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798
00798 183. 방문 =========================
하지만 급히 일어나긴 했어도 어디로 나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페투스는 본래 제법 명석한 편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막 입사한 풋내기 신입사원마냥 버벅대며 어쩔 줄을 몰랐다.
[창문,] “아, 네.”결국 형진이 한 마디 더 건네고 나서야 부랴부랴 창문으로 다가간다. 허둥거리는 와중에도 보고 있던 서류를 챙겨서 갈무리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걸 보면 그래도 정신이 아주 없는 건 아닌 모양이다.
급히 발코니가 달린 큰 창문을 열어젖힌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청명하게 개인 하늘 뿐이었다.
역시 헛것을 보았나. 너무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다보니 그런 식으로 설익은 꿈이라도 꾼 것일까.
페투스의 두뇌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채 그 생각의 다음을 잇기도 전에 눈앞에 한 쌍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수면 위에 가라앉아 있던 무언가가 드러나는 것처럼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두 남녀의 모습에 페투스는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예의 눈가리개를 쓴 모습은 여전했으나, 이전과는 달리 편안한 느낌의 셔츠와 면바지, 그리고 캐주얼한 느낌의 구두를 신은 형진. 그리고 그가 내민 손을 잡은 채 하얀 원피스와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는 유아.
어쩐지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별다른 행동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짓하나 표정하나 만으로도 서로를 아낀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그런 한 쌍의 모습이다. 하지만 그런 일상적인 모습과는 달리, 허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으며 다른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깊은 존재감 또한 드러내고 있다.
“조심해.”
“네.”
형진은 귀부인을 마차로부터 내려주는 느낌으로 유아의 손을 잡고 그녀가 테라스 안쪽에 내려설 수 있도록 에스코트를 마친 뒤에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는 페투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실에서 보는 건 처음이군.”
“바, 바, 밤의 신을 뵙습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형진에게 놀라고, 그와 함께 나타난 성스럽고 단아한 느낌의 여인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페투스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됐고. 저기 앉으면 되나.”
“물론입니다. 이리로.”
페투스는 자신도 모르게 시종처럼 허리를 굽힌 채 그들을 소파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형진과 유아가 자리에 앉고서도 감히 마주 앉을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아.”
“그래도… 되겠습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마. 꼭 천벌을 곁들여야 진심인지 알아차릴 셈이냐.”
“아닙니다. 앉겠습니다.”
허둥대며 페투스가 자리에 앉자 유아가 그 모습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첫 등장 때부터 어쩐지 홀린 듯한 느낌을 받았던 페투스는 감히 그녀의 미소를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왕궁에는 미녀가 많다. 한 나라에서 고르고 골라 뽑은 여성들이 모여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왕궁에서 살아가고 있음에도 페투스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가슴이 설레어보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 자체에 여유가 없는 것도 한 가지 이유겠지만, 그런 점을 제외하고서라도 사춘기 소년에게 있음직한 분홍빛 기억 같은 것 하나 없는 건 조금 특이한 일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페투스이기 때문에 유아를 보는 순간 가슴이 콩닥거리는 이 기분이 너무나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이 녀석, 이거 내외하네. 반한 거냐?”
“그… 그게 아니라…”
“꿈도 꾸지 마. 내 아내니까.”
“헉. 죄, 죄송합니다.”
페투스의 허둥대는 모습에 유아는 쿡쿡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크루그 또래의, 이제는 소년이라고 하기만은 어려운 미묘한 연령대의 남자 아이가 그렇게 자신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니 귀엽게 느껴진 것이다.
형진은 혀를 찼다.
“쯔쯔. 좀 강단이 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쑥맥이었군.”
“너무 그러지 말아요. 당황해 하잖아요.”
“알았어.”
몇 마디 더 할 법도 했지만, 유아가 제지하자 말 잘 듣는 강아지마냥 얼른 입을 다문다. 유아 모르게 그녀의 감각을 공유하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런 형진의 모습에 투덜거렸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릴 수는 없었다.
“크흠. 보고서는 잘 받아 보았다. 상당히 일처리가 빠르더군.”
“감사합니다.”
다소 장난스러운 분위기를 헛기침과 함께 거두고는 일 얘기를 꺼내자 페투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둔 것이 있었던 모양인데.”
형진의 말에 페투스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그저 사소한 앞날의 대비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감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서슴없이 고하는 페투스의 모습에 형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왕족 아니랄까봐 말을 살짝 비틀긴 했지만 그 정도 의미도 알아듣지 못할 형진이 아니다.
“그 정도 준비를 해두었다면, 이번 기회에 국정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사실 추가적인 페투스의 동향까지 보고 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다분히 추측성의 질문이었다. 하지만 페투스는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인 듯한 기분에 움찔하면서도 역시나 순순히 그에게 대답했다.
“말씀대로입니다. 물론 저 혼자의 힘으로는 무리였겠지만, 신께서 베푸신 여러 가지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겸양의 말이긴 했지만, 교묘하게 논점을 비켜가는 대답이기도 했다. 물론 형진이 그런 식의 대답에 넘어갈 이유는 없다.
“그래서, 이유는?”
“…”
이것만큼은 페투스도 잠시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형진이 말없이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리자 결국 견디지 못하고 사실대로 고했다.
“제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신께서는 그리 달가와 하지 않으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형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것은…”
페투스는 잠시 말을 끌었다. 하지만 이건 머뭇거림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뜻을 표현하는게 가장 적절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서였다.
“밤의 신께서는… 균형을 원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호오.”
대답을 하고서 살짝 형진의 눈치를 살핀 페투스는, 이 신의 입가에 살짝 머금어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음을 깨닫고는 다시금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신과의 직접 대면은 심장에 좋지 않은 일이다. 아직 성인병 같은 걸 우려할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페투스는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사실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이 나라의 정권을 단숨에 뒤집어 페투스에게 권좌를 건네주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 정도는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주시자 몇 명만 내려 보내도 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굳이 정국에 혼란을 주지 않는 방향에서 참석자들을 일종의 균형추로 삼으려는 생각에서다. 피가 흐르고 공포에 짓눌릴수록 느닷없이 나타나 세계를 좌우하는 형진에 대한 반발심은 더욱 커질 테니, 그것을 최소화하면서 그 반발심을 돌릴 대상이 필요하다.
앞잡이.
참석자들의 역할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도 이미 그들을 가리켜 신의 앞잡이라 부르는 이들이 벌써부터 생겨나고 있는 참이다.
권력이란 돈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거리다가, 나중에는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 그 자체를 모으는 것에 혈안이 되어 버린다. 어떻게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나중에 돌아보면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었나 싶은 생각을 떠올리며 후회하게 되는 것도 결국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미 정상에 올라보았거나 그 폐해를 직접 피부로 느끼고 이해한, 흔히 노회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경험을 지닌 이가 아니라면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페투스는 확실히 형진과 대면했던 다른 여러 떨거지들에 비해 특별한 점이 있었다.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권력이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진의 의도를 헤아려 그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 건 어지간한 통찰력과 인내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페투스도 고민했을 것이다. 권력을 장악해 버리면 그 자신의 영달은 물론이거니와 형진이 내준 과제를 보다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재는 분명히 커다란 폐해를 가지고 있지만, 의사 결정에 걸리는 시간이 단축되는 만큼 무언가를 추진하고 달성하는데 있어서는 가장 빠른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독재 체제를 만들어 버렸을 때, 그런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형진이 다른 균형추를 마련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처럼 구축한 독재 체제 자체가 의미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아니, 일부러 명맥을 잇도록 놔둔 왕실의 떨거지들보다도 더 큰 위협이 되어 버린다. 신이 간접적으로 개입한 상대를 그들처럼 일거에 쓸어버리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훗날의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더라도 남겨두어 균형추 역할을 하도록 놔두는 편이 낫다. 언제든 배후를 찌를 수 있는 단검처럼 꺼림직한 기분이 들더라도, 최소한 신의 개입보다는 대응하기 편할 테니까. 게다가 그에게는 반지의 가호가 있다. 그것은 최소한 뒤를 찔리더라도 죽음에 이를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이성으로 이해하고 납득했더라도,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페투스의 경우엔 그런 부분이 더욱 강하게 남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죽었다. 물론 기록에는 지병으로 인한 자연사라고 되어 있었지만, 페투스 본인은 그녀의 죽음이 절대로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어린 시절의 일이라 모를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긴 해도,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차를 마시다가 피를 토하며 죽어간 어머니의 모습을 아직도 꿈에서 보곤 한다.
그가 까마득히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미래를 준비했던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마법사의 가계였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직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손녀딸 같았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는 마법사들은 아직 꽤 많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당장 권력과는 거리가 있어도 학계에서 상당히 유력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페투스가 아직 어린 나이에도 이런 저런 것들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에는 그들의 도움 또한 큰 힘이 되었다. 마법사들의 지원은 단순히 그런 감상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동기부여로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 과거를 지닌 페투스이기 때문에, 마침내 자신의 원수들을 처분할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마음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는데 매우 큰 인내심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과거가 아닌 앞으로 그에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원수들을 살려두고 그들의 죄를 묻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용서가 아니었다. 페투스는 교묘하게 함정을 깔아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벌하더라도 아무런 뒷얘기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일을 그들이 저지르기를. 오랜 세월이 지나 증거마저 남지 않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떳떳하게 법과 규칙에 따라 벌하더라도 누구 하나 그것을 사적인 복수라 말하지 않을 정도의 뻘짓을 그들이 저지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형진은 페투스의 그런 속마음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아직 완전히 자라지도 못한 소년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좋아. 속사정까지 내가 따지고 들 이유는 없겠지. 어쨌든 너는 다른 모든 참석자들 가운데 가장 빠르고 가장 확실한 일처리를 보였다. 이것은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고, 또한 다른 참석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과찬이십니다.”
페투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조아리며 겸양하려 했지만 뒤에 이어진 말에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잘한 이에게 상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이루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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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이제 다시 밥먹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쓰고…
모처럼의 연휴인데도 어째 별로 바뀐게 없는 듯한 이 느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