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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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협상
형진을 제외하고, 허세와 망상이 찾은 파편의 수는 모두 넷. 그 중 잭 더 리퍼는 형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으며, 아사드 역시 파편을 빼앗긴 채 왕성 라이언하트에 머무르고 있다. 남은 것은 일본 출신의 여고생 나츠키 아유무와, 나미비아 헤레로족 출신 남성 아라카이 실바. 그중에서 나미비아 태생의 남성인 아라카이 실바는 현재 중국에서 보호하고 있는데, 행적이 발견된 이후로 계속해서 은밀히 동태를 살펴보고 있는 중이지만 허세와 망상이 접촉하는 동향은 발견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이 여자애가 유력하다는 거군.”
“네. 자금 추적을 해본 결과 차명 계좌를 통해 생활비를 지급 받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 또한 외국계 페이퍼 컴퍼니 소유로 되어 있어요.”
“그거… 굉장히 수상하군.”
허세와 망상은 형진과의 충돌 이후 그나마 모아두었던 신앙과 공헌도를 대부분 잃고 신격마저 손상을 입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스스로 움직이기도 힘든 일이니, 엘리시온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면 추종자를 손발 삼아 지내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좋아. 그렇다면 시간 끌 필요가 없지. 바로 확인해 봐야겠군.”
“직접 가시려고요?”
“한때는 대신으로 불리던 존재야.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준비해 두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이 움직이는 편이 맞아. 그 여고생이 파편의 힘에 어떤 식으로 눈떴을지도 알 수 없으니, 그것 역시 감안해야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마주하는 자의 격이 떨어진다고 느끼면 자존심을 자극할 수도 있는 일이야.”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요.”
형진은 요안나를 대동한 채 곧바로 일본으로 향했다.
“주소 확인 되었습니다. 안내할게요.”
“부탁해.”
요안나는 지도 정보를 확인해 아유무가 머물고 있는 맨션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형진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일본의 주거형 부동산은 크게 아파트, 맨션, 단독주택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다만 개념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일본의 아파트는 한국의 다세대 주택이나 빌라와 같은 저층형 공동주택 개념과 비슷하고, 맨션은 한국의 아파트나 오피스텔 같은 고층형 공동주택 개념과 비슷하다. 또는 골조나 가구수로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느 쪽이든 맨션 쪽이 더 크고 비싸다는 식으로 인식된다.
아유무가 머물고 있는 맨션은 그 중에서도 꽤 고급에 속하는 것으로서 한국식으로 치면 실면적이 약 33평 정도에 해당하는 곳이다. 전세가 없는 일본의 특성상 월세로 살게 되는데, 한 달 임대료만 약 300만원에 해당한다. 평범한 가출 여고생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주거인 셈이다.
은신과 잠행으로 간단하게 보안 설비를 무력화시키고 건물 안으로 진입한 두 사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나츠키 아유무가 머물고 있는 곳 현관에 도착했다.
따로 마법 등의 보안 설비를 심어두지 않았을까 싶어 살펴보았지만, 딱히 별다른 흔적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형진과 요안나는 다시금 이동 스킬을 써서 간단히 문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아이 참! 가만히 좀 있으라니까요.”
“큭… 이, 이 녀석… 내가 누군줄 알아?”
“알아요. 위대하신 신님이잖아요. 알았으니까 머리 감을 동안은 좀 가만히 있으라구요.”
“크흐…”
그런데 들어와 보니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욕실에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하실래요?]형진은 잠시 욕실 안의 상황을 여러 가지 감각을 동원해 대충 살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기다리도록 하지. 지금 문을 열고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실례일 것 같으니까.] [네.]형진과 요안나는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예상보다 방 안은 꽤 잘 정돈이 되어 있었는데, 한쪽에는 꼬맹이 모습의 허세와 망상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안은 채 밝게 웃고 있는 여고생의 큼지막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건 좀 의외인데.] [그러게요.]아무리 봐도 긴장감 같은 것은 느끼기 힘든 모습. 차라리 신혼집이라고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 분위기라고나 할까. 구석에 숨어서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를 다짐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영 예상이나 기대와는 어긋난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고 있자니, 마침내 욕실의 문이 달칵 열리며 인기척이 들려온다.
“자아, 이렇게 함께 씻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그렇죠?”
“내가 몸만 정상이었어도…”
“네네. 알았어요. 그럼 시원하게 목욕도 끝냈으니 아까 사온 맛있는 푸딩…”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아 올리고 커다란 바스타올로 몸을 가린 여고생과, 의외로 풍만한 그녀의 가슴골에 끼인 채 굴욕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던 허세와 망상은 거실로 들어서다가 흠칫하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언제 들어왔는지조차 모를 낯선 남녀가 태연하게 거실 소파를 차지한 채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그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형진은 그런 둘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바쁘신 것 같아서 먼저 이렇게 자리를 잡고 기다리던 중입니다. 허세와 망상님, 절 기억하십니까?”
“넌…”
모를 리가 없다. 지금 자신이 이런 맹한 계집애의 가슴골에 끼인 채 굴욕을 당하고 있는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를 어찌 알아보지 못하겠는가.
“신님. 혹시… 아는 분?”
“일단은.”
허세와 망상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발각될 수도 있다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만남이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탓이다.
“일단… 이 상태로는 대화를 하기 힘드니 아가씨는 옷부터 챙겨 입는 편이 좋겠군요.”
“가, 감사합니다.”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아유무는 몸을 움츠린 채로 인사를 한 뒤 얼른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 편… 아니죠?”
머리 속은 꽃밭이라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날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 그럼… 큰 일 난 거 아니에요?”
“맞아.”
순순히 긍정의 뜻을 표하는 허세와 망상의 모습에 아유무는 어쩔 줄 몰라했다.
“어쩌죠? 그럼 잡히면 안 되잖아요.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지 않아요?”
하지만 허세와 망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렇게 발각된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왜요? 신님보다 세요?”
“현재로선. 너도 뉴스에서 몇 번 봤지? 저 녀석… 너희들이 죽음의 천사라고 부르는 그 녀석이야.”
“헉! 정말요?”
미국 쪽에서 주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탓에 아유무는 지금까지 죽음의 천사가 영락없이 서양인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건 그녀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 우리 이제 죽는 건가요?”
“그건 모르겠군. 하지만 저 녀석에게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눠볼 틈도 없이 이미 죽어버렸겠지.”
“그 정도로… 강한 거군요.”
옷을 챙겨 입으라고 이렇게 시간을 준 것만으로도 상대가 얼마나 여유로운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아유무는 잠시 입술을 깨문 채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얼른 옷장에서 옷을 꺼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에 허세와 망상 앞에서 보란 듯이 입어보이던 나풀 거리는 옷이 아니라, 활동성이 강하고 동작이 자유로운 캐주얼한 복장이다.
“너… 설마 저 녀석과 싸울 셈이냐.”
“아뇨.”
“그럼?”
“함께 온 여자분을 보니 제 미모로는 미인계를 쓰기도 어려울 것 같고, 여차하면 도망이라도 쳐봐야죠.”
“힘들텐데.”
“그렇다고 가만히 목을 내밀고 죽여달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
허세와 망상은 그런 아유무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거실에서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 형진의 모습을 본 순간 허세와 망상은 다 끝났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온전한 상태에서도 이기지 못했던 존재를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맞닥뜨렸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아유무는 이 와중에도 여차하면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다. 뻔히 상대가 그 유명한 죽음의 천사임을 알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아무리 그래도 너 같이 철 모르는 여자애까지 마구잡이로 죽일 녀석들은 아니니까.”
“정말요?”
“정말로.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 녀석들도 아무나 막 죽이고 그러지는 않거든.”
“그런가요.”
아유무는 옷을 마저 챙겨 입고, 허세와 망상이 옷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생각한 모양인지 표정과 손놀림이 평소와는 다르게 경건하기까지 하다.그렇게 옷을 챙겨 입은 둘이 거실로 나오자, 형진은 테이블에 간단하게 먹을 거리를 차려 놓은 채 그들을 맞이했다.
“앉으시지요. 기다리기 무료해서 간단하게 음식을 좀 마련해 봤습니다.”
“세상에…”
잔뜩 경계한 표정으로 방을 나왔던 아유무는 눈앞에 차려진 호화롭고 찬란하기까지 한 그 음식들의 모습과 향기에 취해 한 순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이거… 누가…”
“요리 말입니까? 물론 제가 했습니다.”
“세상에…”
아유무는 방금 전까지 잔뜩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 거짓말이기라도 한 것처럼 두눈에서 하트를 발하며 형진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잘 보니 키도 제법 크고 몸매도 그럭저럭 괜찮다. 동양인이 분명한 외모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주위를 복종시키는 기이한 위압감마저 풍기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눈을 뗄 수가 없는데 이런 멋진 요리까지 손수 마련하는 세심함까지 갖추다니. 정말 꿈에서나 볼까 싶은 남자가 아닌가.
“크흠. 그래. 나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허세와 망상은 옷을 챙겨 입을 때까지만 해도 비장함마저 풍기고 있었던 주제에 순식간에 태도가 변해버린 아유무의 모습에 혀를 차며 일단 그렇게 얘기를 꺼냈다.
형진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간단한 얘깁니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싸움은 이만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미 승부는 판가름 난 것이나 다름없는데 굳이 여기서 더 싸움을 이어가야 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음…”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 드는 형진의 말에 허세와 망상은 역시나 하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억지로 아유무의 도움을 받으며 머무르고 있기는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도저히 반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마지막 희망이었던 토너먼트 역시, 필요한 인원조차 채우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는 실행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 이대로 간단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게다가, 패배를 선언하는 순간 공포와 죽음이 자신을 가만히 놔둘까 싶은 것도 사실이고.
“싫다면?”
형진은 서서히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다.
“지금 상황에서조차 승복하지 못하신다면, 저희들로서는 허세와 망상께서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생각?”
“이를테면, 금기를 어겨서라도 이 상황을 반전시켜 보겠다든가 하는 식으로.”
“그, 그건.”
금기라는 말에 아유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요안나 역시 속으로 고개를 가웃거렸다.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지 못한 둘과는 달리 허세와 망상은 순간 가슴 속에 말뚝이 쿡 하고 들어와 박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날 어떻게 보고.”
사실 이전에 한 번 그런 생각을 떠올린 것은 사실이었기에, 더욱 그 말이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형진은 허세와 망상의 태도를 보고 어렵지 않게 그와 같은 정황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판세를 뒤집을 만한 방법은 그것뿐이지 않습니까.”
“크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여러모로 불행한 사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 허세와 망상께 말씀을 드리는 것이기도 하고요.”
형진은 현재 타나토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것은 일단 계약을 맺고 나서 설명해도 된다. 지금 미리 말해봐야 허세와 망상의 입지만 키워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리 없는 허세와 망상은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형진의 말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잠시 끙끙거리며 고민하던 허세와 망상은, 자신이 더 이상 빠져 나갈 수 없는 외통수에 걸렸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허탈한 기분마저 느끼며 형진에게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후우우… 내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건가.”
형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읽어 보시고, 서명 부탁드리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