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565
00565 128. 정리 =========================
풀린 표정을 지은 채 꿈결을 노닐고 있던 힐리에타는 얼른 정신을 다잡고 진지하게 형진의 말에 답했다.
“대, 대단해요. 아니, 훌륭해요.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고는 이내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 버린다.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라니, 어째서 이 순간 이 말이 이토록 외설스럽게 들려오는 것일까.
“그래? 다행이군. 이곳 사람들의 입맛은 어떨지 몰라 걱정했는데.”
형진은 그렇게 말하며 차와 함께 먹을 간단한 다과를 꺼내놓았다. 물론 이 간단한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그의 입장에서 표현된 말이고, 지금껏 뭔가를 먹는 다는 행위 자체를 해본 적이 없는 힐리에타로서는 테이블에 놓인 이런 저런 음식들의 모습과 향기만으로도 이미 혼이 달아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이건… 뭐죠?”
“차에 곁들이는 과자. 먹어봐.”
형진의 말에 힐레이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노릇한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지어든 것은 견과류로 토핑한 버터 쿠키. 잠시 손에 든 그것을 죽일 듯이 바라보던 힐리에타는 눈을 질끈 감고는 그것을 입 안에 넣었다.
“아…”
어쩜 좋아.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때려 잡으러 가기 직전의 모습이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지며 발그레하니 상기되어 버린다. 마치 꽃밭 가운데서 오후의 따뜻한 햇빛을 쬐고 있는 나른한 표정의 고양이 같다고 해야 하나.
“킥.”
이런 극적인 리액션을 보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라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랄까. 이런 식으로 먹는 사람의 반응을 보는 것도 요리를 하는 즐거움이 아닐까. 형진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며 이제부터 만나게 될 노스페라투들에 대한 간단한 정보를 캐기 시작했다.
한편, 즈라탈과 렐그낙은 노스페라투들에게 연락을 보내 그들을 긴급히 소집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형진은 단순히 오래된 자들을 불러 모으라고만 했지만, 그들은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미 잘 이해하고 있었다.
노스페라투 가운데서도 하위에 불과한 즈라탈이 만약 이런 연락을 보냈다면, 대부분의 고귀한 자들은 콧방귀를 뀌며 들은 척도 않거나 오더라도 시간이 꽤나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노스페라투이며, 이제는 파괴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은 성전의 수호자이고, 또한 ‘가장 오래된 자’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렐그낙의 말까지 무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는 성전에 처박혀 그곳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실제로 권한을 사용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나, 렐그낙의 말은 사실상 ‘가장 오래된 자’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허겁지겁 공간을 넘어 노스페라투들이 즈라탈의 저택에 모여들었다. 한참 애첩들과 히히덕거리다 온 자들도 있고, 영지를 관리하는 일에 골몰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가 연락을 받고 급하게 달려온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누구도 이제부터 자신들이 겪어야만 하는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지스크 대공에게 뭔 일이 생겼다는 것 같던데, 그래서 그런가?”
“지스크 대공? 그런 일이 있었어?”
“나도 잘은 모르는데… 듣기로는…”
그나마 소식이 빠른 이들은 지스크 대공의 실종이라든가, 즈라탈의 딸 힐리에타의 납치 같은 얘기를 조심스럽게 거론하며 그것과 관련된 일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놓았다. 노스페라투가 둘이나 연관된 일이라면, 확실히 ‘가장 오래된 자’께서 오랜 침묵을 깰 만한 일이라 생각하면서.
마침내 그렇게 모든 노스페라투들이 집결하는 일이 끝나자, 즈라칼과 렐그낙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뭔가 묘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그들이 분명히 맞긴 한데, 묘하게 분위기가 다르다. 거슬린다고 해야 하나, 눈이 부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들중 누구도 설마 이 두 명의 노스페라투의 근원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채워졌으리라 생각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고작해야 뭔가 심각한 상황 때문에 그들의 안색이 나빠 보이는 것이겠거니 싶은 생각을 떠올리는 정도가 고작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다른 세계로부터 침공을 받은 적 없이, 오래된 자들만의 지배 체계에 대한 도전조차 받지 않고 지내온 폐해일 수도 있었다. 그들의 주인인 ‘가장 오래된 자’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역시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최소한의 경각심마저 무장해제 되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급한 연락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달려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호명하는 분들부터 한 명씩 여기 계신 렐그낙 님을 따라가시면 됩니다. 번거롭다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중요한 절차이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즈라탈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이제부터 시작될 형진과의 일대일 면담은 이 세계의 지배체제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릴 아주 중요한 절차였으니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노스페라투들은 혹시 지금 이곳에 ‘가장 오래된 자’가 와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최초의 노스페라투 렐그낙의 안내를 받아 가며 치러야할 만큼 중요한 절차라는 건 ‘가장 오래된 자’에 대한 인사 정도밖에 없었다.
사실 이 자리에 모인 대부분의 노스페라투들은 즈라탈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오래된 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설령 만나봤다 할지라도 상대의 얼굴 같은 걸 정확하게 마주한 것도 아니다. 그저 빛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음성이나 존재감을 마주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가장 오래된 자’는 지배하는 자들과 너무 친숙하게 지내면 스스로의 권위를 좀먹는다 생각하는 쪽이었고, 그래서 과할 정도의 신비주의와 권위주위로 치장하고 있었다. 설마 그것이 이런 식으로 악용될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노스페라투 은가즈 대공.”
“여기.”
노스페라투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대공, 그 중에서도 최연장자로 손꼽히는 은가즈가 가장 먼저 호명되었다.
곱게 기른 은백의 수염을 무릎까지 기른 채 한갈래로 땋은 모습을 한 은가즈가 느긋하게 앞으로 나서자, 즈라탈은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고는 렐그낙이 서있는 방향으로 인도하며 말했다.
“은가즈 대공. 급한 연락에도 이렇게 어려운 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렐그낙 경께서 안내해 드릴 것입니다.”
“음.”
은가즈 대공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답했다. 즈라탈은 그런 은가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 허울 좋은 위세가 형진 앞에서 어떤 식으로 무너져 내리는지 직접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은가즈는 렐그낙의 뒤를 따라 형진이 머물고 이는 방으로 향했다.
“렐그낙입니다. 은가즈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여보내.”
“네.”
안쪽에서 들려오는 젊은 목소리에 은가즈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다른 노스페라투들과는 달리 ‘가장 오래된 자’를 제법 많이 만나본 쪽에 속했다. 조금은 거들먹거리는 그의 태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직위와는 별개로, 권력이란 결국 정점으로부터 아래로 흐르는 법. 정점에 오른 자와 가까울수록 더 큰 권력을 누리는 건 이런 종적인 지배 체제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에게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뭔가 생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적어도 그가 이전에 들었던 ‘가장 오래된 자’의 목소리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렐그낙의 공손한 말투는 또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여러모로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
렐그낙이 문을 열어 보이며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자, 은가즈는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포한 뒤 열려진 문 안쪽으로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가장 오래된 자’를 만날 때의 행동을 자신도 모르게 취한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상하다. 방 안쪽은 너무나도 휘황찬란한 빛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일부러 수십개의 횃불을 밝혀놓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낮의 영역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마저 일어날 정도의.
종종 걸음으로 조심스럽게 안에 들어가자, 열려졌던 문이 닫힌다. 그 상태로 고개를 숙인 채 다음에 들려올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가슴 어림에서 후끈하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컥!”
어느 틈엔가, 누군가 뒤로 다가와 그의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 강인한 악력에 은가즈는 기절할 것만 같은 충격을 느끼면서도 이미 제어를 상실해가고 있는 몸을 힘들게 움직여 뒤를 돌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미처 그 행동이 결실을 이루기도 전에, 그의 근원에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힘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마라. 끔찍한 고통을 경험하게 될 테니.”
“크허억!”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이미 렐그낙을 정화시키면서 어느 정도 근원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생겨먹었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그 안에 자리 잡은 언데드의 힘을 밀어낼 수 있는지 확실하게 학습이 끝난 상황이기 때문이다.
은가즈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혀 일반적이지 않음을 이해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입되는 힘의 성질을 통해 이것이 함정이라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맙소사.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하지만 경악도 잠시, 은가즈는 급히 힘을 끌어올려 자신의 근원에 자리 잡은 검은 힘을 밀어내는 알 수 없는 힘에 저항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은가즈는 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하여튼 좋게 말하면 듣지를 않아.”
은가즈의 의식이 사라짐과 동시에, 그의 형체는 사라져 버리고 어두운 은빛의 불덩어리 같은 것만이 형진의 손아귀에 남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가만히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이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던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렐그낙 때는 차라리 어두운 암흑 속에서 일이 치러진 터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밝은 곳에서 지켜보고 나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형진은 손바닥 안에 쥐어진, 마치 빛바랜 싸구려 은박지로 싼 청심환 같은 구슬을 노려보며 힘을 주입했고, 그의 힘에 밀려난 언데드의 힘이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르자 불의 속성력을 일으켜 즉시 태워버리는 일까지 단숨에 해치워 버렸다.
처치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근원 속에 채워져 있던 언데드의 힘이 남김없이 밀려나 불태워지고, 신의 힘으로 충만해지자 탁한 은빛의 불덩어리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순백의 모습으로 바뀐 채 형진의 문장이 새겨졌다.
마침내 그 모든 일이 끝나자, 형진은 손에 쥐고 있던 근원을 힐리에타에게 슬쩍 던져 주었다.
“으앗!”
멍하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일을 지켜보던 힐리에타는 느닷없이 자신에게로 근원이 던져지자 기겁을 하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가지고 있어. 거기 쿠키 담았던 바구니에 담아두던가.”
“아, 알겠습니다.”
잠시 근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모르던 힐리에타는 그의 말에 따라 은가즈 그 자체이기도 한 근원을 쿠키가 담겨져 있던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안에 있던 쿠키들은 그녀가 모조리 먹어 치운지 오래지만, 바구니 안에는 막 구운 따끈하고 감미로운 쿠키의 향기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다음. 데리고 와.”
“네.”
황혼의 결계에 의해 차단되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문 저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렐그낙은,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암시하는 형진의 목소리가 전해지자 얼른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말에 따랐다. 가장 권력과 가까운 곳에 있었음에도 그것을 누리는 방법조차 익히지 못한 충실한 무인이었던 렐그낙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새로운 주인의 명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 뿐이었다. 이름조차 전해 듣지 못한, ‘가장 오래된 자’가 그를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부렸던 이유도 사실은 그 때문이다.
그렇게 노스페라투들은 하나씩 즈라탈이 호명할 때마다 렐그낙에게 안내되고는 이내 힐리에타가 들고 있는 과자 바구니 안에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끝났을 때, 형진은 비로소 노스페라투들 가운데 자신의 평판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자들을 선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테면, 과일 바구니에서 썩은 사과를 골라내는 일인 셈이다.
은가즈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러한 선별 작업마저 전부 끝나 버린 뒤였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뭔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한 향기가 전신을 감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