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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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상봉
뭔가 이상하다. 새로운 파편의 힘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이나 위압감을 느끼지 않고 있는 듯한 구현자들의 모습에서 형진은 기이한 어긋남을 느꼈다.
하엘만 하더라도 그가 파편의 힘을 늘려갈수록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의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구현자이기에, 자신이 섬기는 신의 기운을 그에게서 느끼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런데 이들은 뭔가 다르다. 파편의 힘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있는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놈들의 기운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놈들의 몸에서 붉게 피어오르던 불꽃이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 느낌, 낯설지가 않다.
[설마… 그럴 리가!]그때, 어디선가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공포와 죽음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단순히 놀람 가득한 목소리를 넘어, 경악으로 물들어 버린 듯한 목소리다. 적어도 형진은 공포와 죽음이 이런 식으로 그 목소리에 감정을 담아 외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크후으…]탄산음료를 배터지게 먹고 속에서 끓어오르는 더부룩함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가스를 입 밖으로 토해내는 듯한 그런 소리를 내뱉으며, 문득 구현자 가운데 하나가 그를 향해 공격을 가한다.
“흥.”
형진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는 흑요호의 기운을 일으켜 그 공격을 맞받았다. 상대의 공격의 맥을 짚어 그것 자체를 무효화시키는 인스턴트 킬을 발동한 것이다.
꽝!
그러자 격렬한 폭발과 함께 형진은 물론이고 공격을 가한 자 또한 여파에 휘말려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본래대로라면 공격이 소멸하면서 공격자를 경직시켜야만 하는데 기이하게도 강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형진마저 뒤로 물러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역시 이들은 뭔가 다르다.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자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일단 물러나 있도록.”
형진의 말이 떨어지자, 미나는 사족을 붙이지 않고 아사드를 들쳐 업은 채 그가 열어준 공간의 경계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추었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나 아사드가 곁에 있어봐야 짐 밖에 되지 않음을 이해한 것이다.
[크후하…]하지만 구현자들은 미나와 아사드에게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일제히 형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꽝! 꽈광!
벼락이 내려치는 듯한 폭음과 함께 다시금 그들의 공격이 무효화되었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지금까지 수없이 인스턴트 킬을 써봤지만 이런 식으로 반동이 돌아오는 경우는 처음이다.
[역시…]공포와 죽음으로부터 다시금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가 전해진다. 영문 모를 일이지만, 여신은 지금 이 순간 큰 충격을 받은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훌륭해. 기다린 보람이 있어.] “뭐?”이번엔 다시 구현자로부터 목소리가 전해졌다. 그것을 들은 형진은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 그와 마주하고 있는 구현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바타가 되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를 전하는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아바타는 아니다. 구현자들은 만들어진 육체인 아바타와는 다른, 순수한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강림? 그것도 여럿을 동시에?”
신의 강림과는 뭔가 다르다. 신위를 한껏 드러내며 그 존재감을 유감없이 세상에 흩뿌리는 그런 식의 강림이 아니라, 희망과 생명이 여배우 노릇을 할 때처럼 존재감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은밀하게 인간 사회에 섞인 듯한 그런 느낌.
[크후흐… 흐흐흐…]따로 조치가 필요하긴 했지만 아직 신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형진조차 아바타를 동시에 여럿 다룰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대가 아바타 대신 인간의 육체를 써서 비슷한 행동을 했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다. 현재의 파괴와 재생은 파편으로 흩어져 사념만 남은 것이 아니었나. 어째서 이미 몇 개나 파편을 회수한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는 것인가.
[내 실수다.]그런 형진의 생각에 답하듯, 공포와 죽음이 중얼거렸다.
[무슨 뜻입니까.]쏟아지는 구현자들의 공격을 견뎌내며 형진이 묻자 공포와 죽음은 분노와 함께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했다.
[놈은 선을 넘었다. 신으로서 해서는 안 될… 금단의 영역에 손을 대고 말았다.]금단의 영역이라니. 그런 것이 존재했던가. 나름 신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여겼던 형진으로서도 이런 얘기는 처음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꿔 말하자면 온전히 신위를 가진 자가 아닌 보통의 인간이 접근해서는 안 되는, 그만큼 중대한 일이란 뜻도 된다.
꽝!
[크허억!]
[인스턴트 킬! ‘파괴와 재생의 스폰’이 죽었습니다.]
흑요호의 기운이 육체를 짓이기며 파고들어가는 순간 상대가 지닌 힘과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며 폭발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다행히 인스턴트 킬이 터지기는 했지만, 형진 역시 그 반동에 잠시 경직 상태가 되어 버렸다.
“?…”
인스턴트 킬을 성공시키고도 오히려 경직이 걸리다니. 이건 뭔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됐다.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다시금 공포와 죽음의 속삭임이 들려온다.
[가세하겠다.] [네?]가세라니.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싶어 어리둥절해 하는 것도 잠시, 형진은 이내 자신의 몸에 알 수 없는 힘이 충만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미 희망과 생명의 힘을 끌어다 쓰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신의 힘이 육체 안에 치밀어 오를 때의 감각을 대략이나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희망과 생명의 힘을 끌어 쓸 때는 문자 그대로 어딘가에서 전기선을 강제로 끌어와 힘을 충당하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그의 세포 하나 하나가 알알이 끓어오르는 그런 느낌이었다.
단순히 힘을 끌어오는 수준을 넘어, 힘 그 자체에 동화되는 느낌인 것이다.
[오오오! 나의 누이여!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상대 역시 그것을 눈치 챈 것인지 그렇게 외쳤다.
[닥쳐!]그러자 공포와 죽음 역시 바로 응대했다. 형진의 입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전체를 스피커로 활용하는 듯한 그런 외침이다.
[큭큭큭… 그래. 나는 이런 순간을 기다려 왔지. 오붓하다 못해 살벌해서 미칠 것 같은 상봉의 순간을. 서로의 명줄을 끊기 위해 힘을 터트리며 나누는 아름다운 대화의 순간을!] [그 더러운 입, 닥쳐라!]공포와 죽음의 힘이 몸 안에 끓어 넘치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몸을 다루는 것은 여전히 형진의 의지였다.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그의 육신이 더 빠르고 더 강해졌으며 앞서와 같은 힘의 폭발에서도 더 이상 경직 상태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다는 정도. 물론, 그것은 지금과 같은 싸움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점이다.
꽈광!
[크하아아…]
[인스턴트 킬! ‘파괴와 재생의 스폰’이 죽었습니다.]
또 한 명의 구현자가 형진의 손에 소멸했지만, 상대는 별로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형진 역시 몸 안에 충만한 공포와 죽음의 힘 덕분에 앞서와 달리 경직 상태에 빠지지 않고 다른 구현자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나 영문도 모른 채 지금 같은 싸움을 이어갈 수는 없는 일. 어느 정도 구현자들을 상대하는 일에 여유가 생기자 형진은 공포와 죽음에게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건…]공포와 죽음은 잠시 망설였다. 금기에 대해 입에 담는 것조차 그녀로서는 쉽지 않은 일. 하지만 형진이 구현자들과의 전투를 이어가며 조용히 기다리자, 그 소리 없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신의 힘이… 거느린 인간의 수와 비례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형진이 굳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생활권을 우주로 확대하려는 이유도 결국 그래서다. 지구 하나만이라면 백억이 한계지만, 우주로 뻗어 나가면 그곳에 살고 있던 수는 그 몇 배로 불어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렇게 불어난 인간의 수는 온전히 그들을 거느린 신의 힘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사실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다툴 수 밖에 없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라 그들을 거느린 신도 마찬가지다. 지구의 인구는 충분히 많고, 지금 그와 관련된 신들이 신도와 추종자들을 한껏 받아들여도 충분한 정도.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러하듯 그 또한 언젠가 한계가 찾아오고 서로 더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한 투쟁이 시작되게 마련이다.
굳이 신들이 토너먼트 같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때문이 아닌가. 먼 훗날이 될지, 아니면 바로 얼마 지나지 않은 가까운 미래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인간들과의 정당한 교류와 신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그것을 확보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관점을 살짝 바꿔보면 이 모든 것을 보다 손쉽게 획득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 스스로 언데드의 영역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타락이라고 부른다.] [네?]언데드라니. 그것도 신 스스로?
[지구의 인간들이 생각해낸 개념 가운데 반물질이라는 것이 있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언데드란 결국 영적으로 현실 세계의 반대에 놓인 자들을 말한다. 이쪽의 삶이 그쪽에는 죽음이고, 그쪽의 죽음이 이쪽에서는 삶이 되는 형국이지. 저들이 사기에 이끌려 이 세상에 출현하는 것 또한 결국은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생기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허…] [그러면 여기서 문제, 과연 저 언데드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공포와 죽음의 말에 형진은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언데드는 단순히 사기라는 형태의 기운을 통해 만들어 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형진이 인지할 수 없는 다른 세계로부터 사기에 이끌려 찾아오는 존재인 셈이다.
그렇게 언데드로 가득 차 있는 세계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곳은 인간들이 말하는 죽음으로 가득한 세계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곳의 신이 넘어가 그곳을 장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꽝!
[크흐흐흐… 이거야. 바로 이거야!]
[인스턴트 킬! ‘파괴와 재생의 스폰’이 죽었습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구현자들이 미친놈이 된 이유,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저편에서 기다리는 자신들의 신과 만나는 수단일 뿐이다.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구현자들에게 전해져 왔던 교리가 아닐 수도 있다. 간단한 예로, 하엘은 다소 폭주하는 경향이 있기는 해도 지금 형진이 상대하고 있는 이들처럼 불꽃에 몸을 맡겨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녀가 구현자가 될 당시만 해도, 구현자들의 교단은 나름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정상적인 사람이 보기에, 자신의 몸을 태워 불멸을 얻는다는 식의 교리는 그저 미친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신을 통해 그 방법에 도달했고, 자신의 신이 말하는 대로 그것을 따르며 이렇게 스스로를 죽음으로 밀어 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미친…”
신들이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르며 미친 짓으로 규정하는 이유도 명확하다. 만약 모든 신들이 이런 식의 행동을 보인다면, 이 세계는 모든 법칙이 붕괴된 채 저쪽의 세계와 합쳐지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다. 물질이 반물질과 부딪혀 쌍소멸을 이루듯, 그것은 어느 한쪽의 승리가 아닌 두 세계 모두의 파멸로 이어질 터. 이것을 미친 짓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한단 말인가.
그것을 깨닫자 공포와 죽음이 굳이 보호와 균형 같은 다른 신들을 그에게 소개시켜 준 이유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놔뒀다면 자신이 독차지 할 수 있었던 파이의 몫을 나눈 이유는, 그들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내딛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의도였던 것이다. 고독에 사무쳐, 힘이라는 달콤한 과실에 유혹 당해 언데드의 영역에 손을 담그는 신이 나오지 않도록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미처 몰랐다. 자신이 가장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한 존재가 이미 그녀의 눈을 피해 금단의 영역에 발을 내딛어 버렸다는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즐점하세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