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4
00794 182. 회합 =========================
“왜 죽이지 않는 건지 궁금해 하는 표정이군.”
앙그릴의 상황을 보고하러 왔던 라만은 급히 형진에게 머리를 숙였다.
“제가 어찌 감히…”
그 모습에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래서야.”
“네?”
라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형진을 바라보려 하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형진은 그런 라만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처음부터 공포로 다스리려 했으면, 그렇게 했겠지. 원래는 화가 나서 전부 뒤집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게 가장 효과적인가 하는 생각을 떠올려 보니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형진은 가만히 옥좌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지구라는 세계는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나는 한때 그곳에서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직접 범죄자들을 처단하고 다닌 적이 있어.”
“…”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나에게 반발하며 내 식솔들을 해하려 드는 자가 나타났었지.”
“그런…”
상대는 신이다. 아니, 죽음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다는 걸 보면 스스로 신임을 드러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어쨌든 그의 능력이라면 징벌로부터 벗어날 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발하다니. 목숨이 아깝지도 않은 것인가.
“인간은 나약해. 하지만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는 경우가 있지.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든 자신의 가족을 위한 것이든 그런 경우는 분명히 존재해. 공포는 때로 만능으로 보이지만, 극복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좋은 촉매가 되기도 하거든. 공포로서 지배하려 들었던 독재자의 말로가 대부분 좋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래서야. 자신이 베풀었던 공포를 그대로 되돌려 받는 경우가 많으니까.”
형진은 가만히 옥좌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무작정 힘으로 짓누르게 되면, 결국은 터져서 사방으로 흩어지거나 망가져서 더 이상 예전의 모습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법이지.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가 바라는 앙그릴은 터져서도 짓눌려서 본래의 모습을 잃고 망가져서도 안 돼. 나는 그들이 지구인들의 또 다른 경쟁자가 되어 주기를 원하거든.”
라만은 아운 제국의 황제이지만 카트린의 친구이기도 했고, 때문에 지구에 대한 것도 어느 정도는 전해 듣고 있었다. 그런 내용들 중에는 달을 개발하고 다른 행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희가… 말씀이십니까.”
물론 앙그릴도 다른 세계보다는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이제 막 산업 사회로 접어든 정도다. 기술적인 격차로 따지면 거의 이백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이백년이라고 하면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인간이 달에 처음 간 것이 고작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이미 그들끼리 경쟁이 붙도록 조치를 취해 놓긴 했지만, 그들은 경쟁에 별다른 이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타협하고 담합하는 경우가 많아. 그래서야 제대로 된 경쟁이 될 리가 없지. 그러니 경쟁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국가 단위의 작은 상대를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단위의 큰 상대 역시 필요해. 내가 앙그릴에 바라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부분이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쉽지 않은 일이지. 물론 독재의 형식을 사용해 억지로 끌어올리고자 한다면 못할 일은 아니야. 그러나 내가 앙그릴에만 매달려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또한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런 방식은 먼 미래를 보면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어. 나는 앙그릴을 지구인들의 경쟁자로 삼고 싶은 거지, 내 친위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라만으로서는 오히려 그쪽이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어설픈 이인자보다, 권력자가 키우는 사냥개가 더 강한 위세를 가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쉬운 길을 찾기만 해서야 카트린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되지 못한다. 그녀는 신이 애지중지하는 여동생이었고, 언젠가 그와 같은 반열에 오를지도 모르는 신분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저 고분고분 말을 잘 듣기만 하는 자여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인간은 망각하기 쉬운 존재이고, 공포와 같은 감각도 그런 식으로 망각되고 둔감해지기 쉬운 건 마찬가지야. 그러니 그들을 적절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채찍만이 아니라 달콤하기 이를데 없는 사탕 역시 필요한 법이지.”
형진은 그런 라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이 벌어진 원인은 따지고 보면 내부로부터 쌓이기 시작한 국력을 표출할 방법이 없다는 점에 있어. 국력이 신장되면 그것을 발휘하여 국격을 올리고 싶은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테니까. 그것을 억누르고 있으니 이런 식의 사단이 생긴 것이지.”
그 말에 라만은 머뭇거리며 이렇게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앙그릴에는 더 이상 뻗어나갈 만한 영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다른 자의 것을 빼앗는 일 뿐이죠.”
하지만 형진은 그런 라만의 반박에 빙긋 웃었다.
“앙그릴만 놓고 본다면 그렇겠지.”
“그럼…”
“나는 본래 각국이 무역등의 방법으로 좀 더 긴밀하게 엮여서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발전해 나가길 원했지만, 굳이 외부로 국력을 표출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대상을 지정해 주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야.”
라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진이 그의 세계에 던져줄 사탕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이다. 앙그릴의 사람들에게는 놀라 자빠질만한 일이지만, 형진에게 있어서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 그것은 바로 지구에서 그랬던 것처럼 앙그릴 바깥의 다른 행성들을 개발하는 일이다.
이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앙그릴보다 기술 수준이 수백년은 앞서고, 인구도 자본도 생산능력도 압도적인 지구 역시 각국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가능한 수준이다.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하나의 국가내지는 서너 국가의 연합을 통해 독자적으로 하나의 천체를 개발하는 일도 가능하지만, 앙그릴이라면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그와 같은 일이 가능해진다는 정도.
“싫어도 하나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겠군요.”
“맞아. 그리고 좋든 싫든 그렇게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룩하고 나면, 이후에는 어떤 목적을 위해 그런 식으로 힘을 합치는 일이 좀 더 수월해지겠지. 선례란 것은 그래서 중요한 거야.”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형진의 말대로다. 앙그릴은 이제까지 세계 전체가 힘을 합쳐 무언가를 이루어 낸 적이 없다. 사실 그것은 그들에게 의지가 없어서라기보다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지만, 이제는 그런 부분도 달라질 것이다.
“받아라.”
“이것은…”
형진이 건넨 것은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사소한 문양조차 새겨져 있지 않은 백금 반지였다.
“이것을 착용하면 회합장이라는 것을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각국의 대표자들에게 나누어 줄 생각이다.”
“회합장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거짓된 천국을 알고 있나.”
“네. 카트린 공주님과 함께 들어가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공간을 앙그릴에도 둘 생각이다. 그 공간에서 앙그릴의 대표자들은 수시로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아…”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닐 수도 있었다. 그저 필요할 때 언제든 서로 만나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이것은 바꿔 말하면, 앙그릴 전체를 아우르는 집단 지성의 시발점이 될 수도 있었다.
과거 형진은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에게 회합장을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 호구스런 사제들은 형진이 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집단 지성을 꽃피웠다. 아이들을 잘 달래는 방법이라든지, 천재지변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구호해야 하는지, 어떤 작물을 어떻게 키우는 것이 효과적인지 같은 분야에 대해서만 의견을 나누고 지식을 쌓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긴 그런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해서 희망과 생명의 사제들이 세계 정복 같은 걸 꿈꾼다면 그것부터가 이상한 일이고, 어쨌든 그 덕분에 타나토스라는 세계 자체가 안으로부터 살찌워지고 있기는 했지만, 형진으로서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 앙그릴에 그와 같은 회합장을 권력자들에게 개방하는 것은 형진으로서는 또 하나의 실험일 수도 있었다. 호구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이타적인 성격의 사제들과는 달리, 각국의 대표로 선발된 권력자들은 거의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기적인 성향을 드러낼 것이다. 그런 조합이 이타적인 성격의 사제들이 만들어낸 집단 지성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파악하는 것도 형진으로서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형진의 뜻은 곧바로 라만을 통해 알려졌고, 그로부터 다시 사흘 뒤, 각국의 대표자들은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진 무늬 없는 백금 반지를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리소문 없이, 자신은 물론이고 껴안고 자던 애첩이나 거처를 지키고 있던 자들 가운데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그와 같은 일을 해치웠다는 것은, 언제든 실종되어버린 자들과 같은 일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반지와 함께 놓여진 쪽지에는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이 함께 적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들 자신이 회합장에 접속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들은 혹시라도 반지에 뭔가 저주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물론 자신들의 목숨을 취하고자 한다면 굳이 이런 식의 방법을 쓸 필요조차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경우가 있는 일 아니겠는가. 그것이 아니더라도, 직접 신과 대면하는 와중에 뭔가 실수라도 저지르면 본래 그런 의도로 부른 것이 아닐지라도 큰 화를 입을 수 있다. 세상에는 본보기라는 것이 존재하게 마련이니까.
결국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직접 회합장에 접속하는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내세워 접속하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물론 아무나 대충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라,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나 딸, 그리고 동생과 같이 의전상 대리자로 내세워도 문제가 없는 이들을 선택했다.
영문도 모르고 대리자로 내세워진 이들은 반지를 착용하고 지정된 날짜와 시간에 회합장에 접속했다.
“뭐, 너무 예상대로라 할 말이 없군.”
그들은 기화요초가 만발한 꽃밭과 그곳에 자리 잡은 커다란 원형 극장 같은 형태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들 모두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놓인 하나의 옥좌와 그곳에 앉아 있는 한 인물을 발견했다.
형진은 이제 그의 상징과도 같은 트렌치코트와 눈가리개를 착용한 채 옥좌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평소의 그와는 다르게, 소용돌이치는 밤의 형상을 전신에 두르고 있었다. 밤은 그런 식으로 마치 솟아오르는 검은 용과도 같은 형상으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일단 편한대로 자리를 잡도록. 그렇다고 눕거나 하지는 말고.”
“…”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무릎이 후들거리는 기이한 위압감에 대리자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었다. 원래는 이런 식으로 비굴한 자세를 취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의 본능은 차마 형진 앞에서 거만한 자세를 취할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일단 올만한 자들은 다 온 건가.”
라만이 나타나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다섯 명 정도는 불참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형진의 뜻을 대놓고 거스른다기 보다는 두려움 탓에 차마 대리자를 내세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직접 참여할 엄두도 못낸 자들이 다섯이나 되었다.
자신의 부친이나 형, 오빠로부터 단단히 주의사항을 듣고 온 대리자들은 그들이 받게 될 벌이 무엇일지를 떠올렸는지 흠칫 몸을 떨었다.
“놔둬. 참석하지 않은 것 자체가 벌이 될 것임을 곧 알게 될 테니까.”
“알겠습니다.”
라만이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다른 대리자들과 마찬가지 위치로 가서 앉자, 형진은 참석한 이들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인사가 늦었군. 회합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낯선 이들이여. 나는 세계를 굽어 살피는 밤의 신이다.”
“신을 뵙습니다.”
나름 운율까지 살려서 개그를 던져 봤지만, 역시 세계가 달라서 그런지 참석한 이들은 고개를 조아릴 뿐 웃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알아들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형진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너희들을 이곳에 부른 것은 앞으로 앙그릴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메리 개천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