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15
00815 187. 포교 =========================
일단 오랜 만에 한 자리에 모인 데다, 신들의 회합에 유아가 참여한 것 자체가 처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명목상 첫 번째 부인이기는 해도 여신들 틈에서 다소 존재감이 짓눌리는 형국일 수밖에 없었던 유아의 지위를 반신으로 올리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자리라 형진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 말만 해. 내가 오늘 아주 실력 발휘를 제대로…”
형진이 모처럼 그렇게 말을 꺼냈지만, 중간에 희망과 생명이 끼어들어 말허리를 싹둑 잘라버린다.
“알았으니까 절루 가. 여자들끼리 할 말이 있으니까.”
“응? 어, 그, 그래. 알았어. 그럼 편하게들 얘기해.”
결국 형진은 끽 소리도 못하고 얼른 주방으로 자리를 피했다.
아직 유아는 반신에 올라선 것이 아니고, 파편을 건네준다고 해도 여신들의 동의가 없으면 반신으로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물론 희망과 생명은 의견을 낸 당사자이고, 또한 유아가 그녀에게 속한 상태이므로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일은 없다. 침대 위에서는 왕으로 군림하더라도 바깥에서는 일단 머슴으로 있는게 편하다는 진리를 그는 이미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다.
형진이 그렇게 얼른 자리를 피하자 보호와 균형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얼른 형진의 뒤를 따른다. 맺어지고도 시간이 좀 지났으면 의존증이 좀 줄어들 것도 같은데, 어째 저 모습을 봐서는 그런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어휴.. 저 팔불출들.”
희망과 생명은 혀를 차고는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는 유아에게 말했다.
“일단 앉아봐.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네.”
사적으로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사이지만, 공적으로는 여신과 성녀다.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도 있는 입장인지라, 유아는 조심스럽게 희망과 생명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어 있을 것 없어. 어차피 반신으로 올라선 상태로 언제든 신격을 얻게 되면 결국 우리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게 될 테니까.”
“하지만…”
회장이 회식 자리에서 야자 타임을 하잔다고 사장이 간단하게 말을 놓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세상 물정 모르는 신입사원이라면 몰라도, 바로 아래 자리에 있는 사장은 그럴 수가 없는 법이다.
“다그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천천히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공포와 죽음의 한 마디에 희망과 생명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가. 하긴, 느닷없이 말 놓고 편하게 지내자고 덥석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넉살이 좋은 건 진 정도가 고작이겠지.”
유아는 그제서야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신이니 뭐니 해도 결국 이들 역시 진이라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그럼 그런 차차 바꿔 가는 걸로 하고. 사실 할 얘기가 있다고는 했지만 그리 심각한 얘기는 아니야. 단지… 네가 반신이 되고 다시 신이 되면 지금과 어떤 점이 달라질지에 대해 알려주려는 것 뿐이니까.”
유아는 그제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응? 왜?”
“반신이 되면 성녀도 그만둬야 하는 건가요?”
솔직히 유아는 아직도 자신이 반신이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연하지. 더 이상 누군가에게 속한 이가 아니라 홀로 오롯이 서는 존재로 거듭나는 거니까. 왜? 아쉬워?”
“그게…”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공포와 죽음이 다시 끼어들었다.
“그럼 여기서 기쁘다고 하겠어? 생각을 좀 해.”
아쉽다고 말하면 반신이 되어 다른 여신들과 동등한 자리에 서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고, 그렇다고 기쁘다고 말하기엔 지금까지 섬겨왔던 희망과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수준의 질문이 되어 버리는 셈이라고나 할까.
“어, 그렇게 되나. 미안.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아뇨. 사과하실 것까지야.”
너무나도 간단하게 사과하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이 좀 낯설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문득 성녀라고 불리면서도 막상 신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린다.
유아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가만히 앉아 있자, 희망과 생명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음… 일단 반신이 되면 아바타를 쓸 수 있게 돼. 알지?”
“네.”
“어떻게 활용하든 상관은 없지만, 너무 저 녀석 하자는 대로 다 따라하고 그러진 마. 저 변태 녀석 말대로 하다가는 그야말로 끝이 없으니까.”
“…”
유아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리고 말았다. 희망과 생명의 말을 듣는 순간, 과거 미엘이 분신을 써서 형진과 밤일을 치르던 장면을 떠올린 탓이다.
정확히 뭘 떠올리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도 그녀의 신체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는 희망과 생명도 너무나 명확하게 느끼고 있었다. 갑자기 화끈 달아오르는 유아의 반응이 마치 전염되듯 전해지자, 희망과 생명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크흠. 뭐 그건 일단 제쳐두고… 그 외에도 반신이 되면 달라지는 일들은 여러 가지가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엘리시온에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게 되는 점이지.”
“엘리시온… 안식의 요람이라 불리는…”
“인간들에게는 어떻게 인식되는지 모르겠지만, 정확히는 신격에 타격을 입었을 때 그것을 치유하고 고통을 막아주는 힘을 지닌 곳이야. 보통은 본신은 엘리시온에 두고 아바타로 바깥 세상을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지.”
그런 식으로 희망과 생명은 반신이 되었을 때 알아야 할 것들을 자상하게 유아에게 설명해 주었다. 유아는 자신의 성녀이기도 하고, 오랫동안 같은 것을 보고 느끼다 보니 도저히 남처럼 여겨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를 갖는 것도 인간과는 달라. 네가 그랬던 것처럼 임신을 하게 되면 정해진 기간 동안 꼼짝도 못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원한다면 언제 낳을 것인지 스스로 결정할 수도 있어. 물론 아이를 낳을 준비를 하면서도 아바타를 통해 얼마든지 바깥을 나돌아 다닐 수도 있지. 적어도 달이를 낳을 때처럼 처박혀 있을 필요는 없다는 얘기야.”
희망과 생명의 말을 받듯이 이번에는 공포와 죽음이 설명을 이어간다.
“하지만 반대로 곤란한 점도 있어. 신의 아이는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을 들여야 탄생하는 존재야. 때문에 네가 원한다면 신의 아이가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만들 수도 있어. 물론 그건 저 녀석과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문제겠지만.”
유아는 가만히 그런 식으로 두 여신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건네는 모든 얘기를 새겨듣고 있다가, 어느 정도 그 내용이 마무리 되자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두 여신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무슨 뜻이야?”
갑자기 너무나도 정중한 인사를 받게 되자 희망과 생명은 왜 이러나 싶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제는 유아도 안다. 정말로 짜증나서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감사합니다.”
“흠. 흠. 뭘 새삼스럽게.”
부끄러운지 시선을 돌리며 다시금 괜히 헛기침을 하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에 유아는 방긋 미소를 지은 채 다시 말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언니?”
희망과 생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반신이라고는 해도 신격만 갖춰지면 신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돼. 그리고 신들에게는 지위의 고하가 따로 없게 마련이지. 비록 우리들이 대신이라고 불리고 있긴 해도, 그것도 이제는 유명무실한 호칭이 되어 버렸고. 그러니 그냥 편한대로…”
“그럼… 안 되나요?”
“…”
안 된다고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다. 희망과 생명은 찬찬히 그럴 필요가 없음을 설명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뭐… 안 된다는 건 아니고.”
알고 보면 희망과 생명은 이런 식의 압박에 꽤 약하다. 어찌보면 그녀가 호구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런 점 때문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왕성을 드나드는 그녀의 모습을 못 본 척 넘기고 있었으면서도 유아는 그런 여신의 속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언니.”
“어, 그래.”
여우같은 계집애.
대번에 활짝 미소짓는 유아의 모습을 보고서야 희망과 생명은 당했다는 생각을 떠올렸지만, 생각해 보면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의 여신이 하나쯤 있어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형진이 손수레 하나를 밀고 들어온다. 보호과 균형은 그 옆에서 조심스럽게 쟁반 하나를 받쳐 든 채 뒤따르고 있었다.
“이야, 이곳에서 좋은 재료를 발견해서 말이지. 생각 난 김에 한 번 만들어봤어.”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을…”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형진의 행동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별다른 기색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에 임하고 있던 공포와 죽음마저도 눈이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먹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예쁘고 아기자기한 과자들이 접시에 예쁘게 담겨져 나왔기 때문이다.
“마카롱 스타일도 있고, 화과자 스타일도 있어. 한과 형식으로 만든 것도 있고. 차랑 같이 먹으면 아주 좋아. 자, 받아.”
“어, 그래.”
조심스럽게 차를 따라주는 형진의 행동에 희망과 생명은 물론이고 공포와 죽음마저도 엉겁결에 잔을 받고 말았다.
잔에 따랐을 뿐인데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은은한 향기가 물씬 피어오른다.
“이곳에서 즐겨 마시는 차라더군. 마음에 들 거야.”
“…”
형진은 보호와 균형, 그리고 유아에게도 찻잔을 건네고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녀들의 잔에도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어서 마셔 보라는 듯한 시늉을 연신 해보인다.
어쩐지 심부름을 마치고 와서 엄마에게 칭찬 받기를 기다리는 아이 같은 모습이다. 보호와 균형, 그리고 유아는 그런 형진의 모습에 웃음을 짓다가 그런 서로의 기색을 알아차리고 마주 미소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아… 좋다.”
“그러게. 마시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야.”
희망과 생명, 그리고 공포와 죽음에게서 바로 찬사가 터져 나온다. 물론 그건 유아나 보호와 균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에효. 편히 쉬라고 보냈더니 이런 거나 하고 있었던 거야?”
핀잔 섞인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희망과 생명은 어느 틈에 과자를 입에 넣고는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것도 마음에 들어. 너무 달지 않으면서도 차의 향기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전 이 꽃봉오리 모양의 과자가 좋아요. 쫀득거리면서도 달콤한 게 너무 좋아요.”
형진이 내놓은 과자는 순식간에 동이 나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여신들의 욕심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더 없어?”
“어, 그게… 준비한 건 이게 전부인데.”
“쳇. 뭐야, 이게. 입맛만 버렸네.”
툴툴거리는 희망과 생명의 말에 형진은 옳다 싶었는지 다시 말했다.
“그럼 다 같이 시장이나 보러갈까?”
“다 같이?”
그러자 유아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언니들이랑 다 같이 나갔다가는 장도 제대로 보기 힘들 걸요.”
“하긴… 그것도 그렇네.”
유아만 데리고 나가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형진에 대한 부러움으로 가득 차는 마당에, 꽃처럼 아름다운 세 여신마저 대동하고 나섰다가는 도시 기능이 마비될지도 모른다.
“별 걸 다 걱정이야. 이러면 되는걸.”
희망과 생명은 문제없다는 듯이 말하고는 이내 퐁 하는 소리와 작은 사이즈로 변해서 형진의 어깨 위에 올라 앉았다.
“반신이 되면 이런 것도 가능해. 아, 이미 알고 있으려나.”
“네. 보호와 균형 언니께서 그런 모습으로 지내는 모습을 한동안 봐서.”
“…”
보호와 균형은 언니라는 유아의 호칭에 눈이 동그래졌다.
“아,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마음에 안 드시면…”
“아뇨. 아뇨. 하지만… 제가 그렇게 불려도 좋은지…”
“무슨 말씀을요. 당연히 그래야죠.”
언니라니. 그런 식으로 불려본 적이 없는 보호와 균형으로서는 사근사근한 유아의 말에 이미 좋아서 흐물흐물 녹아버리기 직전이다. 여기서 한 번 더 톡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대로 와르르 무너져 버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역시 유아. 형진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이 헛되지 않았던 모양인지, 어쩌면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될 수도 있는 세 여신을 순식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건 형진이나 공포와 죽음 정도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늦어서 죄송합니다.
뻘짓을 하다보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