런 얘기 말이다.
물론 그 동화가 주는 교훈은 아무리 착해 보이는 아저씨라도 맛있는 거 준다는 말에 속아서 따라가면 그런 식으로 잡아먹힌다는 내용이다. 내용 자체로도, 그리고 비유에 담긴 의미로도 유아 같이 맹한 여자에겐 상당히 귀 기울여 들어야할 교훈인 셈이다.
유아는 혹시 이 사람 좋아 보이는 주인님이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 이미 어느 새인가 주인님이라는 호칭을 자신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긴 했지만 말이다.
“뭐해?”
“네?”
“얼른 집에다 가져다 놔. 집 위치는 알지?”
“아, 알겠습니다.”
유아는 식재료를 잔뜩 실은 노새를 끌고 집으로 돌아가서 짐을 내려놓은 뒤, 다시 시장으로 갔다. 그리고, 어느 틈엔가 잔뜩 쌓여 있는 식재료를 보고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뭐해? 얼른 가져다 놓지 않고.”
“네, 넷!”
이 정도의 식재료는 신전에서 신께 제의를 지낼 때도 본 적이 없다. 도대체 이 많은 재료를 가지고 뭘 하려는 걸까. 아니, 다른 건 둘째 치고 상하기 전에 요리해서 먹을 수는 있는 걸까.
유아는 그렇게 집과 시장을 몇 번이나 왕복하고 나서야 그 많은 식재료를 다 운반할 수 있었다. 어찌나 많은지 그것만으로도 벌써 오전이 다 가버리고 말았다. 지구에서처럼 배달이 되면 참 좋겠지만, 불행히도 여긴 그런 서비스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고생했다. 수고했으니 이거 받아.”
“이건…”
“잠옷이다. 그리고 속옷도 몇 세트 샀으니 입어라.”
유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손에 건네진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다 큰 애가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고 그러면 괜히 잡아먹고 싶어지거든. 게다가 갈아입을 속옷이 없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챙겨주리?”
다그치는 말은 아니었지만, 유아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움과 수치심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고 말았다. 고맙긴 한데, 뭔가 그 고마움을 고마움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형진의 말 속에 배어있다.
“죄, 죄송합니다.”
“됐고. 얼른 가자. 배고프다.”
“네.”
곧바로 집에 도착한 형진은 일단 점심 준비부터 시작했다.
“유아.”
“네.”
“재료 손질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이죠.”
꽤 자신 있는 대답이다. 어째 좀 불안하기는 하지만 믿어보기로 했다.
“그럼 어제 길어온 물에 야채 좀 적당히 씻어와. 둘이 먹을 정도 분량으로.”
“네.”
다행히 야채를 씻어오는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양이 좀 문제였을 뿐.
“너… 이거 다 먹을 생각이냐?”
“그, 그게…”
그제서야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좀 많다 싶었는지 동공지진을 일으킨다. 보통 이런 반응은 뭔가 심각하게 거짓말을 했을 때나 일어나는 거 아닌지.
“이거랑 이거. 그리고 이거. 잘게 썰어서 여기에 담아. 단, 손질이 끝나면 포션을 만들 때처럼 신성력으로 버무릴 것. 축복 같은 것도 뿌려 보고.”
“네, 알겠… 네?”
그런가보다 하고 지시대로 움직이려던 유아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반말도 아니고 존대도 아닌 이상한 대답을 하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음식에 포션 효과를 부여한다든가 축복을 내린다든가 하는 식의 경험은커녕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잘난 희망과 생명의 권능 맛 좀 보려고 그런다. 왜? 뭔가 문제라도?”
“아, 아뇨.”
사실 포션을 만들기 위해 소모되는 신성력은 매우 중요한 힘이라 이런 식으로 음식에 쓰는 경우가 없다. 포션 만들기에도 부족해서 지방의 사제를 위험함을 무릅쓰고 불러올리는 판에 자기들 먹을 음식에 쓸 정신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건 게임 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식재료 손질법이다. 사제가 식재료에 축복을 내리게 되면 그 재료는 축복받은 식재료로 분류되며, 이러한 식재료로 만들어진 요리는 배에 가까운 버프 지속 시간을 가지게 된다. 사제의 능력에 따라서는 기본 효과 자체가 뻥튀기 되는 경우마저 있다. 포션 효과는 솔직히 형진으로서도 될까 말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어쨌든 축복만으로도 요리의 가치가 배 이상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진이 조금 무리하게 유아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들인 이유다.
요리를 통한 도핑이 연금술로 제조된 비약보다 좋은 점은, 효과가 조금 부족한 대신 지속 시간이 길다는 것. 사제의 축복은 그러한 요리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단점을 없애는 수단인 셈이다.
사실 그리칸에 도착한 뒤 음식점을 이곳저곳 탐사한 것에는 이쪽 사람들의 입맛을 파악하는 것 외에도 자신이 개척하려는 분야에 먼저 손을 담근 자가 있는지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돌아다녀 본 결과, 축복받은 식재료는커녕 도시에서 가장 요리를 잘하는 사람의 실력도 전문 수준이 고작이었다. 물론 전문가 수준도 충분히 훌륭한 요리사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도시를 대표하는 수준이라면 역시나 글쎄 라는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다.
유아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이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재료를 다듬고 그렇게 다듬어진 재료에 신성력을 조미료처럼 듬뿍 뿌린다. 처음이라 어느 정도 양이 적절한지 몰라 무작정 뿌리다보니 식재료들이 생명력을 머금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 되어 버린다.
“살살해. 입 안에서 살아 움직일까봐 무섭다.”
“아, 알겠습니다.”
형진의 말에 유아는 찔끔하며 신성력을 살살 뿌리기 시작한다. 확실히 입 안에 넣고 깨물었는데, 식재료들이 비명을 질러대고 그러면 그건 이미 요리가 아니라 호러고 괴기다.
유아에게 부재료의 손질을 맡긴 형진은 밀가루와 기타 재료를 조금 가져다가 반죽을 시작했다. 간단하게 먹을 건데 발효하고 뭐하고 할 틈도 없고, 그렇다고 수제비나 칼국수 같은 것을 하기도 뭐하니 토르티야를 구울 생각이다.
간단하게 반죽을 치댄 다음 잠깐 동안 숙성을 시키고는 얇게 펴서 만두피처럼 만든다. 그리고 팬을 달군 다음 구워내면 끝. 빵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요리법이지만, 이것도 엄연히 요리라고 경험치를 준다. 그래봐야 솜털 만큼에 불과하지만.
“다 됐어?”
“네. 이렇게 하면 되나요?”
불안한 기색으로 손질된 야채들을 담은 보울을 가져와 보이는데, 꽤 훌륭하다. 아무래도 전에 있던 신전에서 재료 손질 좀 해본 모양이다.
“좋아. 쇠고기를 어디다 뒀더라…”
“여기요.”
고개를 끄덕이고, 점심용으로 조금 사둔 쇠고기를 찾으려 하자 유아가 얼른 움직이더니 나뭇잎으로 싸맨 작은 고기 뭉치를 내민다. 먹을 거랑 관련됐을 때 말고 평소에도 이렇게 좀 빠릿하면 좋을 텐데.
형진은 쇠고기를 잘게 저민 다음,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 뒤 소스를 넣고 야채와 함께 볶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유아는 고기 볶는 냄새가 주방에 차기 시작하자 그것만으로도 이미 황홀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 어지간하면 입가에 흐르는 침이나 좀 닦지 그러냐고 한 마디 쏴주고 싶지만, 저렇게 기대하는 모습을 보니 또 막상 뭐라 하기도 그렇다.
볶는 것을 멈추고 팬을 불 위에서 내리자 유아는 그제서야 침을 닦으며 물었다.
“다 된 건가요?”
“아니. 기다려.”
“…”
역시 얘는 아무리 봐도 여우나 고양이 과는 아니다. 형진은 어쩐지 막 데리고 온 강아지에게 기다려 라는 명령을 가르치는 주인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토르티야 위에 고기와 야채 볶은 것을 덜어낸 다음 반으로 접어서 건네주었다. 이것이 바로 멕시코 음식 가운데 하나인 타코.
“자, 먹어봐.”
“네!”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형진이 건네준 것을 입으로 가져간 유아는 몸을 부르르 떨며 감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꽃밭이나 별빛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의 리액션은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 처음 만든 요리이니 한 방에 버프 효과 같은 게 나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때, 먹을 만 해?”
“네! 너무 맛있어요!”
뭐… 네 입맛에 어떤 음식이 맛없겠냐마는.
형진은 그렇게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 역시 타코를 하나 만들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이게 웬 일.
[‘신성한 생명력의 타코’를 섭취하여 일정시간 능력치가 상승합니다.]“엥?”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든 요리 주제에 무려 버프 효과가 발동한 것이다!
당황해서 얼른 확인해 보니, 부여된 버프 효과는 무려 두 가지다. 하나는 생명력 회복 증가, 또 하나는 최대 정신력 증가.
“헐…”
단순히 축복 받은 식재료 효과만 받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건만, 이 말도 안 되는 여사제는 이런 기적을 만들어내 버렸다.
그렇다. 이건 기적이다. 달리 이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유아.”
“네?”
“너… 그냥 평범한 식충이가 아니었구나?”
“…”
타코를 먹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던 유아는 이 남자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려고 이러나 싶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형진이 크게 웃으며 와락 껴안자 기절할 듯이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