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04
00704 159. 조치 =========================
순순하게 손목을 내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깔끔하다. 적어도 아바타가 아닌 것은 분명한 일. 하지만 역시나 이해하기 어렵다. 아바타가 아니라는 얘기는 잠시 빙의를 했을 뿐이라는 얘기. 하지만 빙의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던가.
신이란 존재는 매우 강력해서 일반적인 인간의 몸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희망과 생명이 유아에게 깃들었던 것도 그녀가 신녀급의 사제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인 존재라면 자칫 그릇 자체가 깨져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아줌마가 신녀란 얘긴가. 글쎄.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닐 것이다. 신녀니 성녀니 하는 존재는 추종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들에게나 붙는 명칭이다. 개나 소나 신녀가 될 수 있었다면, 신들이 따로 아바타 같은 것을 만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흠…”
모르겠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포트니아 테론이 이 아줌마의 몸을 사용한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모처럼 단서를 찾았는데, 이래서야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은가.
“저… 뭔가 잘못 되었나요?”
자신의 손목을 잡은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진의 모습이 신경 쓰였던 모양인지 아주머니가 그렇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걸어온다.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형진은 아주머니의 손목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신앙하는 신이 있으십니까?”
“신… 말씀이신가요?”
“네. 특별히 모시는 신이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가능성은 적지만 혹시나 포트니아 테론의 신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대답은 역시나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희망과 생명의 신전에 가끔 참배하러 가곤 합니다. 김밥천국에서 가끔 일을 돕기도 하지요.”
“그러셨군요.”
일단 예상과는 달리 포트니아 테론의 흔적은 찾지 못했지만, 앞서의 여자의 기억대로라면 이 아줌마에게서 포트니아 테론이 현현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미 형진이 거쳐갔으니 다시 이 아줌마에게서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적은 편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만약을 위한 대비 정도는 해둘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원하신다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추천을 해드리겠습니까. 생각이 있으십니까.”
“사제요?”
아주머니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하지만… 사제가 되면 신전에서 지내야 하지 않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다만… 세간의 인식 때문에 안전을 고려해서 그렇게 생활하고 있는 것 뿐이지요.”
“하긴…”
근래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을 호구로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물론 이 아주머니는 한창 때의 아리따운 모습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제가 되었다고 하면 껄떡대는 놈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그건 좀 곤란한 일인 것 같아서, 형진은 약간 방향을 바꿔 보기로 했다.
“갑작스런 제안이 부담스러우시다면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형진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희망과 생명의 성물입니다. 항상 몸에 지니시면 건강하게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필요하다면 기원을 통해 약한 회복 능력 정도는 쓸 수도 있죠.”
“아…”
다른 신들의 성물은 신전을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지만, 희망과 생명의 성물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보호와 균형 같은 신들이야 추종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신도를 끌어모으기 위한 수단이라도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성물을 가져다 놓은 것이지만, 희망과 생명의 경우엔 충분한 숫자의 사제들이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귀한 것을…”
레테 역시 자주 신전에 참배하고 김밥천국의 일도 도울 정도로 독실한 신도였지만, 이런 식으로 희망과 생명의 성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째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해주시는 건가요.”
잠시 머뭇거리던 레테는 그렇게 물었고, 형진은 곧바로 이렇게 답했다.
“혹시, 최근 기억이 중간에 끊기거나 한 일이 없으십니까.”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레테는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다.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성물이 그런 현상을 온전히 막아줄 수 있을 거라고 보장하기도 힘듭니다. 대신 다시 한 번 그와 같은 일이 생겼을 경우 희망과 생명께서 당신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도움을 주실 수는 있겠죠.”
“그런… 건가요.”
레테는 지금 이 젊은 왕이 자신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이 라야바르트의 국왕이 암살되었던 일과 무관하지 않음을 직감적으로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당연히 따라야겠지요.”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레테에게 성물을 건네는 일을 마친 형진은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 인근에 결계를 깔고 위성을 배치해 상황을 예의 주시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걸로 포트니아 테론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거쳐 갔음을 과시하는 행위일 뿐이다. 이를테면, 영역 표시라고나 할까.
그렇게 레테에 대한 조치를 하고 나서 왕성 라이언하트에 돌아가자 미엘과 하엘이 제랄딘과 함께 마중을 나왔다.
“얘기 들었어요. 위치라면 저희가 알고 있으니 지금 바로 가도록 해요.”
“미안. 가급적이면 그쪽은 건드리지 않고 싶었는데.”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그냥 처갓집 간다고 생각하세요.”
“그래도.”
형진의 말에 미엘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던 하엘이 한 마디 던진다.
“거, 걱정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무작정 번식하자고 달려들 흑요호들은 없을 테니까.”
나름 걱정해 주는 말 같긴 한데, 뭔가 미묘하다. 어쩐지 말로는 안 했어도 한 마디 더 덧붙인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를테면 흑요호도 보는 눈이 있거든요 같은.
“그래주면 나야 다행이겠지만. 그럼 갈까.”
“네.”
미엘로부터 흑요호의 마을에 대한 기억을 건네받은 형진은 곧바로 황혼의 권능을 발현해 경계를 넘었다.
흑요호의 마을은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그냥 울창한 숲인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면 신기하게도 아기자기한 마을이 드러나는 그런 곳이다.
“이건…”
“설마…”
하지만 형진은 물론이고 미엘과 하엘, 그리고 제랄딘도 마을에 들어서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늦었나.”
허탈해 하는 형진의 말대로 이미 마을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다른 곳의 흑요호들에게 연락할 방법은?”
“글쎄요. 아시다시피 흑요호들은 워낙 개인주의가 강한 종족이라…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아요.”
본래 이 마을은 아직 열 개의 꼬리가 다 나지 않은 흑요호들을 보호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정확한 수를 집계하기는 어렵지만, 평소 마을에 머무는 인원은 어른과 아이를 합쳐도 채 열 명이 될까 싶은 수준.
형진이 대단한 이유는 그래서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은 수의 흑요호를 낳는 경우 자체가 전대미문이니까.
“혹시 누가 찾아올지도 모르니 결계를 마련해 놓는 것이 좋겠어요. 지금 당장은 아무도 없지만, 아이를 낳은 흑요호가 찾아올지도 모르니.”
“그렇군. 이미 늦어버렸지만, 같은 경우가 생기는 건 막아야할 테니.”
미엘의 말에 따라 형진은 흑요호의 마을에도 결계와 위성 들을 배치해 두고는 왕성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빠른 시일 내에 누군가가 다시 마을을 찾아들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사흘 정도 지나자 마을에 접근하는 누군가의 기척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형진은 미엘과 하엘을 데리고 급히 흑요호의 마을로 향했고, 그곳에서 꼬리조차 나오지 않은 아이를 품에 안은 흑요호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들은… 누구죠?”
아이를 기르기 위해 마을을 찾았던 흑요호는 텅 비어버린 그곳의 풍경에 망연자실해 있다가 그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새로 마을을 찾아온 흑요호는 짧은 단발 머리의 서양보다는 동양계의 모습을 한 아담한 체구의 여인이었다. 겉보기에는 미엘이나 하엘보다 연상으로 보이지만, 어차피 흑요호의 인간 형태는 본래의 모습이 아니니 단정하기도 어렵다.
“놀라셨다면 미안해요. 저는 미엘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하엘. 그리고 여기 있는 이 남자는 저희들의 남편이에요.”
미엘이 다가서며 그렇게 신분을 밝혔지만, 흑요호는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남편… 이라고요?”
하긴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었다. 아이를 낳기 위해 인간과 붙어 지내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따로 떨어져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이미 아이를 낳은 상황이라고 하기엔 형진의 나이가 너무 젊어보인 탓이다. 확실히 일반적인 흑요호의 입장에서는 형진과 미엘, 그리고 하엘의 관계가 이상해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진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니까요.”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면…”
“신이에요.”
“네?”
흑요호는 눈이 휘둥그레졌고, 이내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타나토스에서 신은 상상 속의 산물은커녕 엄연히 실존하는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아무렇게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하지만 뒤이어 형진이 억눌러 두었던 존재감을 슬쩍 드러내 보이자, 흑요호는 크게 놀라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미처 지고하신 존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혹시라도 아기에게 해를 끼칠까 두려웠는지 흑요호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게 두려워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이미 두 명의 흑요호를 아내로 맞이했고, 또한 열둘이나 되는 공주를 낳았으니 남이라고 하기도 힘들죠.”
“네? 여, 열둘… 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기에 앞서, 당신과 아기를 저희 가족이 있는 성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
흑요호는 미엘과 하엘을 바라보았다. 열둘이나 되는 아이라니, 그 정도 숫자면 평소 마을에서 키워지는 아이들을 다 합친 숫자와도 맞먹는다. 뭔가 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비어 버린 마을에 혼자 있는 것도 불안한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흑요호는 비어버린 마을을 돌아보았다. 척 보기에도 싸움이 일어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싸움이 일어나서 어딘가로 피신한 거라면 그런가보다 하겠는데, 이래서야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알아보기 힘들다.
결국 그녀는 아이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어느 새인가 다시 존재감을 거두어들인 형진을 향해 말했다.
“그전에… 먼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은데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형진은 최근 타나토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얼마전 타나토스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결계가 깨진 것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 그리고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타락한 신이 환수를 불러들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까지.
“그럼… 마을에 있던 이들이 그 타락한 신에게 끌려갔다는 말인가요?”
“끌려간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을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
흑요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을이 이렇게 비어버렸다는 것은,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자신들도 같은 일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앞서도 말했지만, 저 역시 열둘이나 되는 아이를 기르고 있는 몸. 어떻게 보면 당신과 우리들은 같은 처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저는 제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는 일을 겪는 것을 용납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형진의 말에 흑요호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
“알겠어요. 초대에 응하겠어요.”
사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아직 흑요호는 속으로 긴가민가 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눈앞에 명백하게 두 명의 흑요호들이 서 있고, 일반적인 인간으로는 보기 어려운 강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남자도 있다. 마을은 이미 비어 있고 달리 갈 곳도 없는 상황이니 머물 곳이 필요한 것도 틀림없는 일.
“감사합니다. 그럼 가실까요.”
형진은 곧바로 황혼의 권능을 사용했고, 그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왕성 라이언하트로 들어섰다.
“아…”
우거진 숲속에서 높고 화창한 하늘과 탁 트인 바다 한 복판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성으로 이동하자 흑요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빠아!”
“빠앗!”
“어이쿠, 우리 공주님들.”
정말로 열둘이나 되는 아기 흑요호들이 하늘을 날아 남자에게 날아와 안기는 모습을 보고, 흑요호는 물론이고 지금까지 숨죽인 채 엄마의 품에 안겨 있던 아기 흑요호마저도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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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