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00
00800 184. 유람 =========================
카살 제르토나.
앙그릴의 남반구에 위치한 이 도시는 남쪽에 위치한 내해와 적도 지방 인근의 대양을 연결하는 지협이다. 남쪽의 극지까지 펼쳐진 관계로 상당히 수온이 낮은 내해와 적도 지방으로부터 전해진 따뜻한 바다가 좁은 땅을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그런 곳이다.
지구에서 비슷한 도시를 찾는다면 터키의 수도인 이스탄불 정도. 동서 문물의 교차로로서 융성하고 그 풍부한 물산을 통해 제국의 수도로 발전한 과정도 비슷하다.
하지만 그것도 예전의 일. 너무 큰 보물은 욕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고, 내전으로 인해 동서로 갈라진 제국들은 누구도 이 보물을 손에 넣지 못하고 카살 제르토나라는 이름의 도시를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자유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그렇게 제국의 수도 자리를 잃었다고는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공식적으로 교역이 금지된 동서제국 사이의 완충지이며, 또한 유일한 교역 창구로서 카살 제르토나는 더욱 번창하게 되었으니까. 물론 이러한 풍요는 이후 다시금 동서제국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순식간에 빗물에 씻겨 내려가듯 사라질 위태로운 것이었지만, 어쨌든 이 도시의 사람들은 오늘도 외줄을 타듯 도시가 선사하는 모든 것을 누리고 있었다.
“굉장히 큰 도시네요.”
“그러게.”
동서의 육지를 잇고, 남북의 바다를 잇는 지리적 요건 탓인지 카살 제르토나는 흡사 제구의 메트로폴리스를 연상케 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원래는 목초지나 농경지였을 법한 지역까지도 도시가 확장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입지라면 식량의 수급 때문에라도 불가능한 일이고, 그것은 이 도시의 산업기반이 1차 산업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시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건설되고 보수되었으리라 생각되는 세 개의 운하를 통해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운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는 제국의 수도였을 때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색창연한 성곽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안쪽에는 형진의 안목으로도 꽤 훌륭하다고 생각될 만한 멋진 저택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아마도 저곳이 황궁인 모양이군.”
그리고 다시 그 모든 훌륭한 저택들을 백성으로 거느린 왕처럼 우뚝 솟아있는 백색의 궁전이 있었다. 높이 솟은 첨탑은 고딕 양식을 연상케 하고, 석상과 함께 빛의 음영을 강조한 부분은 바로크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형진과 유아는 천천히 하늘을 가로지르며 도시의 모습을 살폈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인만큼 여러 시대와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관광이 되었다.
그러나 멀찍이서 떨어진 채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내려가 볼까.”
형진이 말을 꺼내자 유아도 내심 마음이 동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옷차림으로는 조금 눈에 띄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가. 잠시만.”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도시라도 너무 튀는 차림새는 문제가 있다. 형진은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우선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이곳의 인물들은 대체로 품이 넓고 풍성한 느낌으로 부풀려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남북에 위치한 서로 다른 수온의 바다 때문인지, 영국 신사들처럼 우산을 항상 소지하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
형진은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일일이 확인한 다음 특징적인 부분은 살리면서 지구식의 모던함을 가미한 디자인을 그 자리에서 뚝딱 만들어냈고, 그것을 곧바로 림에게 보냈다.
“만들어.”
-넵.
다짜고짜 내려온 제작 지시였지만 림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의복을 담당하는 요정들에게 도안을 내려 보냈고, 숙련된 재봉사인 요정들은 순식간에 형진이 만든 의복은 물론이고 자신들 나름대로 어레인지한 옷을 몇 벌이나 완성시켰다.
형진과 유아는 뒷좌석의 공간으로 넘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허리를 졸라매서 가슴을 도드라지게 만드는 이곳의 양식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풍성해진 유아의 가슴을 더욱 돋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옷을 눈앞에서 갈아입는 모습을 보니,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힘이 불끈불끈 솟는 걸 느꼈다.
“예쁜데.”
형진이 음흉한 미소를 지은 채 그렇게 말하자 유아는 살짝 눈을 흘겼다.
“지금은 안 돼요.”
“응? 뭐가?”
“아무튼 안 돼요. 밤까지 기다려요.”
“쳇.”
능청을 떨어봤지만 유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형진이 투덜거리며 어린 애처럼 입을 삐죽거리자 유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일단은 이걸로 참아요.”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애 맞는 것 같은데요.”
“아니거든?”
어쨌든 그렇게 옷을 갈아입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근처의 지붕 위에 유아와 내려선 다음 다른 이의 눈에 띄지 않도록 환상으로 은닉된 부양 자동차를 역소환 했다. 3세대 퍼스널 모빌리티가 기존의 것과 가장 차이 나는 점은 이런 식으로 대형 운송 수단을 언제든 불러내고 다시 수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럼 가볼까요. 아가씨.”
“네.”
둘은 서로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지붕에서 도로로 날아 내렸다.
“그럼 다녀올… 헉!”
시장을 보려고 집을 나서던 아낙 하나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날아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당연하다는 듯이 인사를 건네며 미소를 짓는 유아의 모습에 아낙은 얼결에 인사를 건네고는 홀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같은 여자의 눈으로도 살짝 미소를 지은 유아의 모습이 한순간 여신의 그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음, 역시 안 되겠어.”
“뭐가요?”
“성녀로서의 영기가 너무 짙은 것 같아. 이대로 시내에 나갔다가는 모두들 여신이 강림했다며 엎드려 버릴지도 몰라.”
“에이, 농담도.”
확실히 과장이 섞여 있긴 했지만, 이대로는 역시 눈에 너무 띈다. 역시나 희망과 생명의 속성 때문인지 출산의 과정을 겪고 난 유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성모를 연상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마굿간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업어 온 것이 어제 같은데…”
유아에게 환상을 덮어씌워 그런 느낌을 좀 지우면서 형진이 그렇게 중얼거리자, 유아는 다시금 눈을 흘겼다.
“자꾸 그런 얘기만 하면 저 화낼 거에요.”
“응? 왜? 그만큼 몰라볼 정도로 예뻐졌다는 얘긴데.”
“그럼 그때는 미웠다는 거에요?”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귀여웠지. 콱 물어가 버리고 싶을 정도로.”
“변태.”
“뭘 새삼스럽게.”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는 둘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아낙은 이내 나가려던 것을 멈추고 다시 문을 닫으며 집안으로 들어갔다.
“시장가는 거 아니었어?”
정원의 화초에 물을 주러 나가던 남편이 그런 아낙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냥… 오늘은 쉬려고요. 어쩐지 몸이 허한 것 같아서.”
“…”
그렇게 처음부터 아낙 하나를 혼란으로 밀어 넣은 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시내로 접어들었다.
아운 제국의 수도와 마찬가지로, 이곳 카살 제르토나 역시 급속하게 발달하기 시작한 마법 문명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형진을 놀라게 만든 것은, 마법을 사용한 대형 간판이었다.
“여기서 이런 것을 볼 줄은 몰랐는데.”
사실 단순한 네온사인을 넘어선 지구의 그것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느낌마저 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마법 문명이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조악한 마법 간판이라도 상당한 비용이 들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치하여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을 설치하고 유지하더라도 이익이 더 크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라고 봐야한다.
시내 안쪽으로 들어가자 마차들이 사람들과 뒤엉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은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것인지 다소 위험해 보인다.
“저쪽이 시장인 것 같아요.”
수많은 인파가 정신없이 북적거리는 와중에도 유아는 과일로 보이는 무언가가 잔뜩 쌓여있는 점포를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는 형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나름대로 환상을 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모습은 다른 이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구식으로 어레인지되어 깔끔한 분위기를 풍기는 옷차림이 그랬고, 환상으로도 감춰지지 않은 존재감이 또한 그러했다.
어떤 맛있는 과일들이 있을까 하고 즐거운 표정으로 다가가던 유아였지만, 가판대로 다가서는 순간 흠칫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풍기기 시작한 역한 냄새 때문이었다.
“윽… 이, 이게 뭐죠.”
“글쎄.”
형진 역시도 당황해서 얼른 결계를 둘러 냄새를 막았다. 가을철에 은행나무 밑을 지날 때 으깨진 은행 열매로부터 풍겨 나오는 야리꾸리한 냄새는 차라리 이것에 비하면 향긋한 수준이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깨진 달걀과 우유를 며칠 동안 방치해 뒀다가… 아니다. 이런 걸 굳이 비교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끔찍하다. 그 정도의 냄새다.
“웁…”
달이를 가졌을 때도 하지 않았던 입덧을 이제 와서 경험하는 느낌이었는지, 유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뒷걸음질 쳤다. 결계로 막았어도 이미 느껴버린 냄새는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드닌 냄새는 처음인가 보네.”
상점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서 뒷걸음질 치는 유아의 모습을 보고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게 냄새는 고약하지만 사실 엄청난 놈이라우. 보통 즙을 내거나 말려서 가루를 내서 먹는데, 여자들은 피부가 좋아지고, 남자들이 기운 없어서 골골 댈 때도 효과 만점이지. 하두스 알지? 그거 주재료도 이거라오.”
“…”
무슨 만병통치약 파는 약장수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노점을 열고 파는 그런 식이 아니라 제법 번화한 거리에서 이렇게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팔고 있는데도 상당히 성업중인 걸 보면 거짓이라고 치부하기만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모양은 꼭 아직 익기 전의 녹색 빛을 띄는 오리나무 열매를 주먹만하게 키워놓은 것 같은 형상이다.
“음… 몇 개 줘보세요.”
“미, 미쳤어요?”
“괜찮아. 적당하게 처리해서 인벤토리에 넣어두면 되니까.”
“하지만…”
유아는 질겁하며 혹시라도 냄새가 밸까 무서웠는지 가까이 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지만, 형진은 간단하게 다듬는 법이라든가 각 부위의 효능을 들었다.
“이게 참 대단한 과일인 게, 버릴 것이 없거든. 껍질은 벗겨서 말려두면 해충들이 얼씬을 못해요. 배탈이 났을 때 껍질 가루를 손가락으로 요만큼 집어서 물이랑 같이 먹으면 즉효지. 혈압이 높은 사람이라면 하루에 하나씩 씨를 먹는 것도 괜찮고.”
“대단하군요.”
둘의 존재감에 동화되었는지 평소보다도 더 호들갑을 떨면서 그렇게 말하는 과일 장수 아주머니의 말에 형진은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흘려듣거나 하지도 않았다. 어떤 성분이 있고 어떤 효과를 갖추고 있는지는 확실하게 분석을 해봐야겠지만, 이 말이 전부 거짓말이라고 정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드닌을 포함해서 이곳에서 팔고 있는 과일 몇 가지를 종류별로 담고 그 효능에 대한 메모를 끝낸 형진은 다시 과일 장수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아까 말씀하신 중에 하두스라는 건 뭔가요?”
“응? 하두스를 몰라요?”
“하하, 저희가 이곳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
“흐음…”
형진의 대답에도 조금 이상하다 싶었던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과일 장수 아주머니였지만 별로 어려울 것 없다는 듯이 대답해주었다.
“몇 년 전인가 연금술사 하나가 이곳에 들어와 가게를 차렸지요. 처음에는 그냥 별로 특별할 것이 없는 약재점이었는데, 아드닌을 재료로 하두스라는 약을 만들어 팔면서 벼락 부자가 되었지. 이곳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랍니다.”
“아, 그랬군요. 그 가게는 어느 쪽에 있죠?”
“저쪽 골목을 돌아서…”
그렇게 하두스라는 약을 파는 가게의 위치를 확인한 형진은 계산을 치르려다가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오다보니 미처 이곳에서 사용되는 화폐를 챙겨오지 않은 탓이다.
대충 금이나 은 같은 것을 주면 어떨까 싶기는 했지만, 괜히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기 때문에 형진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응? 이건?”
한참 자신의 집무실에서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던 라만은 갑자기 눈앞에 뜬 무언가를 보고 화들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그의 눈앞에 당연하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퀘스트창이었다.
[물자 조달] -밤의 신께서 돈이 필요하시다.-필요한 물자: 대륙 중부에서 통용될 만한 화폐.
-수량: 두 사람이 한 달쯤 풍족하게 쓸 수 있을 정도. 많으면 더 좋고.
-보상: 공헌도 100. 단, 성의를 봐서 추가 보상도 지급 가능.
(주의) 급하다. 빨랑 내놔.
“…”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라만은 잠시 벙찐 표정으로 눈앞에 나타난 퀘스트 창을 바라보다가, 주의 사항에 적힌 글자가 재촉하듯이 빨간 빛으로 깜빡거리기 시작하자 이내 허둥거리며 대기 중이던 시종을 불렀다.
“여봐라! 가서 재무 대신 불러와! 급하다! 어서!”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후, 늦어버려서 죄송합니다.
밥 머그로 가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