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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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약정
당연한 얘기지만 세 여신의 데뷔 라이브는 허세와 망상 역시 관람했다.
“푸헙!”
“으앗! 갑자기 뭐에요!”
한숨을 섞어가며 ‘하늘’호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던 허세와 망상은 세 여신이 나와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에 그대로 입에 머금고 있던 우유를 뿜어버렸고, 덕분에 그를 가슴골에 끼워넣고 있던 아유무의 옷섶은 완전히 젖어버리고 말았다.
“아이 참. 우유는 가만 놔두면 냄새 난단 말이에요.”
“미, 미안…”
투덜거리며 입고 있던 셔츠를 벗고 새옷으로 갈아입었지만, 허세와 망상은 그녀의 속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계속 텔레비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착각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다시 봐도 틀림없었다. 지금 화면에 나오고 있는 세 꼬맹이들은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존재가 분명했다.
“누가 아저씨 아니랄까봐. 하지만 좀 의외네요. 저런 거 별로 안 좋아했잖아요.”
“그게…”
“셋 중에 어느 쪽이 취향인 거에요? 귀여운 쪽? 섹시한 쪽? 음침한 쪽?”
뭔가 참고라도 될까 싶었던지 아유무는 그렇게 물어온다.
“그런 거 아니야.”
“에이, 부끄러워 하기는. 괜찮아요. 저라면 어떤 분위기든 맞춰줄 수 있으니까, 한 번 말해 봐요. 네?”
도대체 이 여자애는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길래 머리 속이 이런 식으로 꽃밭인 건지. 허세와 망상은 속으로 혀를 찼지만, 어쨌든 현재 자신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것이 그녀이니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알던 얼굴이 갑자기 나와서 놀란 것 뿐이야.”
“알던 얼굴? 저 세 명이?”
“그래.”
“흐음…”
아유무의 눈이 가늘어지며 텔레비전으로 향한다.
“쳇. 저런 거 다 화면빨에 조명빨에 화장빨이라고요. 딱 보니까 별 것도 아니구만.”
“아, 그러세요.”
“뭐에요. 그 대답은! 게다가 저것 좀 봐요. 아우, 일부러 귀염 떠는 거 가증스러워.”
“…”
허세와 망상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지금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하든 스위치가 들어가 버린 아유무의 질투 본능을 자극할 뿐이란 걸 이해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허세와 망상의 입장에서는 지금 저렇게 세 꼬맹이들이 웃기지도 않는 꼴로 모습을 드러낸 건 절대로 가볍게 여기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가능성 첫 번째. 뭔가 약점을 잡혀서 저런 웃기지도 않는 모습을 하고 사람들 앞에 어릿광대 꼴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여신인데, 자존심도 없나 싶은 생각과 함께 가장 먼저 든 의심이다.
하지만 분위기를 봐서는 강제로 저런 꼴이 된 건 아닌 것 같다. 보호와 균형의 의존증은 꽤 유명하고, 뭔가에 홀딱 빠지면 있는 거 없는 거 앞뒤 안 가리고 전부 들이붓는 것도 꽤 유명하다. 하지만 보호와 균형은 그렇다 치고, 다른 두 여신은 어떻게 된 건가. 꽃과 바람은 그렇다 쳐도, 황혼과 망각은 은둔형 외톨이라 어지간해서는 바깥출입을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서 떠올린 두 번째 가능성. 뭔가의 이유로 여신들이 한데 손을 잡고 힘을 합친 건 아닐까.
저 범선들부터 그렇다. 보호의 성역이나, 바람의 권능이나, 황혼의 결계 같은 건 마법으로도 따라잡기 힘든 그녀들의 고유한 권능이다. 비록 지금까지는 지닌바 힘이 미약해서 별로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신앙이나 공헌도를 수급하고 과하지 않은 수준으로 활용할 방법만 찾을 수 있다면 다른 강대한 신들에 버금가는 위력을 보여줄 수도 있다. 사실 신이 지닌 권능이란 것이 결국은 다 그런 식이긴 하지만.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허세와 망상은 문득 그녀들의 노래로부터 전해지는 은은한 권능의 힘을 인식했다.
“이건… 설마?”
“뭐에요! 사람이 말하는데 딴청이나 부리고!”
“아유무.”
“네?”
“저 노래 따라불러봐.”
“제가요?”
“그래.”
아유무는 입을 삐죽거리며 싫은 표정을 짓다가, 허세와 망상이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리며 여신들의 노래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던 건가.”
“뭐가요?”
아유무가 그렇게 물었지만, 허세와 망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혀를 차며 화면을 노려볼 뿐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 텔레비전은 평범한 기계다. 엘리시온이 지닌 번역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지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기계. 그런데도 지금 여신들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허세와 망상이 아유무에게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킨 것은 그것을 확인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 결과는 역시나. 아유무는 그녀 자신이 가장 익숙하게 사용하는 언어인 일본어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여신들이 신어를 사용해 노래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신어는 다시 말해 신들의 언어다. 이것은 음성으로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심상을 통해 전달되는 언어다. 엘리시온의 번역 기능은 사실상 이 신어를 중간 매개체로 해서 듣는 이의 마음속에 가장 익숙한 형태의 언어로 구체화되도록 도움을 주는 기능으로 정의할 수 있다. 때문에 번역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변환 과정을 수행할 매개체를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신어는 그런 과정이 없이 바로 심상이 전달되는 식이므로 굳이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신어 자체가 의미의 혼동 없이 인간에게 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젠장… 난리가 나겠군.”
“네? 뭐가요?”
“그런 게 있어.”
허세와 망상은 혀를 찼다.
당연한 얘기지만 결국 신어도 권능이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다른 모든 권능과 마찬가지로 체험할 수는 있어도 분석은 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이 세 꼬맹이들이 일반적인 존재가 아님을 증명하는 일이나 다름 없다.
물론 앞서 벌인 전투에서 미라지 코어가 공포와 죽음이라는 신과 연관이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다른 신들마저 아무렇게나 드러내 보여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 세계에는 많은 종교가 있다. 타나토스처럼 신들이 실질적인 권능 같은 걸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그것은 지구라는 세계를 구성하는 커다란 요소 중에 하나다. 하지만 이제는 바뀔 수밖에 없다. 공포와 죽음을 비롯해, 저 세 꼬맹이들까지 나타나 버렸으니 기존의 종교 질서는 강제적으로 큰 변혁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허세와 망상이 지구의 인간이나 그들이 일궈놓은 문화, 그리고 사회 같은 것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것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상황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품는 건 아니다. 단지, 자신은 혹시나 공포와 죽음 같은 다른 신들에게 꼬투리를 잡힐까 싶어 쉽게 건드리지 못했던 것을 저들이 너무나도 부럽고 짜증이 나는 것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전부 희망과 생명 때문이다. 그녀의 눈치만 보지 않았어도 이미 이 세상은 자신의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엘리시온을 만든 것 자체가 그녀가 보유한 신앙이나 공헌도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순간에 발목을 잡는 족쇄 역할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또다시 남탓을 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허세와 망상은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어쨌든 저 세 꼬맹이들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상 공포와 죽음이 저들을 먹어치운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인이 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도대체 희망과 생명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상황이 될 정도라면, 그녀 역시 나타나 존재감을 보여야 옳은 것이 아닌가. 그녀가 지닌 힘이라면 지금의 상황을 뒤집어엎는 것도 가능할 텐데,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하아…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왕성 라이언하트에 자리 잡은 방 한쪽에서, 유아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태어날 아기를 위한 옷을 짜고 있었다. 허세와 망상이 궁금해 하는, 지닌 바 힘만이라면 다른 어떤 신에게도 지지 않는다 일컬어지는 강력한 여신은 자신이 뱉은 말로 인해 성녀의 몸 안에 그렇게 감금당해 있는 상태였다.
희망과 생명은 방 한쪽을 장식한, 텔레비전을 흉내 낸 마법 도구로부터 흘러나오는 세 꼬맹이 여신들의 영상을 보며 탄식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때, 형진이 방 안에 들어온다. 그의 손에는 먹음직스럽고 정갈한 음식들이 쟁반 가득 담겨져 있었다. 희망과 생명은 자시도 모르게 유아의 후각을 통해 전해지는 그 냄새에 반응했다가 이내 흠칫 놀라고 말았다.
[크윽… 이 나쁜 놈…]은연중에 자신을 이런 식으로 길들여가고 있는 형진을 향해 희망과 생명은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느낌으로 욕을 했지만, 그는 그런 여신의 목소리 따위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유아의 옆자리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 놓고는 가만히 유아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어때. 잘 되어가?”
“네. 덕분에요.”
유아는 방긋 웃으며 답했지만, 이내 테이블 위에 놓여진 음식들을 보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다 돼지 되겠어요. 봐요. 전달에 비해 이만큼이나 살이 쪄버렸다구요.”
자신의 볼따구를 잡으며 그렇게 말하는 유아의 모습에 형진은 키득거리며 귀엽다는 듯이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이씨… 나쁜 놈아. 들은 척이라도 하란 말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내버려 둘 거냐고!]그냥 완전히 방치되어 버리는 거라면 오히려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아가 느끼는 감각이나 감정 같은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야만 하니 더 미칠 지경이다. 지금만 하더라도 형진의 부드러운 손길이 피부에 와닿는 것만으로도 전해지는 행복감을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시간이 지나게 되면 유아를 통해 출산의 느낌마저 그대로 경험해 버릴 지도 모른다. 출산 경험을 가진 여신이라니.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인가.
이건 어떻게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방식보다도 악랄한 세뇌에 가깝다. 게다가 만약 저 나쁜 놈이 신위를 얻고 그에 의해 유아가 반신의 지위를 얻기라도 하는 날에는 희망과 생명은 영원히 그녀의 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릴 지도 모른다.
[씨이… 영화 스케줄 잡힌 거 다 날아갔겠네…]푸념 섞어 희망과 생명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지금까지 무시로 일관하던 형진에게서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희망과 생명은 너무나 오랜 만에 형진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자 거의 무조건 반사처럼 그의 말에 반색하려다가 급히 헛기침을 하며 그런 반응을 억눌렀다.
[몰라. 말 안 해. 어차피 말해도 소용없잖아. 칫. 내가 그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투덜거리긴 했어도, 형진의 한 마디에 이렇게 길게 대답을 해버린 시점에서 이미 교환비가 말도 안 될 정도로 손해가 나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내심을 다 털어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나 할까.
[호오, 당신께서도 저쪽 세계에서 그냥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겁니까? 이건 좀 놀랍군요.]형진의 말에 희망과 생명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알면 놀랄 걸?] [그렇습니까.] [물론이지. 내가 알고 보면 저쪽 세계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였다고. 저런 꼬맹이들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당연한 얘기지만 권능 같은 것도 안쓰고 순수하게 내 실력으로 일군 거라고.] [그건 또 놀라운 일이로군요.]형진은 그렇게 말을 붙이며 느긋하게 정보를 모았다. 사실 이쯤 되면 다 털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희망과 생명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힌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유아의 몸에 봉인된 시점에서 갑자기 활동을 멈추고 행방불명된 세계구급 스타를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희망과 생명에게 말을 붙이면서 분신을 통해 요안나에게 해당 정보에 부합하는 인물을 찾아보게 했고,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아 희망과 생명이 지니고 있던 지구에서의 신분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뭐야. 희망과 생명이 이 여자였어?”
희망과 생명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형진은 요안나가 내민 하나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다. 아이돌이니 여배우니 하는 사람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던, 타나토스에 오기 전의 형진조차 그 이름과 얼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던 인물이 그 사진 속에서 방긋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헐리웃의 여신, 엘피스 리페 에스페란토. 설마 이 여자가 희망과 생명이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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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편안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