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24
00824 189. 발표 =========================
중대 발표가 이어지는 것은 지구만의 얘기는 아니었다.
“아…”
세 여신들에 의해 엘리시온을 방문한 유아는, 말로만 들었던 신들의 요람을 직접 체험하고는 조금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 신들의 요람이라고 하면, 인간들의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모든 것들로 채워진 낙원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엘리시온은 단지 요람 그 자체일 뿐이었다. 바깥에서 상처입고 지친 신들이 돌아와 쉴 수 있는 요람. 정말로 단지 그것 뿐이었던 것이다.
“별 거 없지?”
“그게…”
“굳이 좋게 말하려고 할 필요 없어. 이곳이 재미없는 곳이라는 사실은 모든 신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신들이 어떻게든 인간들의 세상에서 머물기 위해 발버둥치는 이유도 결국은 그래서랄까.”
“아…”
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국이 정말로 모든 즐거움과 쾌락을 모아둔 곳이라면, 굳이 신들이 인간들의 세상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테니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재미없는 곳이기에 오히려 편히 쉴 수 있고 바깥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자, 그건 그렇다 치고.”
희망과 생명은 엘리시온 안에 마련된 자신만의 공간으로 유아를 이끌었고, 다른 두 여신도 그 뒤를 따랐다. 본론은 지금부터였기 때문이다.
“널 굳이 이곳에 부른 이유는… 지금껏 우리가 알리지 않고 있던 일들을 털어놓기 위해서야.”
“…”
유아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비밀이라고 하면 뭔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느낌을 주겠지만, 자신과 함께 같은 남자와 맺어진 여신들의 비밀이라면 그런 두근거림이 너무 심해서 오히려 부담스러워지게 마련이다. 신들의 비밀이란, 그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니까.
“그렇다고 그렇게 긴장할 건 없어. 오히려… 긴장해야 할 건 우리들이니까.”
“무슨…”
“잘 들어. 사실은…”
우선은 희망과 생명부터. 그녀의 말이 이어지자 유아는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보, 봉인이요? 제 몸 안에?”
“응.”
“그럼… 설마…”
“내 입으로 말하긴 부끄러운 일이지만, 봉인 되고 난 뒤에 너와 진 사이에 있었던 일은 나도 모두 알고 있어. 미안.”
“…”
유아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뭔가 중대한 비밀이라는 분위기를 풍기긴 했지만, 설마 이런 내용일 줄이야.
하지만 비밀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실은… 나도 고백할 것이 있어.”
“언니도요?”
“응.”
“…”
이미 희망과 생명의 비밀을 듣는 것만으로도 너무 놀라서 정신이 잠시 외출했다 돌아온 유아로서는 공포와 죽음마저 분위기를 잡으며 그렇게 입을 열기 시작하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제랄딘과 아란은 바로 나의 아바타야.”
“네?”
하지만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해도 역시 소용없는 일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전에 임한 복싱 선수가 전혀 의외의 장소에 강렬한 훅을 얻어맞은 것처럼, 유아는 다시 한 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 그게… 무슨…”
“미안.”
“…”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인가 싶어 바라보았지만, 공포와 죽음은 유아에게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를 할 뿐이다.
“허…”
유아는 잠시 혼란스러운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때론 자매처럼, 때론 경쟁자로서 마주했던 그 두 사람이 사실은 눈앞의 여신과 동일 인물이었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굴었다니. 이제 와서라고 생각할런지도 모르지만, 유아로서는 살짝 배신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그래서였던 건가.
오히려 긴장해야 할 것은 자신들이라는 희망과 생명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잠시 황망한 기분을 느끼던 유아의 시선은 이제 보호와 균형에게로 넘어갔다.
“언니도… 있나요? 비밀.”
“응? 아니, 저기, 그게… 그러니까…”
희망과 생명, 그리고 공포와 죽음이 지금껏 유아에게 숨겨왔던 중대한 비밀을 털어 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자신에게 모두의 시선이 돌아오자 허둥대기 시작했다.
뭔가 비밀을 말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보호와 균형이 그런 걸 감추고 있을 이유가 없다. 아니, 그녀 자신은 숨기려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그냥 다 드러나 보이니 비밀로 감추는 의미조차 없다.
유아는 그렇게 허둥거리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녀의 한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보호와 균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그야말로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실은…”
유아는 물론이고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다른 두 여신마저도 정말 뭔가 털어놓으려 드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이건 누가 봐도 정말 뭔가 중대한 내용을 숨기고 있는 기색이었기 때문이다.
“잠깐만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비밀이 있는 거에요?”
너무 놀란 유아가 그렇게 되묻자, 보호와 균형은 고개를 더욱 수그린 채 끄덕거리기만 했다.
“놀랄 일이네…”
“그러게.”
조금은 홀가분한 심정으로, 하지만 반쯤은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되는 느낌으로 유아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두 여신은 지금껏 보호와 균형이 자신들에게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도 채지 못한 일에 대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후우… 알았어요. 말해 보세요.”
“그게…”
작게 한숨 쉬는 유아를 흘깃 바라보며, 보호와 균형은 더듬더듬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
“…”
“…”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 말이 나올 때마다, 유아는 물론이고 두 여신마저 아연함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은 표정이다가 나중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입이 떡 벌어진다.
“맙소사…”
“도대체 그 변태는…”
“진… 당신은 정말…”
보호와 균형의 비밀이란 건 사실 별게 아니었다. 형진과의 사이에 있었던 이렇고 저렇고 그런 기기묘묘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과연 변태. 다른 아내들과는 달리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하는 보호와 균형의 행태를 빌미로 참 이런 저런 요런 그런 행위를 잘도 했던 모양이다.
“그걸 시킨다고 하냐…”
“하, 하지만…”
“됐다. 그게 어디 네 잘못인가. 그 망할 변태 녀석의 정신세계 탓이지.”
희망과 생명의 말에 보호와 균형은 차마 고개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한 채 이제 완전히 무릎에 닿아 버릴 지경이다.
“풉!”
바로 그때, 유아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게 웃을 일이야? 내 당장 그 변태를 그냥 콱!”
“하지만… 푸?.”
“…”
유아의 웃는 모습에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희망과 생명은 결국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얼핏 보면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내심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공포와 죽음 역시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잔잔하게 미소를 지었다. 단지 보호와 균형만이 유아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고개가 숙여져서 이제는 아예 무릎 위에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을 뿐이다.
“죄송해요. 이렇게 웃으려는 생각은 아니었는데, 보호와 균형 언니에게 이런 저런 일을 시킬 때 진의 표정이 어땠을지 상상하니까 나도 모르게 그만.”
“쿱!”
“푸핫!”
인중이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헬렐레 하고 있는 형진의 모습을 떠올려 버린 두 여신도 결국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상상이 아니라, 형진이라면 정말 그러고도 남을 만한 녀석이니 상상이라고는 해도 묘하게 현실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셋은 그렇게 웃다가 울상이 되어 버린 보호와 균형을 달래고 나서야, 어느 새인가 어색하고 딱딱했던 분위기마저 날아가 버린 것을 깨달아 버렸다.
“확실히, 그런 일이라면 저라도 쉽게 털어놓거나 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두 분 모두 그리 마음 쓰지 마세요.”
“고마워.”
“나도.”
한바탕 웃고 난 다음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호구성이 다시 한 번 폭발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유아 역시 형진 옆에서 어느 틈엔가 여우가 다 되어 버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마음 넓은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여신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이려는 정치적인 포석인지도 모른다.
사실 여기서 유아가 화를 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이런 모든 것을 다 알면서도 형진은 이미 여신들을 포용한 상태이고, 지금 자신이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해봐야 그 결과가 바뀔 일도 없다. 같은 여자로서 이해가 가는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니 여기서는 역시 좋게좋게 해결을 보는 것이 낫다. 적어도 유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보호와 균형 언니의 일은 가만히 넘어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 저요?”
분위기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바뀌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던 보호와 균형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맞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얘가 자신에게 꼼짝 못한다는 걸 빌미로 그런 짓을 하면 돼? 이래봬도 여신이라고!”
“아니, 이래봬도 라는 말이 어쩐지 더 신경이 쓰이는 데요오…”
“맞아. 그 변태를 이대로 놔둬선 안 돼. 자칫 추종자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세상은 지옥이 되어 버릴 거야. 변태 지옥!”
“전 그럼 이미 변태 지옥을 경험해 버린 건가요오…”
보호와 균형의 기어들어가는 말은 무시된 채 여신들의 모임은 순식간에 형진의 변태성을 성토하는 자리로 변했다.
“어쩐지. 그 날 갑자기 그런 걸 요구한 이유가 있었어. 나한테도 시험해 보려고 했던 거야.”
“언니도 그랬어요?”
“뭐야. 그럼 너도?”
“어휴. 그 변태는 도대체…”
공통의 적이 있으면 쉽게 뭉치는 법이라던가. 그것은 여신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한참이나 남편의 변태성을 성토하던 여신들은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지낸 뒤에야 마침내 다시 앙그릴로 돌아가 지구에서의 일을 마치고 돌아온 형진과 마주했다.
“그래. 얘기들은 잘 나누고 온 거야?”
아내들의 표정이 뭔가 심상치 않은 데다,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려버렸기 때문에 뭔가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묻는 형진을 향해 희망과 생명이 말했다.
“너, 앞으로 얘한테 그런 일 시키지 마!”
“응? 그런 일? 무슨 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한, 천연덕스러운 형진의 표정에 희망과 생명은 발끈하며 외쳤다.
“변태짓 말이야! 감히 입에 올리기도 망측할 정도야. 네 녀석이 변태인 줄은 알았지만, 어떻게 그런!”
“아하… 그거 말인가.”
하지만 형진은 별로 놀라거나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무슨 얘기들을 한 건가 했는데, 그런 얘기를 한 거였어? 난 또 뭐라고.”
“뭐야?”
“그럼… 앞으로는 그냥 얌전하게 뽀뽀만 하고 손만 잡고 잘까?”
“어, 그건…”
순간 여신들은 말문이 막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들은 부부다. 어린 애도 아니고 손만 잡고 뽀뽀만 하고 잠들어 버리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다.
“어젯밤에는 그렇게 좋아하더니. 정말로 내가 변태짓을 그만둬 줬으면 좋겠어?”
“…”
형진의 눈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던 여신들은 시선의 끝에 위치한 공포와 죽음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모르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그런 태도만으로도 여신들은 어젯밤 좋아했다는 누군가의 정체를 대번에 알아차리고 말았다.
“너… 설마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었던 거야?”
희망과 생명이 으르렁거리며 말하자, 공포와 죽음은 모르는 척 대답했다.
“제랄딘은 내 아바타이긴 하지만, 사실상 별개의 개체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희망과 생명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말이라고 해!”
“아, 그러고 보니 바쁜 일이 생각나서.”
“어딜 도망가!”
슬며시 자리를 피하려는 공포와 죽음, 그리고 그녀를 뒤쫓는 희망과 생명의 모습에 형진은 물론이고 유아마저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사실 유아로서는 여신들과 같은 반열에 서게 된다는 것에 대해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큰 부담감을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도 알 수 있었다. 신이 된다해도 지금의 관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리고 여신이라고 해도 결국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동등한 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