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615
00615 140. 초래 =========================
형진이 지구에서 다음 단계의 일을 추진하고 있는 동안에도 주시자와 밤의 종족들은 그의 뜻에 따라 새로 얻은 행성의 정화에 여념이 없었다. 황혼이 결계로 행성 전체를 감싸서 외부의 위협은 차단했더라도, 타락한 신의 영향력이 직접 가해지던 땅이다 보니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언데드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이건 도대체 끝이 없군.”
“고생하셨어요. 아버지.”
즈라탈이나 렐그낙 같이 이전에 노스페라투의 자리에 있었던 주시자들은 이 정화 작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중이다. 주시자가 되고 처음으로 주어진 커다란 임무인지라, 그들은 제법 열심히 형진의 뜻을 따르고 있는 중이다.
몇몇 주시자들은 이 새로운 행성의 대관으로 즈라탈이 임명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검은 빛으로 물들어 버린 듯한 이 행성은 그들이 살던 차야 메사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석 고정이 일어나 극단적인 환경이 되어버린 차야 메사와 비교하면 오히려 기후 같은 면에 있어서는 나은 편이다. 물론 그들이 본래 거느리고 있던 영민들이나 그들이 키우던 가축과 작물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겠지만, 대신 밤의 종족이라는 훌륭한 신의 권속들이 있다.
각지의 정화를 끝내고 즈라탈이 돌아오자, 그의 딸 힐리에타는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했다. 물론 그래봐야 형진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도시락을 덥히는 정도지만, 오래된 자 중에서도 노스페라투의 자녀로 태어난 그녀는 이런 식으로 손에 물을 묻히는 일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일은 시종들의 몫이겠지만, 정화작업에 투입될 일손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런 사치를 부릴 수는 없는 일이다.
즈라탈이 간단하게 몸을 씻고 들어오자, 힐리에타는 그와 마주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밤의 종족들을 가르치는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는 거니?”
“네. 생각보다 훨씬 똑똑하더라구요. 저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건 아쉽지만, 글자를 사용하면 의사소통은 그리 어렵지 않아요.”
“다행이구나.”
글자를 사용한다고 해도 땅이나 석판에 끄적거리는 식은 아니다. 이전에 도망쳐 왔던, 안식과 동굴의 추종자 녀석처럼 메시지를 사용하는 식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단어의 나열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표현 방식이 너무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점인데, 힐리에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스하들의 표현 방식을 다듬어 좀 더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녀석은 어떠냐.”
“그 녀석이요?”
“그 왜… 도망쳐 왔던 녀석.”
“아하. 덩치 말이시군요.”
“덩치?”
“네. 다른 스하들보다 훨씬 큰 몸집을 가져서 그렇게 불러요.”
“하긴.”
사실 밤의 종족들이 지닌 외모를 구별하는 건 오래된 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봐도 그냥 팔이 네 개 달린 커다란 그림자 정도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종족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하들이 잘 감시하고 있긴 한데, 별다른 움직임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중이에요.”
“혹시 모르니 주의하도록 해. 어쨌든 다른 신의 추종자니까.”
“네.”
그렇게 간간히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녀의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음식을 흡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왜 진작 이런 즐거움을 알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형진이 지급하는 도시락은 너무나 맛이 있었다. 언데드들과 싸우는 일을 제외하면 달리 즐길만한 것이 없는 이 이름 없는 행성에서, 그들이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도락이 바로 이 도시락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따뜻한 차 한 잔과 과일로 디저트를 즐기려는데, 문득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나가보마.”
“부탁드려요.”
힐리에타는 차를 끓이는 중이었기 때문에, 즈라탈이 직접 방문객을 살핀다. 문을 열자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날렵한 체구를 지닌 밤의 종족이었다.
다른 밤의 종족들은 영 외모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녀석은 즈라탈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외모를 알아봤다기 보다는 기색을 알아차렸다는 쪽이 맞겠지만, 어쨌든 형진이 스하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조금 특별한 녀석이다.
“무슨 일이지?”
즈라탈의 말에 스하는 특유의 음성과 함께 메시지를 사용해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덩치가, 지금, 난동을.
“난동?”
-신께, 할 말, 있다고.
“흠…”
감히 자신의 신을 오라 가라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대로 묵살해 버리기는 어렵다. 정화 작업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재량권이 보장되어 있으나, 다른 신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즉시 보고를 올리라고 지시가 내려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알았다. 신께 전하도록 하지.”
즈라탈은 지체 없이 보고를 올렸고, 그것을 확인한 형진이 곧바로 그에게 찾아왔다.
“세상 모든 것을 뒤덮을 위대한 밤의 신을 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둬. 그래, 덩치 녀석이 나를 찾는다고.”
“그렇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즈라탈이 눈짓하자 힐리에타가 다소곳한 모습으로 형진을 인도했다. 그냥 즈라탈이 직접 해도 되지만, 조금이라도 딸이 신의 눈에 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그런 식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래, 할 말이 있다고?”
형진이 다가와 그렇게 말을 걸자, 덩치는 그대로 넙죽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여신, 위험, 도움, 부탁, 부탁, 부탁…
“위험하다고? 어째서?”
-도망.
“파괴와 재생에게서 도망중이라는 뜻이냐?”
-긍정.
덩치는 일단 그렇게 답하고는 여신의 상황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여신, 도망, 이곳, 부정, 연락, 부탁, 부탁, 부탁…
“뭐라는 거야…”
뭔가 급하게 말하기는 하는데 영 못 알아 먹겠다. 마음이 급한 탓에 이것 저것 다 빼먹어서 더 그런 것 같다.
형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스하가 거들었다.
-여신이, 이곳에, 도망하려다가, 실패, 연락이, 간신히, 닿아서, 이렇게, 부탁을.
“과연. 그런 얘기였나.”
교육이 성과를 발휘한 탓인지 훨씬 알아듣기가 편하다. 힐리에타는 어쩐지 뿌듯한 기분마저 느끼며 얼굴이 밝아졌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형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안식과 동굴이 도망을 친 것은 형진으로서는 호재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능력이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세상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것이 함정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 지난 번의 패배 이후 파괴와 재생이 이를 갈고 있으리란 점을 고려하면, 그것이 비록 만의 하나에 불과하더라도 충분한 대비를 하는 것이 옳다.
“좋다. 다만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단 만나도록 하지. 괜찮은가?”
덩치는 그 말을 듣자 지체 없이 넙죽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잠시 기다려라.”
형진은 이전에 미리 뿌려둔 무인기들이 수집한 정보를 확인해 적당한 장소를 물색했다. 현재의 장소에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져 있고, 가급적 불의 힘을 억제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필요하다. 잠시 정보를 확인하던 형진은 이윽고 알맞은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덩치, 따라와라. 다른 이들은 이만 물러가도 좋다. 수고했다.”
“별 말씀을.”
형진은 황혼의 권능을 통해 덩치를 데리고 자신이 선택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은 현재 정화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곳과 같은 항성계에 속했으나, 또한 우주선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먼 곳에 떨어진 거대한 가스 행성의 위성이었다. 위성이라고는 해도 달보다 큰 크기를 가지고 있고, 표면이 온통 두꺼운 빙하로 덮여 있는 그런 장소다. 지구 근처에서 가장 유사한 천체를 꼽으라면,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형진은 일단 적대적인 외부 환경을 차단하기 위한 결계를 간단하게 설치하는 일부터 했다. 여기저기 쓸 데가 많아서 휴대용 인공위성은 아껴둬야만 했다. 당장 태양계 행성들의 테라포밍에 쓸 물량도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적당한 조치가 끝나자, 형진은 뒤따라온 덩치에게 말했다.
“자, 이곳이라면 여신을 불러와도 상관 없다. 한번 연락을 해보도록.”
덩치는 갑자기 바뀌어 버린 주위의 모습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넙죽 절을 하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녀석의 주위에 커다란 검은 구멍 같은 것이 생겨나더니, 처음 보는 새로운 종족들 몇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
서로 다른 형태의 여러 종족들이 갑자기 우르르 구멍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에 형진은 살짝 긴장했다. 역시나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하지만 곧바로 곰 같은 형상의 종족 하나가 들쳐 업고 나타난 여인을 보는 순간, 형진은 그녀가 바로 안식과 동굴임을 알아차렸다.
“죄송… 합니다. 제가 지금… 몸이 별로 좋지… 않아서… 이런 모습으로…”
원래부터도 안색이 조금 어두운 편인 듯한데, 아이를 낳으면서 무리를 한 탓인지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외모는 조금 평범한 정도. 검은 머리카락을 곱게 한 갈래로 땋아 길게 늘어 뜨렸고, 눈동자는 물론이고 입술마저 검은 빛이라 조금 이질적인 느낌. 하지만 역시나 여신인 탓에 일반적인 여인들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어쩐지, 보는 순간 알게 모르게 모성이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랄까.
언데드의 영역에 정착한 신이라길래 완전히 타락해 버린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느껴지는 신의 힘이 제법 정순해서 조금 놀라버렸다. 하긴 그러니까 엘리시온도 그녀의 아이를 무리 없이 받아들인 것이겠지만.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어찌된 일인지 듣고 싶군요. 파괴와 재생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이까지 낳게 할 정도니까, 제법 많은 정보를 알 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들이 서 있는 곳에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격렬한 진동이 위성을 강타하자, 지면을 덮고 있던 두꺼운 얼음에 금이 가며 그곳으로부터 내부에 존재하던 물이 거대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아… 벌써…”
안식과 동굴의 탄식과 함께 빙하 위로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그곳으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언덕과도 같았다. 하지만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그 언덕은 거대한 산으로 변했고, 이내 세상 전체를 뒤덮을 것만 같은 거대한 형태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형진은 그것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상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이 미친놈이.”
처음 보는 순간 형진은 지금 등장하는 물체가 티폰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알고 있던 티폰과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거대한 괴수의 전신은 검은 불꽃으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표피 아래로 은은하게 하나의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티폰은 그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위협. 하지만 지금 모습을 드러낸 티폰은, 거기에 파괴와 재생의 추종자로서의 능력마저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추종자는 인간처럼 이성을 지니고 있는 자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추종자는 신을 모시는 대신 그 신이 지닌 강력한 권능을 빌어 쓰는 것이 가능한 존재이므로, 스스로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이 갖추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티폰 같은 괴수는 애초에 그런 식으로 자신의 힘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식의 이성 자체가 없는 존재다. 녀석이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보이는 것을 먹어 치워 자신의 크기를 불리고 번식을 하는 것. 어찌 보면 생명체로서 가장 기본적인 욕망만으로 움직이는 존재인 셈이다. 그런 존재를 추종자로 만들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세상을… 전부 불태워버리기라도 할 셈이냐.”
순간 그의 말에 화답하듯, 티폰의 몸으로부터 거대한 불길이 뿜어져 나와 마치 해일처럼 주위의 모든 것을 휩쓸기 시작한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형진은 벼락처럼 앞으로 뛰쳐 나갔다.
안식과 동굴을 보호하며 이곳까지 도망쳐 왔던 자들은 티폰으로부터 검은 불꽃이 쏟아져 나오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피할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들 앞에 기적이 일어났다.
그 무엇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검은 불꽃이 무언가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반으로 갈라지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안식과 동굴은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선 한 남자의 넓은 등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신의 힘…”
어째서일까. 그 뒷모습을 보는 순간 깊은 안도가 느껴지는 것은. 안식과 동굴은 지금까지 팽팽하게 이어져 왔던 긴장감이 문득 흩어져 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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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편째.
흐느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