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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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해후
“일단… 새 옷을 가지고 오라고 하겠습니다.”
아이가 둘 딸린 아줌마의 다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쭉 뻗은 각선미. 하기야 따지고 보면 미엘도 이제는 아이 일곱 딸린 아줌마였던가. 어쨌든 그렇게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이 조금 난처했는지 형진은 새로운 옷을 맞춰주기 위해 요정들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아란은 그런 형진의 행동을 말렸다.
“갈아입을 옷 정도는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새 옷을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대한 완곡한 거절의 의미. 형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겠군요. 그럼 잠깐 나가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이 또 의외다.
“괜찮아요. 그대로 있어도.”
“네?”
형진이 반문하는 순간 아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미처 눈을 돌릴 틈도 없이 걸치고 있던 옷가지들이 하나씩 중력의 힘에 이끌려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
몸을 돌린 채 걸치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는 동안, 창밖으로 붉은 석양이 밀려든다. 어떻게 붉은 석양에 실루엣으로 비치는 그녀의 몸을 가만히 지켜보며 옛 생각을 떠올렸다.
아란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는 드러난 몸에 새로운 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옷이 뭔가 좀 이상하다.
쭉 뻗은 다리에는 그물 스타킹이 신겨지고, 머리에는 익숙한 어떤 형상의 머리띠가 씌워진다. 몸에는 코르셋 같은 느낌으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 상태에서 잠시 머뭇거리던 아란은 다시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몸에 둘렀다.
“이런 것도… 오랜 만이네요.”
“그렇… 군요.”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는 무려 바니걸 슈트에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맙소사.
이 아줌마는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건지 아는 건가.
바니걸 슈트만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앞치마를 두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형진이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의 변태성을 강하게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이 여인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이상… 한가요?”
“아니요.”
그 말과 함께 형진은 벌떡 일어나 아란을 끌어안았다.
“앗…”
갑작스런 행동에 짤막한 비명을 내지른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밀쳐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그의 가슴에 얼굴을 기댈 뿐이다.
“도망치지 않는 겁니까?”
“그러길 원하세요?”
“너무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거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가요.”
아란은 그렇게 반문인지 대답인지 모를 말을 하고는 슬쩍 형진의 가슴을 밀어내 떨어진 뒤 말했다.
“도망치면, 잡아 줄 건가요.”
“아마도.”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 아란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뭐에요. 그게.”
“이래봬도 겁이 많은 청년인지라.”
그러자 아란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몇 살인데요?”
“네?”
“생각해보니 아직 당신 나이도 모르는 것 같아서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스물다섯입니다.”
형진의 대답에 아란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정말요?”
“왜요.”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어요.”
어려보였다는 얘길까. 아니면 철이 없어 보였다는 얘길까.
“그럼 아란씨는 몇 살이죠?”
“글쎄요.”
아란은 빙긋 웃고는 몸을 돌렸다.
“절 잡으면 말해줄게요.”
그리고는 그 한 마디를 남겨 둔 채 테라스 밖으로 훌쩍 뛰어 내린다.
“앗!”
방금 전까지 사경을 헤매고 있었던 주제에 갑자기 무슨 짓을!
기겁해서 얼른 창가로 달려가 보니, 앞치마를 두른 바니걸 한 명이 어느 틈엔가 정원을 훅훅 지나 어딘가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형진은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처음 그란웰에서 만났을 때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다르다. 고작 토끼 한 마리 못 잡고 빌빌거리던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있는 것이다.
곧바로 그의 몸이 허공을 날아 떨어져 내린다. 정원에 심어놓은 나무들을 향해 솔개처럼 떨어져 내리던 그는 이내 전율의 질주를 펼치며 아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란 역시 집행자이고, 명색이 한 지역을 책임진 지부장이기까지 하다. 다른 지부장들에 비해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다 한들, 공포와 죽음이 아무나 지부장으로 데려다 앉힐 리는 없는 일. 그녀 역시 직함에 걸맞은 실력을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훅! 훅훅!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다가 순간 이동처럼 일순 모습이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그들은 그렇게 왕성 한켠을 질주했다.
지부장들이 드글거리는 왕성에서 그런 식의 질주를 이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도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가 미리 언질을 주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쫓고 쫓는 두 두 남녀의 대결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왕성 라이언하트는 꽤 넓은 곳이긴 했지만, 결국은 사방이 가로막힌 섬. 어느 쪽으로 달리든 결국은 끝이 날 수 밖에 없는 경주였다.
“꺅!”
짤막한 비명과 함께 두 사람은 모래사장을 뒹굴었다. 잠시 데굴데굴 구르다가 멈추자, 두 사람은 서로 몸을 포갠 채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기울어 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잠시 시간이 지나자, 세상을 온통 붉게 물들였던 석양은 사라지고 이내 달조차 뜨지 않은 검은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한 느낌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실 이곳은 달리 공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지라, 이렇게 별빛 가득한 밤하늘 따위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말했듯이, 경치는 결국 누구와 보느냐가 중요하게 마련이다.
“알려줘요.”
“네?”
형진의 말에 아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잡으면 몇 살인지 알려준다고 그랬잖아요.”
아란은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눈을 흘겼다.
“끈질기네요. 너무 끈질기면 인기 없어요.”
“설마 이제 와서 딴소리 하긴 가요?”
“네.”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도 인기 없어요.”
“정말요?”
“아마도.”
아란은 손을 들어 형진의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대답했다.
“스물여섯이요.”
이번엔 형진이 놀랐다.
“정말요?”
“왜요. 안 믿겨요?”
“네.”
아란이 되물었다.
“생각보다 많다는 거에요? 아니면 적다는 거에요.”
“적다는 쪽인데요.”
“아부하기는.”
“정말입니다.”
사실 형진은 앞서 자신의 나이를 말할 때 만나이로 답했다. 하지만 한국식으로 따지면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 오히려 아란보다 많아진다. 물론 아란의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 역시 달라질 테니 이런 식의 비교는 큰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그와 아란의 나이는 별 차이가 없는 셈이 되어 버린다.
하긴 이쪽 세상은 지구와는 다르다. 아니, 지구라도 고등 교육을 마치지 않고 이른 나이에 결혼한 여성들은 이십대 초반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란 역시 그런 경우인 셈이다.
“뭐랄까. 아란씨는 훨씬 성숙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연륜 같은 것도 느껴졌었고.”
아란은 또다시 눈을 흘겼다. 아니, 이렇게 보니 눈을 흘긴다기 보다는 눈웃음을 치는 듯한 느낌이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도 저 눈웃음에 홀렸었지.
“겉늙어 보인다는 뜻인가요?”
형진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좋은 의미입니다. 최소한 철없다는 뜻은 아니니까.”
“훗.”
아란은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앞서 그녀가 형진에게 생각보다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고 말한 것이, 지금 이 순간 철없다는 뜻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형진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얼굴과 머리카락에 묻은 모래가 그의 손길을 따라 떨어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씻어야겠어요.”
아란의 말에 그는 투정부리듯 답했다.
“이대로 있고 싶은데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살짝 눈을 흘기더니 아란은 이렇게 답했다.
“그럼 같이 씻으면 되죠.”
“정말요?”
“정말요.”
형진이 허리를 감고 있던 손을 풀어주자, 아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이 아닌 형진의 셔츠로 손을 가져갔다.
“보통은 자신이 먼저 벗지 않나요?”
“전 응큼한 아줌마라서 좀 달라요.”
“다행이군요. 저 역시 응큼한 아저씨인데.”
“쿡쿡.”
형진은 아란이 자신의 셔츠를 벗기는 동안 가만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만 했다.
“응큼한 아저씨치고는 손길이 너무 부드러운데요.”
아란의 말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뭐랄까. 벗기기엔 뭔가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이 모습이요?”
“제가 좀 취향이 독특하거든요.”
“얼마나?”
형진은 자랑스럽게 답했다.
“사실은 엘 파르드의 모든 여성들에게 바니걸 슈트를 입히려다가 실패한 전력도 있습니다.”
“맙소사.”
아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키득거리며 웃어 버렸다.
“언젠가는 반드시 꿈을 이루고 말겁니다.”
게다가 한술 더 떠서 그렇게 다짐하기까지.
“참아줘요. 당신이 역사에 그런 식으로 이름을 남기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아란씨가 제 여자가 되어 준다면 의견을 참고할 생각은 있습니다.”
은근슬쩍 그렇게 청을 해봤지만, 역시나 아란은 슬그머니 그 말을 받아 넘긴다.
“참고만요?”
“네.”
“뭐에요, 그게.”
“전 솔직한 남자라서 거짓말은 못합니다.”
“말이나 못하면.”
형진의 옷을 다 벗긴 아란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입고 있던 앞치마와 바니걸 슈트를 벗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말아요.”
“어차피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도요.”
거짓말이다. 그는 어느 틈엔가 심연의 눈가리개를 쓰고 있는 상태였다.
“자, 이리로 와요.”
“네.”
둘은 손을 잡고 잔잔하게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물 속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형진은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데, 우리 몸을 씻으려고 한 것 아니었나요.”
“그랬죠.”
“그럼… 이거 소용없는 짓인데.”
“어째서요?”
무슨 소리냐는 듯이 되묻는 아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소금기 때문에 어차피 다시 씻어야 하거든요.”
“앗! 그런 건 진작 말해 줘야죠.”
“알고 있는 줄 알았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남녀는 서로의 몸이 가만히 물을 끼얹어 몸에 묻은 모래를 닦아 주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모래를 씻는다는 핑계로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는 행위에 불과했다.
아란의 손이 가만히 그의 가슴에 닿았다. 그러자, 형진의 손 역시 그녀의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에 닿았다. 그렇게 잠시 가슴에서 고동치는 심장의 울림을 서로의 손을 통해 전해 듣던 그들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만지면 깨질세라, 그렇게 그들은 천천히 입을 맞대었다. 키스라기 보다는 그저 살짝 입술을 맞댄다는 정도의 느낌.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입맞춤이 아닌 확인이었다. 서로의 마음에 서로를 담아두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그런 서약인 것이다.
“이제는 그만 저와 함께 해주시죠.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유혈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형진의 말에 아란은 눈을 흘겼다.
“뭐에요, 그게. 협박도 아니고.”
“협박 맞습니다.”
“정말요?”
“네. 전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냥 가끔 만나는 사이로 만족하려고도 해봤지만, 역시 이렇게 마주하니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협박인건가요? 폐하.”
“네.”
아란은 가만히 그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이렇게 답했다.
“실은, 저 한 가지 더 고백할 게 있어요.”
“뭐죠?”
잠시 머뭇거리던 아란은 한 가지 사실을 털어 놓았다.
“사실은… 저 실업자 되어버렸어요.”
“네? 그게 무슨…”
실업자라니.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가 싶어 형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란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실은 공포와 죽음께서 절 지부장 자리에서 내쫓아 버리셨어요.”
“정말요?”
“네. 너처럼 바보 같이 다치기나 하는 녀석은 지부장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시네요.”
“허어…”
지부장이 해고될 수도 있는 자리였나. 그럼 그란웰 지부는 누가 맡게 되는 거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자니, 문득 아란이 다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아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말했다.
“이래봬도 가사 경력은 꽤 되거든요. 요리도 전문가 수준은 되고. 게다가 아이를 돌보는 것도 자신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를 당신의 시녀장으로 삼아주세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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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그럼 아침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