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33
00833 192. 전조 =========================
사실 이런 식으로 방벽의 일부가 무너진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물론 이런 식의 작은 균열을 통해 포트니아 테론과 동등한 수준의 힘을 가진 존재가 넘어오는 일은 없었다.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이고, 그것의 힘이 자신과 동등하다고 느끼게 된다면 일단은 경계하며 정찰을 보내려는 것이 보통이니까. 적어도 압도적인 힘으로 방벽을 일거에 무너뜨릴 정도가 아니라면 상대 역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포트니아 테론 역시 마찬가지.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그녀가 취할 수 있는 대책이라고는 티폰을 동원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고작이라고는 해도 티폰은 그 자체로 천체를 집어삼키는 포식자. 어지간한 상대는 티폰 한두 마리만으로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다.
다만 티폰은 한 가지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제대로 이성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일단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적아를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 포트니아 테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지만, 일단 싸움이 되어버리고 나면 눈앞의 적을 쓰러뜨리든 먹어치우든 할 때까지 통제 불능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형진이 직접 나서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막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게다가 이제 형진은 언데드의 힘조차 굴복시키려 하는 상황. 만약 균열을 통해 넘어온 것이 신급의 존재라도 그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포트니아 테론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인 셈이다.
“여긴가.”
급히 공간을 넘어온 형진 눈앞에서 우주가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방벽의 일부가 무너지면서 공간 그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우주로부터의 침략이 골치 아픈 것은,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느 곳으로 적이 넘어올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통상적으로 생각되는 공간이라는 개념은 다른 우주와의 연결에 있어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기 쉽다. 우주라는 공간의 거대함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다른 우주 역시 그 정도의 광대함을 지니고 있으리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연결 시에 발생하는 아주 작은 오차로도 두 우주 사이에 발생한 연결지점의 위치 또한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언제 어느 장소에 균열이 생길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그래서 방벽이라는 개념이 더욱 중요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다른 우주로부터의 연결을 차단하는 것을 넘어, 만에 하나 발생할지도 모르는 균열의 위치를 최대한 포트니아 테론이 위치한 언데드의 영역 근처로 한정하는 효과를 지닌다. 그녀가 티폰을 대응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최소한 언데드의 영역 안에서라면 언제 어느 장소에 균열이 발생하더라도 신속하게 티폰을 보낼 수 있으니까.
아직 완전히 균열이 생성되어 무언가가 넘어오기 전임을 확인한 형진은 서둘러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방어측이 지닌 가장 큰 이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상대의 공격에 대해 미리 이런 저런 준비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활한 우주 한복판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가장 먼저 위성을 살포했다. 이 위성들은 그 자체로 형진의 눈이 되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성물을 통해 보호의 성역과 황혼의 결계를 발생시켜서 싸움의 여파가 주위로 퍼지지 않도록 만든다.
그렇게 일단 위성들이 주위에 자리를 잡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비로소 밤의 권능을 발휘할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곧바로 권능을 발현하려던 그였지만, 문득 주위에 가득 들어찬 언데드의 힘을 보고는 다른 방식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기왕이면 있는 걸 쓰는 것이 좋겠지.”
이미 주위에 넘치도록 쌓여있는 언데드의 힘을 활용해 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것은 이미 완전히 언데드의 힘에 잠식되어 버린 포트니아 테론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일이다. 비록 정제하는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언데드의 힘을 직접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시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이런 모험을 하는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진은 밤의 권능을 이용해 언데드의 힘을 통제하는데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상황이었고, 만약 성공한다면 형진은 스스로가 지닌 힘의 소모가 전혀 없는 상태로 주위에 거의 무한하게 쌓여있는 언데드의 힘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이점으로 작용할지는 따로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후우우…”
깊게 심호흡을 하고나서 주위를 감도는 언데드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을 정화하여 밤의 권능을 발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순식간에 형진의 주위에는 뭉클대는 검은 구름 같은 것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것은 이내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완전한 암흑. 형진과 그가 허락한 존재외에는 다른 누구도 그 공간 안에서 자신의 감각을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적어도, 밤의 권능을 능가할 무언가를 지니지 않은 이상은.
하지만 형진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다른 우주의 존재와 처음 마주하는 것이니 만큼,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권능과 힘은 이미 이 우주에서 포트니아 테론을 제외하고는 비교할 만한 대상조차 없는 상태지만, 상대는 그 포트니아 테론이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는 무언가이다.
구구구궁.
마침내 공간이 비명과도 같은 울림과 함께 찢겨지며 그 안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소리를 전달할 매질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공간이 찢겨질 때 발생하는 파동은 어김없이 형진의 몸을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사방에 암흑이 들어차 단 한 줌의 빛도 존재할 수 없는 공간 안에서도 이 모든 현상은 형진의 눈에 똑똑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찢겨지는 공간 속에서 무언가 구불텅거리는 것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휘청거리듯 마구 휘어지는 긴 몸을 보는 순간 형진은 곧바로 무언가를 연상했다.
“애벌레?”
그것은 영락없이 갑충의 애벌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금 과장되어 보이는 머리에 작은 다리가 붙어있고, 긴 몸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옆구리에는 숨구멍으로 보이는 것이 나 있었으며, 공간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에서는 연신 검붉은 진액을 쏟아내고 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호랑나비의 애벌레와 비슷한 형상이다.
하지만 모양과는 달리, 이 생물은 거대한 빌딩을 연상시킬 정도로 거대했다. 티폰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구 외의 다른 세계라면 출현만으로도 문명 전체를 혼돈으로 몰고 갈 정도의 크기다. 아니, 지구에서라도 상당한 피해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열린 공간이 아니라, 찢겨진 공간을 뚫고 나오면서도 고작해야 거죽에 생채기 조금 나는 정도의 상처 밖에는 입지 않을 정도의 방어력을 갖추고 있다고 봐야 할 테니까.
애벌레 형상의 무언가를 내뱉은 공간의 균열은 곧바로 복원력이 발생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공간 자체의 속성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포트니아 테론의 의지로 인한 현상이기도 했다.
형진은 더 이상의 무언가가 나오지 않고 균열이 아물어가는 것을 보고는 마치 침 맞은 지네마냥 미친 듯이 구불텅거리고 있는 애벌레에게로 눈을 돌렸다.
“들어라. 나는 밤의 신…”
모양은 저래도 혹시 대화가 통하지 않을까 하고 말을 걸어봤지만, 애벌레는 암흑을 뚫고 형진의 목소리가 전해지기가 무섭게 숨구멍으로 보이던 구멍으로부터 무언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런.”
그것은 흡사 흑요호의 브레스와 닮았다. 하지만, 거대한 빛의 파동으로 표현되는 흑요호의 브레스와는 달리, 그것은 음울하고 우중충한 녹색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위성망에 의해 차단되었다. 하지만 형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공격의 실체는 일종의 부식독. 이것 또한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타입의 공격이다.
“아무래도 대화는 어려운 모양이군.”
처음 만난 다른 우주의 생명체. 하지만 적어도 상대가 이것을 보낸 이유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이제 명백해진 상황. 그렇다면 더 이상 형진이 발광하는 저 무언가를 그냥 두고볼 이유가 없다.
그의 한손이 펼쳐지자, 그곳에 새하얗게 빛나는 하나의 거대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아무리 단단한 껍질을 지녔고, 제 아무리 강한 부식독을 뿜어낸다 할지라도, 이미 감각이 완전히 제압된 상황에서 결계 안에 갇혀 버린 상황이라면 형진의 상대는 될 수 없다.
그는 신이다. 밤이라는 이름의 장막을 드리운 채, 신조차 감당할 수 없는 인스턴트 킬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쥔, 이 우주상에 현존하는 그 어떤 신보다도 강력한 신이다.
애벌레는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밤의 권능으로부터 위협을 느꼈는지 필사적으로 부식독을 사방에 뿌려댔다. 그것은 다가서는 형진의 눈앞으로도 날아들었지만, 그의 손에 들린 창이 한번 휘둘러지자 본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소멸되어 버렸다.
인스턴트 킬은 본래 파괴와 재생의 권능으로부터 유래되어 형진이라는 개체에 의해 형상화된 것. 그것은 형진이 보유한 신격으로 표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또한 그 자체로 하나의 권능이라 할 수 있는 힘이다.
본디 인간이었던 시절에도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물며, 이제 우주 최강이라 불리울 정도의 위치에 선 상태에서야 그 위력을 따로 논하는 것은 이미 의미 없는 일.
구불텅거리며 발악하고 있는 애벌레를 향해 천천히 다가선 형진은 눈앞에 드러난 놈의 약점에 들고 있던 거대한 창을 찔러 넣었다.
푸욱!
창을 쥐고 있는 손을 통해 탄력적이면서도 거친 질감이 그대로 전해지는가 싶더니, 발광하던 애벌레의 움직임은 마치 정지 버튼을 누르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 멈추어버렸다.
[인스턴트 킬! ‘정체불명의 존재’가 죽었습니다!]지금까지 인스턴트 킬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는 메시지를 통해 그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베헤모스나 티폰처럼, 지구나 타나토스에서 일반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생명체조차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에 형진의 손에 의해 죽어버린 이 애벌레는 그런 식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이 생명체가 형진이 존재하는 우주와는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물론 다른 우주의 생명체라 해도 룻이 생성되는 것은 마찬가지. 인스턴트 킬은 단순히 무언가를 단숨에 죽이는 힘이 아니다. 그것을 죽임과 동시에 본성이라 할 수 있는 무언가를 아이템이라는 형태로 재탄생시키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파괴와 재생이라는 신격의 정수만을 모은 듯한 힘이라고나 할까.
룻을 챙기는 일을 마치자, 이번에는 애벌레의 사체와 놈이 쏟아낸 부식독을 말끔하게 회수하기 시작한다. 다른 우주에서 전해진 것이니 사소한 것이라도 함부로 다룰 수가 없다. 혹시 인간에게 치명적인 병원체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그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형진은 비로소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밤의 권능을 거두어들였다. 위성은 일단 그대로 두었다. 한번 공간이 찢겨졌던 곳이니,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 수도 있다. 위성은 그런 경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셈이다.
간단하게 사태를 마무리 짓고 돌아온 형진에게 포트니아 테론은 치하의 말을 건넸다.
“수고했네.”
“별 말씀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참으로 듬직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다. 포트니아 테론은 조금 묘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의지할 만한 대상을 만난 것 때문이 아닐까.
“그래. 겪어 보니 어떤가. 다른 우주의 존재는.”
형진은 바로 대답했다.
“예상 외로 만만치 않은 상대가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 자네는 아주 손쉽게 적을 쓰러뜨리지 않았나.”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그 겉모습처럼 곤충과 비슷한 습성을 가지고 있다면, 방금처럼 저 혼자의 힘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울 정도의 물량으로 도전해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손으로 열손을 막기 어려운 것은 당연한 일. 하물며 적이 문자 그대로 우주 규모의 숫자를 이용해 대적해 온다면, 현재 제가 지니고 있는 전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형진은 이미 홀몸이 아니다. 가족들은 물론이고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은 상태.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지키기에 충분할 정도의 전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직 형진은 신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자이기에, 지닌바 한계도 명확할 수밖에 없다.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군.”
포트니아 테론의 말에 형진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한 것은, 당분간 포트니아 테론이 이곳에 더 처박혀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상 언데드의 힘을 정화할 수 있음을 보인 시점에서 형진이 포트니아 테론을 대신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는 얘기지, 충분하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단순히 자리만 바꾸는 식이어서는 언젠가 현재의 포트니아 테론처럼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는 일이다.
형진은 아직 젊은 신이다. 그래서 좀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남아 있다. 포트니아 테론은 그것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사명임을 깨달았다.
“아니야. 자네는 더 할 나위 없이 잘 해주고 있네. 이 이상 무언가를 바란다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조급해 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만큼 충분하게 준비를 갖추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하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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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편.
구불텅구불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