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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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전야제
비록 전대 황제의 암살이 실질적으로는 처형이나 다름없었다 하더라도,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는 왕궁 내부에서 벌어진 암살이 충격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때문에 황실에 의해 추대된 황제는 은연중에 궁의 보안을 보강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집행자의 사례를 통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엘의 말대로 결계가 강화된 것 외에도,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자들이 자리 잡은 것이다.
“수호자라는 자들의 능력은 어떤 식이죠?”
형진의 물음에 제랄딘이 답했다.
“흔히 우리들은 그렇게 불러요. 신성 폭력배라고.”
“네?”
호구에 미친놈에 이젠 폭력배인가. 뭔가 성직자들의 별명치곤 참 특이한 느낌이다.
“놈들의 교리 자체가 그래요. 좋은 주먹 냅두고 왜 말로 하냐. 이게 그쪽의 가장 중요한 교리거든요.”
“쿨럭.”
크루그가 피식 웃으면서 하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에 형진은 사래가 들릴 뻔했다.
“그게… 교리라고요?”
“쓰는 능력도 그래요. 헌신의 일격이라는 일종의 신성력을 두르고 다니는데, 이게 좀 사기거든요. 방어 무시에 50퍼센트 확률로 무조건 상대에게 치명타가 들어가요. 게다가 호구신의 사제들처럼 자체 치유도 가능하고요.”
“허…”
“갑옷도 안 입고 무기도 안 들고 하얀 포대기만 뒤집어 쓴 채 몸에서 빛을 내며 괴성과 함께 미친 듯이 달려드는 자들이 있다면 바로 그 놈들이니 일단 피하세요. 교리로도 알 수 있지만, 일단 두들겨 패서 눕혀 놓지 않으면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놈들이거든요.”
제랄딘의 설명에 크루그가 피식 웃으며 한 마디 덧붙인다.
“두들겨 패서 눕혀 놓으면 알아서 물러나니까 대화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점도 문제죠.”
“다만 죽도록 두들겨 패도 정말로 죽이거나 하진 않아요. 페스타처럼 이미 죽은 자들이 상대라면 얘기가 다르긴 하지만요. 그들에게 있어 폭력은 어디까지나 교화의 수단이거든요. 그 점에서는 공포와 죽음과 서로 교리가 충돌하는 면이 있는 셈이고, 그래서 종종 부딪히는 경우가 있으니까 알아두시는 것이 좋아요.”
“아하.”
형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크루그가 다시 말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녀석들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어요. 적어도 페스타 상황에 한해서는 꽤 쓸만한 조력자가 될 수도 있죠. 그 외의 다른 임무에서 만나면 참 골치 아프긴 하지만요.”
“따로 상대할 방법은 없고?”
보통 사람도 아니고 그런 깡패 같은 놈들이 지키고 있으면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다.
“상대를 안 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에요.”
“무슨 소리야?”
“녀석들은 도망치는 것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이동기로 적당히 도망치면 어느 정도 쫓다가 그냥 멈춰서요. 물론 개중에는 그래도 미친 듯이 쫓아오는 놈들이 있긴 하지만, 집행자처럼 전문적인 이동기가 있는 건 아니라서 결국 제풀에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죠.”
결국 수호자라는 놈들은 거점을 방어하거나 말뚝 딜에 특화된 녀석이란 얘기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며 왕궁으로 접근해 가는데, 문득 제랄딘이 물었다.
“가끔 보면 진님은 좀 이상한 면이 있어요.”
“어떤 면을 말씀하시는 건지?”
“꼭 다른 세상에서 살다 오신 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상식적인 얘기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거나,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을 꺼내 놓으신다거나.”
“하하… 그런가요.”
제랄딘의 말에 형진은 속으로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떠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러나 제랄딘이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앞으로는 조심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사실 낙인을 건네받을 때, 인벤토리 안에 있던 서적에 다른 신들의 추종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긴 했다. 사용하는 문장의 형태라든가, 어떤 종류의 힘을 사용하는지에 대한 내용인데, 신뢰와 헌신에 대해서는 딱 한 줄 밖에 적혀 있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니 상종할 필요 없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설명을 들으니 그게 그런 의미였나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형진에게 낙인을 물려주었던 주정뱅이 역시 크게 한 번 물린 적이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아무래도 책을 읽든가 하는 식으로 이 세계에 대한 상식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미엘의 뒤를 쫓기를 얼마나 했을까. 마침내 그들은 왕성을 두르고 있는 성벽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단 들어가기에 앞서서, 각자의 목표가 뭔지 정확히 파악을 해두는 것이 좋겠네요.”
미엘의 말에 형진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전 브라우니를 챙기러 갈 생각입니다.”
“역시 그랬군요.”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고자를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응징을 했다고 형진은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의 심기를 건드린 부분도 바로 황자의 욕망과 관계가 있으니, 그 욕망 자체를 뿌리 뽑아 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한 응징 아니겠는가.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는 형진이 물었다. 그러자 미엘은 제랄딘을 바라보았고, 처음 페스타에서 만났을 때처럼 검은 색 일색의 날렵한 차림을 하고 있던 제랄딘은 이렇게 대답했다.
“번뇌의 고리는 확실하게 끊어버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제랄딘은 이미 레이그릭 황자에게 충분한 모욕감을 주었다. 소인배는 작은 원한에 집착하는 법. 형진이 꾸민 일 때문에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니 이제 제랄딘에게 집적거릴 이유마저 사라져 버린 레이그릭이지만, 그것이 일종의 도착으로 변질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게다가 소그마의 일 역시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하나씩 꼬투리를 잡고 넘어가면 자칫 가문 사이의 문제로 비화하여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차라리 그렇다면, 확실하게 후환이 될 만한 빌미를 지워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물론 이런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그간 제랄딘이 황자 때문에 받았던 모든 스트레스를 이 기회에 날려버리고 싶은 것도 한 가지 이유다.
형진은 제랄딘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황자의 궁까진 같이 간 다음 둘로 나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브라우니를 찾을 방법은 생각해 두셨나요?”
“네. 회식에 쓰인 음식들이 브라우니의 손을 거친 것이라길래 냄새를 기억해 두었습니다.”
“처음부터 손에 넣으실 생각이셨군요.”
“브라우니 입장에서도 황자보다는 제쪽이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그건 모르는 일이죠. 후후.”
미엘은 그렇게 웃음을 짓고는 몸을 돌리더니 성벽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 멈춰 서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닿은 영역이 옅은 신기루 같은 빛을 내뿜으며 일종의 문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낸다.
“오세요.”
그들은 미엘이 만들어낸 문을 통해 결계 안으로 진입했다. 왕궁을 둘러싼 결계는 상당히 강력했지만, 미엘의 실력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미엘처럼 오랜 수명을 지닌 자들은 인간처럼 치열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는 경향이 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같은 마법사라도 오히려 인간이 더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미엘의 경우에는 애초에 마법을 배우게 된 이유가 자신에게 주어진 천형을 마법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함이었기 때문에 학구열 또한 인간에게 뒤떨어지지 않았고, 거기에 세월까지 합쳐지니 이제는 적어도 부여 계열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르기 어려운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결계 안으로 진입한 집행자들은 은신으로 모습을 감춘 채, 제랄딘의 안내를 받아 황자의 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왕궁의 복잡한 내부 구조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보안 시설이라 할 수 있다. 왕궁 안에서 은밀히 뭘 하기 위해서는 일단 미로처럼 복잡한 내부 구조를 숙지할 필요가 있는데, 이 때문에 내부자의 도움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랄딘은 이 나라 최고 귀족의 한 사람이었고, 행사 등을 통해 왕궁을 드나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내부자는 아니더라도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은 이미 넘치도록 갖추고 있는 셈이다.
마침내 황자의 궁에 도착한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꽤 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앞서 마차 붕괴로 인해 황자가 입은 상처는 심각한 중상이었고, 마법이나 기타 여러 가지 힘으로 치료를 시도했다 한들 하루 아침에 나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황자는 지금 고열에 시달리며 크게 앓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황자를 간호하기 위해 궁의 모든 인력들이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이다.
[이곳부터는 황자의 처소 외엔 따로 결계가 존재하지 않아요. 여기서 갈라지는 편이 좋겠군요.] [그럼 일이 끝나는 대로 지금 이 장소로 다시 모이면 될까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제가 마킹을 해둘게요.]미엘의 말과 함께 현재 그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위치에 파란색 화살표가 나타난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황자의 궁 안에서는 어디서든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조심하시길.] [진님이야말로.]미엘과 제랄딘이 먼저 모습을 감추자, 형진은 크루그를 데리고 낮에 기억해 두었던 브라우니의 냄새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네 녀석은 왜 따라 온 거야?]냄새를 추적하며 형진이 묻자 크루그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혹시 이것도 업적으로 인정되지 않을까 해서요.]그러고 보니 이전에 수도의 총괄 지부장이 황제를 암살했던 것이 업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 이유라면 제랄딘님을 따라가는 편이 맞지 않아?] [그럼 지금이라도 갈까요?] [미안. 가지 말아줘.] [킥.]만에 하나, 신성 폭력배라 불리는 신뢰와 헌신의 수호자와 맞닥뜨리기라도 한다면 솔직히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론 죽도록 두들겨 패기만 할 뿐, 죽이지는 않는다는 얘기를 듣긴 했어도 왕궁 한복판에서 죽도록 두들겨 맞고 기절이라도 하면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경우 크루그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보험이 되는 셈이고, 녀석 역시 그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형진의 곁에 남은 것이다.
형진이 크루그와 함께 브라우니의 냄새를 추적하는 동안, 제랄딘은 미엘과 함께 황자의 거처로 스며들었다.
“이제 우린 어쩌지.”
“그러게.”
곳곳에 시녀들이 모여 한숨을 짓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레이그릭 황자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들을 건드리는 것으로 소일했고, 때문에 지금은 궁 안에서 그와 밤을 보내지 않은 시녀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시녀들로서도 일단 아이라도 낳으면 바로 신분 상승과 직결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유혹을 하지는 않더라도 은근히 황자의 손길이 자신에게 닿기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레이그릭 황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면서, 유력한 계승 후보로 손꼽히던 그의 위치가 허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 황실에는 세 명의 황자가 존재한다.
첫째 황자는 몸이 허약하여 갖은 수를 쓰고 있음에도 오늘 내일 하는 실정. 그 와중에도 황자비가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수태에 성공해서 경사스런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지만, 막상 낳아 놓고 보니 딸인데다 수태를 위해 무리한 탓에 이제는 정말 숨만 간신히 붙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레이그릭과 세 번째 황자인데, 이 막내는 미천한 신분의 시녀에게서 낳은 아이인데다 늦둥이라 이제 막 걸음마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까지 해서, 누구도 레이그릭 대신 이 막내 황자를 다음 왕위에 올릴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랄딘이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차마 손을 쓰지 못한 것에는 바로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황자의 처소에 들어가기 전, 미엘이 다시 한 번 그렇게 의사를 확인하자 제랄딘은 이렇게 답했다.
[물론.]제랄딘의 확고한 대답을 들은 미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황자의 처소를 감싸고 있는 결계에 틈을 만들었다.
[이 결계는 상당히 강력해서, 제가 지키고 있어야만 해요. 가급적 빨리 처리하고 돌아오세요.] [알았어.]제랄딘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결계 안쪽의 처소에는 침통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레이그릭 황자의 생모인 둘째 황비는 울다 지쳐 실려가 버렸고, 안쪽에는 몇몇 시녀들만이 우울한 표정으로 고열에 시달리는 레이그릭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살핀 제랄딘은 시녀들을 조용히 기절시킨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레이그릭을 깨웠다.
“누구…”
레이그릭은 몽롱한 와중에도 시커먼 복면을 뒤집어쓴 누군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에 흠칫 놀랐고, 다음 순간 뱀처럼 자신의 목을 휘감고 있는 무언가를 보고는 몸을 떨었다.
제랄딘은 그런 레이그릭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이듯 말했다.
“이제 전야제에는 함께 갈 일이 없겠군요. 전하.”
“뭐?”
레이그릭은 그 말과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괴한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입으로 내뱉기도 전에, 그의 목을 휘감고 있는 무언가가 단숨에 죄어들며 목뼈를 부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