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13
00713 161. 대면 =========================
달그락 달그락.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은 소리는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이 들었는지 깨었는지 모를 몽롱한 상태에서 어느 새인가 익숙해진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본다. 그러자 속옷만 입은 채로 화덕 앞에서 무언가 요리를 하고 있는 형진의 뒷모습이 보인다.
손에 든 웍과 주걱을 움직일 때마다 잘 단련된 등근육이 꿈틀거린다. 처음에는 시야가 흐릿해서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몇 개의 붉은 손톱자국이 그의 등에 남아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몽롱하던 기분이 갑자기 확 날아가며 머리에 피가 몰린다. 그제서야 저 자국을 누가 남긴 것인지 알아차렸고, 더불어 저 자국을 남길 당시의 일 또한 떠올라 버렸기 때문이다. 몸부림치며 울부짖고, 울부짖으며 그의 몸을 필사적으로 안으며 몸부림치던 지난 밤의 기억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떠올라 버린 것이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허리와 등과 어깨와 그 외에 어딘지조차 감이 안잡힐 정도로 몸 이곳저곳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윽…”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오면서 작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마치 사나흘 동안 잠도 자지 못한 채 숲을 헤집고 돌아다니고 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 숲을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가 깨어난 순간 몸살이 나서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다. 몸 여기저기가 어찌나 쑤시고 결리는지 절로 눈물마저 찔끔 나올 정도다.
“깼어?”
형진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대답도 못하고 끙끙 앓고 있는 모습에 피식 웃어버렸다.
“잠시만 기다려. 이것만 끝내고.”
그렇게 말하고는 몇 번 웍을 흔들어 내용물을 뒤집더니, 접시에 그것을 담아내서 그녀에게 가지고 왔다.
“어디 봐.”
“괘, 괜찮아… 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존대를 하고 말았다.
“하던 대로 해.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해.”
“…”
확실히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고 이제와서 존대를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긴 하다.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자니 그가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묻는다.
“어디가 아파?”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깨랑… 허리랑… 그냥 다…”
“흠. 꽤 단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아서 괜찮을까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잠시만.”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의 몸에 회복과 균형의 권능을 동시에 사용했다. 여신들이 직접 사용하는 것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지간한 사제들보다는 훨씬 강력한 힘이다.
“가만 있어봐.”
권능을 쓰면서 가만히 주무르자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단순히 통증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개운하고 청량한 느낌이 스며드는 느낌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응…”
하지만 소리를 내기가 무섭게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콧소리가 섞여 나왔기 때문이다.
“좋아?”
“…”
키득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눈을 흘기려 했지만, 그 순간 덮고 있던 시트를 벗겨내는 그의 손길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자, 잠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트를 끌어당기려 했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덕분에 반항할 틈도 없이 허여멀건한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있어봐. 하는 김에 다른 곳도 봐야지.”
“괜찮… 은데.”
“괜찮기는, 그러다 쥐라도 나봐. 눈물이 쏙 빠질걸.”
“…”
결국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벗은 몸을 다시 한 번 그의 눈앞에 드러내 보여야만 했다.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져서 고개를 돌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어 버린 형진은 그녀의 팔과 다리 역시 권능을 사용한 채 가볍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어때. 한결 낫지?”
“응…”
괜찮은 건 둘째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다. 이러다가 그냥 또 확 덮쳐버리면 어쩌나 싶은 기분도 들고.
하지만 그런 기대반 걱정반이 뒤섞인 그녀의 생각과는 달리 형진은 권능을 사용한 마사지를 마치자 미련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몫의 오므라이스 앞으로 다가 앉았다.
“자, 괜찮으면 이제 일어나. 밥 먹어야지.”
“…”
오늘 아침 메뉴는 따끈한 오므라이스. 야채와 소시지를 잘게 썰어 넣어 볶다가 케첩과 김치를 섞어 새콤하게 볶음밥을 만든 다음 반숙한 오믈렛을 위에 덮었다. 냄새만으로도 군침이 절로 나오는 그런 음식이다.
“잘… 먹을게.”
“그래.”
고작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다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뭔가 서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이상한 기분이다.
스푼을 들어 노랗게 입혀진 계란옷과 함께 볶음밥을 살짝 떠서 입에 넣는다.
“어때?”
“맛있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방긋 웃었다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표정을 지운다.
“왜. 그냥 웃어. 예쁘구만.”
“놀리지마.”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지금까지 험한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쉬운 여자일거라 생각하고 껄떡대는 이들은 봤어도 자신을 정말로 예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여자라고 하기엔 키가 너무 큰데다, 그다지 풍염하지도 않다. 항상 숲이며 들이며 싸돌아다니다 보니 피부는 검게 그을러 있었고, 활과 화살을 다루는 손은 부드럽기는커녕 거칠기 짝이 없다. 사냥이나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도 항상 짧게 자르고 다녔기 때문에 도무지 여자로서의 매력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외모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의도한 면도 있었지만, 집을 나온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여자로서의 매력 같은 건 포기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놀리긴 누가 놀린다고 그래.”
“…”
그녀는 물끄러미 형진을 바라보았다. 살짝 장난스럽긴 했지만, 딱히 놀리는 기색은 아니다.
“정말?”
“정말. 안 믿겨? 아하, 하긴 이런 스타일은 타나토스에선 별로 인기가 없긴 하겠어. 하지만 난 원래 타나토스 출신도 아니고, 보다 여러 가지 매력을 알아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
“훗.”
하지만 형진의 말도 그리 틀린 건 아니었다.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빛에 키 크고 날씬한 몸매는 그야말로 모델을 연상시킬 정도였으니까. 보이시한 느낌의 외모도 지구에서라면 충분히 먹히고도 남는다.
잘난척 하는 형진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하기야, 한 사람쯤은 이상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기왕이면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 주면 더 좋은 일이고.
“쿨럭. 쿨럭.”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자신이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놀라 사래가 들려 버렸다.
“괜찮아? 여기.”
“고마워.”
형진이 건네준 음료를 입으로 가져가던 그녀는 톡 쏘는 맛에 화들짝 놀랐다. 기포가 터지는 느낌이 어제 그와 함께 마셨던 맥주 같기는 한데, 술 느낌이 아니라 뭔가 더 시원하고 상쾌한 느낌이다.
“사이다라는 거야. 술은 아니니까 걱정 마.”
“걱정은 무슨…”
말로는 그래도 사실은 다시 술을 먹이고 뭔가를 하려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기야 술기운을 빌리지 않고 그냥 덤벼도 거부할 수 있을까 걱정스럽긴 하지만.
“오늘로… 며칠 째야?”
“뭐가?”
“그거… 토너먼트 기한.”
조심스러운 그녀의 말에 형진은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아아, 그거라면 됐어.”
그녀는 얼굴을 찌푸렸다.
“되다니?”
미심쩍어 하는 그녀의 말에 형진은 오므라이스를 크게 한 입 떠서 입에 넣으며 대답했다.
“훌륭하게 달성 완료. 나의 승리라는 얘기지.”
“…”
음식을 씹느라 우물거리는 말투.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말이 돼? 난 아직…”
이번 토너먼트의 조건은 그녀의 마음을 얻는 것. 그런데 토너먼트에서 형진이 승리했다는 얘기는 자신이 그에게 마음을 주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화들짝 놀라 그렇게 반박하자, 형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글쎄올시다. 포트니아 테론이 직접 패배를 인정 했는걸.”
“그, 그럴 리가.”
확실히 중간부터 기억이 없기는 하다. 하지만 패배라니. 이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찔리는 부분이 전혀 없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딱 잘라 대답하기는 뭐하지만, 그래도 단숨에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에 대해서는 천천히 얘기를 해줄 테니까 우선 그것부터 먹어. 식으면 맛없다고.”
“…”
어쩐지 손해를 본 느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느새 납득하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그와의 사이에 존재했던 벽이 사라져 있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남자라는 존재와 마주 앉으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적대감과 반감이 이렇게 마주 앉아 식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일단 자기 몫의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형진은 괜찮다며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한 뒤 설거지를 하기 시작한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속옷 하나 덜렁 걸친 모습으로 등을 돌린 채 콧노래를 부르며 설거지를 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리게 된다.
“내 옷… 어디있어?”
“세탁.”
“세탁?”
“응.”
“그럼 난 뭘 입어?”
“안 입어도 돼. 어차피 다시 벗을 텐데 뭘.”
“…”
그녀는 얼굴이 확 붉어지고 말았다. 어제의, 정확히 어제가 맞는지조차 의문이지만 어쨌든 어젯밤의 일이 다시 떠올라 버린 것이다.
“누, 누가 허락한대?”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
그녀가 확 붉어진 얼굴로 노려보자 형진은 키득거리며 웃더니 사실대로 말했다.
“좀 있다가 요정들이 새 옷을 가지고 올 거야. 걔들이 실력이 좋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된 옷 한 벌을 만드는 데는 좀 시간이 걸리거든.”
“…”
진작에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지 않은가. 정말인줄 알고 속으로 얼마나 놀랬는지.
하지만 이어진 형진의 말에 그녀는 가슴이 철렁 주저앉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개들 오기 전에 씻어야 해. 시간이 없으니 이것만 끝내고 바로 도와줄게. 잠시만 기다려.”
도와주다니. 씻는 걸 말인가.
“괜찮아. 나 혼자서도…”
그러자 형진이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돼. 그러다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 정도야 상관없어. 이래봬도 몸 하나는 튼튼하니까.”
“너 말고.”
“뭐?”
“너 말고, 네 아기를 말하고 있는 거야. 나는.”
그녀는 잠시 형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아기라니?”
그 말에 형진은 몸을 빙글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네 아기. 그리고 동시에 내 아이이기도 한 생명이 네 몸 안에서 자라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확정적인 형진의 말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말도 안 돼. 하룻밤이야. 한 번… 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어쨌든 하룻밤 밖에 지나지 않았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누구인지 잊은 거야?”
“그야…”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에 깜박 잊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이 그녀의 뇌리를 스친다.
그렇다. 그는 신이다. 밤의 신. 인간을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
“더구나 내 아내 중에는 희망과 생명, 그리고 공포와 죽음이 있지. 나는 그녀들의 힘도 어느 정도 빌려 쓸 수 있고. 그래서 생명이 새롭게 잉태된 것쯤은 이제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어. 원한다면 직접 희망과 생명을 데려다가 확인을 시켜줄 수도 있어.”
“…”
그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형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심해. 네가 내 아이를 가지게 된 이상, 나는 널 보내지 않을 거야. 설령 포트니아 테론이 나에게 전쟁을 건다 할지라도.”
“…”
“잊지마. 넌 이미 나의 포로야.”
그건 선고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의지를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는 자신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말대로다. 그녀는 이미 그의 포로였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장악되어 버린. 그제서야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딩가딩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