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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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사단
형진의 말을 들은 건 그랙커스와 제랄딘 만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들이 봉공하는 가문의 금지옥엽이자 기사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제랄딘에게 집적거린다는 소문이 도는 황자의 행차를, 조금 짜증스런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던 기사들의 예민한 청각에도 그 말이 여과 없이 전해진 것이다.
숙영지 안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삽시간에 퍼져 나간다. 웃음의 전염성은 둘째 치고, 이 정도면 평소 레이그릭이라는 이름의 황자의 평판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게 기사단 전체에게 작은 웃음을 선사하며, 레이그릭 황자의 화려한 마차는 마침내 지휘관 막사가 있는 장소 앞에 도달했다.
멀리서 볼 때도 대단했지만, 가까이서 보니 참 쓰잘데기 없이 크고 아름답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여실히 이해가 되는 마차다. 마차의 속도와 안정성까지 포기하고 저렇게 청동 부조를 미친 듯이 달아놔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런 생각을 형진이 떠올리고 있을 때, 앞에 선 그랙커스와 제랄딘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예를 취하자, 미엘과 주위의 다른 기사들 역시 같은 모습으로 예를 취한다. 형진과 유아는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그들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모두가 예를 취하자, 그제서야 마차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린다. 나름 경첩에 기름칠을 열심히 해둔 것 같긴 한데, 저건 경첩의 문제라기보다는 청동 부조의 무게에 짓눌려 구조 자체가 뒤틀린 탓에 생긴 문제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곧바로 마차 뒤의 시중인 좌석에 앉아 있던 시종들이 마차 밑에 발판과 깔개를 깔자, 마침내 안쪽에서 황자와 그의 시녀들이 함께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이렇게 본 황자를 환대해 주니 기쁘구려.”
땅에 내려선 황자는 주위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다가, 마치 그제서야 제랄딘을 발견했다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니, 그대는 제랄딘 공녀가 아니시오. 이곳엔 어쩐 일이시오.”
마치 몰랐다는 듯이 호들갑스럽게 그런 말을 던지는 황자의 그 모습이라니. 제랄딘은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참으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한창 훈련 중인 기사단을 격려코자…”
하지만 황자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냉큼 말허리를 잘라먹었다.
“일단 모두 고개부터 들어 보시오. 아름다운 공녀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싶구려.”
“…”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아직 제대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형진과 유아는 그 짧은 대화만으로도 제랄딘이 황자를 그렇게 짜증스러워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뭐랄까. 자기 할 말만 하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대화라는 것의 본질을 오직 자신의 의사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수단이라고 착각하는 그런 타입으로 보인다.
어쨌든 고개를 들라는 황자의 말에, 허리를 숙여 예를 취하고 있던 이들은 비로소 몸을 펴고 황자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생긴 건 상당히 멀쑥하다. 어디가도 미남이라는 소리는 확실히 들을 듯한 모습. 다만 조금 과장된 표정으로 웃고 있는 것이 어딘지 어색해 보이고, 얼굴 모습에 비해 신체의 비율이나 자세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과하게 살이 찐 것도 아니고, 너무 마른 것도 아닌, 제대로 관리를 하고 있는 체형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찬찬히 황자의 모습을 살피던 시선이 발에 도달하자, 형진은 그 어색해 보이는 신체 비율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었다.
키 높이 구두. 그것도 굽을 살짝 높이거나 깔창을 높인 수준이 아니라 통굽과 비슷한 느낌의 웨지 힐이다. 나름대로 키 높이 구두인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려다 보니 저런 모양이 된 것 같기는 하다. 그래봐야 살짝 얼어서 미끌거리는 길바닥 위에 서는 것이 너무 불안한 탓에 시녀들의 부축이 필요한 시점에서 말짱 도루묵이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가 타고 온 마차와 똑같다. 과도하게 자신을 높이려다 보니 스스로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그런 모습.
그렇게 한껏 높였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그릭 황자의 키는 로퍼에 가까운 낮은 굽의 구두를 신은 제랄딘과 간신히 비슷한 수준이었다. 아마도 남자치고는 다소 작은 키에 대한 콤플렉스가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원인인 모양이다.
레이그릭 황자는 제랄딘이 고개를 들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기껏 키 높이 구두를 신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내려다보는 듯한 제랄딘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건 키의 문제라기 보다는 제랄딘의 당당하고 고아한 태도가 은연중에 위압감을 발하면서 생기는 느낌이었지만, 황자는 자신이 눈앞의 아름다운 여성에게 압도되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황자의 시선은 이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미엘에게로 향한다. 본신은 완전히 딴판이지만, 지금의 미엘은 흡사 작고 귀여운 인형과도 같았는데,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황자의 얼굴에 미소가 은근히 흡족한 미소가 어린다.
미엘에게 잠시 머물렀던 황자의 시선은 그 곁에 서 있는 형진과 유아에게로 향했다. 형진이야 그런가보다 하는 표정으로 슬쩍 바라보고 지나갔지만, 어느 틈엔가 그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유아의 모습을 보는 순간 황자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그 동안 형진과 지내면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움직인 탓에 처음의 다소 없어 보이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데다, 희망과 생명으로부터 부여 받은 매료의 능력과 후광까지 겹치니 보는 이로 하여금 실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유아도 참 불행하다. 정작 예쁘게 보이고 싶은 대상에게는 이런 모든 효과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엉뚱한 사람에게만 통하니 말이다. 따지고 보면 둘의 인연이 시작된 것도 그 때문이긴 하지만.
꿀꺽.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유아를 보며 황자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유아는 놀라서 얼른 형진의 뒤에 숨듯이 달라붙었고, 제랄딘은 이제 황자의 행태에 대한 짜증이 분노로 변하기 일보직전이다.
“하하, 이거 참. 우락부락한 기사들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눈호강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군. 그쪽의 아가씨는…”
딱 봐도 모두가 불쾌한 기색을 보임에도 아랑곳없이 다짜고짜 유아의 이름을 묻는 황자의 모습을 참다못한 제랄딘이 결국 나섰다.
“황자님.”
“음?”
“날이 매우 찹니다. 일단 막사 안으로 드시지요.”
“…”
제랄딘의 말에 황자는 다시 얼굴을 살짝 찌푸리더니 아쉽다는 듯이 유아를 향해 입맛을 다시고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알겠소. 공녀께서 그리 말하는데 내 어찌 거절할 수 있겠소. 하하하.”
화통한 척 그렇게 대답한 레이그릭 황자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뒤뚱뒤뚱 그랙커스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미엘과 두 분은 제 마차로 가 계시지요. 공연히 더 눈에 띄여 봐야 좋을 것이 없을 듯 합니다.”
“알겠습니다.”
방금 전에 황자가 유아의 얼굴과 몸매를 마치 핥듯이 위 아래로 살피는 모습을 보는 순간, 솔직히 형진은 황자고 뭐고 당장 달려 나가 인스턴트 킬을 꽂아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잠깐의 마주침에서조차 그런 충동을 느꼈는데, 그래도 황자라고 이때까지 살려둔 제랄딘의 인내심이 참으로 경이로울 정도다. 물론 그것도 이미 한계에 도달한 듯한 느낌이지만.
미엘과 함께 제랄딘의 마차로 향하는 와중에도 유아는 안색이 파랗게 질린 채 형진의 팔에 꼭 매달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탐욕에 찬 시선을 던져도 두려울 텐데, 하물며 방금의 상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인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형진이나 크루그, 오귀스트, 기젤, 그리고 오늘 처음 보긴 했지만 훌륭한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그랙커스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좋은 사람들만 접하다가 이런 식으로 극과 극에 가까운 인물을 마주하고 보니 남자에 대한 두려움이 다시 살아난 모양이다.
“…”
자신의 팔에 매달린 상태에서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유아의 모습에 형진은 속에서 불덩이가 솟구치는 기분이 느껴졌다. 어쩐지 온몸에 열이 펄펄 끓는 와중에도 마굿간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느꼈던 그런 답답함이 형진의 가슴을 가득 채운다.
마침내 마차에 도착하자, 형진은 일단 유아를 먼저 마차에 태운 다음 미엘에게 말했다.
“잠시 용무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미엘은 형진의 표정에 서린 살기를 보고는 얼른 메시지로 말했다.
[여기서 죽이면 안 돼요.]형진은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아를 흘깃 보고는 역시 메시지로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냥… 놈이 타고 온 마차를 좀 만질 생각입니다.]미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유아님은 그동안 제가 돌보고 있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형진은 기사에게 물어 화장실로 찾아 들어간 다음, 칸막이가 쳐진 간이 화장실 안에서 장비를 착용하고는 환영의 반딧불로 빠져 나왔고, 이내 은신과 잠행을 펼쳐 황자가 타고 온 마차로 다가섰다.
정신을 집중하자 마차 여기 저기 드러나 있는 약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통 많아야 한두 개 정도에 불과한 약점이 이 마차에는 마치 별빛이 반짝이는 것처럼 무수하게 드러나 있다.
형진은 조용히 마차로 다가가며 단검을 빼들었다.
밖에서 형진이 그렇게 마차에 다가가고 있을 때, 장막 안에서는 제랄딘이 레이그릭 황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듣자하니, 공녀께서 재미있는 일을 꾸미고 있다 들었소.”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군요.”
“하하, 하긴 어전 토너먼트가 코앞이니 숨기고 싶은 것도 당연하지. 그러나 우리 사이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이제 곧 죽고 죽일 사이?
제랄딘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계속 영문 모를 말씀만 하시는군요. 도대체 저와 황자님이 어떤 사이인지, 저는 도무지 모르겠사오니 황자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 그게…”
살기마저 살짝 섞인 위엄 넘치는 제랄딘의 말에 레이그릭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놀란 것은 황자만이 아니었다. 그를 호위하기 위해 막사 안에 따라 들어온 기사들 또한 제랄딘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크게 놀라고 말았다.
단순한 위엄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강자의 자신감이 느닷없이 그녀의 전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또한 미처 알지 못했다. 제랄딘이 작심하고 살기를 뿜어내면 허세만 많지 심약하기 이를 데 없는 레이그릭은 잠시도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랙커스를 제외한 이 막사 안의 그 누구도 그녀의 진정한 힘을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그냥 농이었소. 실언으로 그대의 심기를 어지럽혔다면, 내 사과하도록 하겠소.”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기가 질린 레이그릭이 다급하게 사과하자, 그제서야 제랄딘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던 위압감이 사그라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랙커스는 조금 놀라면서도 조금은 뿌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체면을 구겨버린 레이그릭은 잠시 굴욕감에 몸을 떨다가, 이내 평정을 가장한 채 오늘 이곳을 찾은 핑계를 끄집어냈다.
“실은… 오늘 이곳을 찾은 것은 지난 해 아쉽게도 결승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던 라스미어 기사단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오.”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볼 일 보고 꺼지든가.
“물론 이건 표면적인 이유이고, 실은 그대에게 작은 선물을 하려는 것이 주된 이유였소.”
“…”
선물이라니.
제랄딘과 그랙커스는 이 황자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르려고 이러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을 이리로.”
레이그릭의 말에 시녀 하나가 천으로 덮여진 새장 같은 것을 가지고 앞으로 나선다. 뭔가 싶어 바라보니, 시녀가 천천히 천을 걷어내는 순간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이 드러났다.
“이건…”
“요정?”
황금빛으로 빛나는 새장 안에 작은 여자 아이 모습의 요정 하나가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눈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은빛이고, 몸에는 하늘거리는 메이드복 같은 것을 입고 있다.
레이그릭은 놀란 나머지 살짝 눈이 커진 제랄딘을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공녀께서도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하오. 바로 브라우니라는 이름의 요정이오.”
브라우니는 흔히 집안일을 도와주는 요정으로 알려져 있는 존재. 보통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고 수줍음이 많아 들키면 바로 모습을 감춰 버리기 때문에 좀처럼 실체를 만나기 어려운 요정이다.
“알다시피 내가 작고 귀여운 것들을 좀 좋아하는 편이오. 그런 내 취미를 들은 귀족 가운데 하나가 힘들게 구한 것이라오. 본래는 곁에 두고 보며 즐기려 했으나, 공녀께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이렇게 가지고 왔소.”
“…”
브라우니는 비록 크기는 작지만 어지간한 메이드 열 명 분의 일을 능숙하게 처리할 수 있는 만능 도우미다. 게다가 실력도 출중해서, 어지간한 가사 업무 대부분에 대해 숙련 수준에 가까운 능력을 보인다. 물론 여기에는 요리도 포함된다.
다시 말해, 브라우니 하나를 손에 넣으면 그것은 바로 숙련 요리사 열 명을 고용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가 되는 셈이다.
레이그릭 황자는 제랄딘을 바라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소. 이것을 걸고, 내기를 한 번 해보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