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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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설과 힐리에타가 그렇게 고양이 앞의 쥐 마냥 아란의 시선을 받고 있는 동안, 형진은 허겁지겁 방을 빠져 나가다가 흠칫하고 멈추어 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문을 등지고 우두커니 서있는 리페를 바로 발견했기 때문이다.
“…”
리페는 문이 열리며 형진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천천히 뒤돌아섰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러 귀여운 모습으로 꾸민 상태로 두 눈 가득 그렁그렁하게 눈물을 맺고 있으니 설령 죄를 짓지 않았어도 미안한 감정이 막 들 것 같은 느낌이다.
“바보야!”
리페는 그렇게 소리를 빽 지르고는 형진의 품에 안기더니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래봐야 아프거나 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리페는 전투용으로 만든 아바타도 아니고, 귀여움을 강조하려다보니 근력도 별로 대단할 것이 없었다.
“미안.”
형진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런 리페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울먹이며 마구 그의 가슴을 때리던 리페는 그렇게 조용히 자신을 감싸오는 그의 손을 느끼자 이내 품에 안겨 엉엉 울기 시작했다.
말없이 그런 그녀를 토닥이기를 얼마나 했을까. 문득 리페는 소매로 얼굴을 쓰윽 훔치더니 코끝이 빨개진 모습으로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나 배고파.”
한껏 울고 났더니 배가 고파진 건가. 형진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작은 몸을 번쩍 안아올렸다.
“그럼 방으로 가자. 내가 맛있는거 해줄게.”
“응.”
의외로 리페는 꽤 고분고분했다. 그동안 쌓였던 것이 조금이나마 풀린 건가 싶기는 했지만, 형진은 조심조심 마치 아기 공주들을 다루는 듯한 느낌으로 리페를 안은 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귀여운 아바타의 외모와는 다르게, 그녀의 방은 조금 썰렁한 느낌이었다.
어차피 혼자서 이 방에 머무는 일이 별로 없는 탓에 굳이 꾸밀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잠깐 여기 앉아 있어. 금방 맛있는 걸 해줄게.”
형진은 그녀를 소파 위에 내려놓으려 했지만, 리페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고개를 저었다.
“싫어.”
그리고는 자세를 바꾸는가 싶더니 어기영차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그의 등에 업혔다. 목을 감싸 안고 다리로 허리를 죄고 있는 모양으로 보아하니 절대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기세다.
“이대로 해.”
“하하…”
그녀 나름대로의 벌이라 이건가. 보통 남자라면 이렇게 따로 포대기 같은 것조차 없이 아이가 매달린 상태로 무언가를 하는 건 무척이나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을 테지만, 평소에 아기 공주들을 열 명 넘게 달고 다니는 일이 일상이나 다름없는 형진에게 있어서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다.
뭘 만들까. 잠시 고민하던 형진은 코알라처럼 자신의 등에 매달려 있는 리페의 시선을 느끼자 빙긋 웃으며 요리를 시작했다.
시작은 우선 불고기감으로 썰어놓은 쇠고기.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잘라서 키친타월로 두드려 물기를 뺀 다음 갖은 양념으로 재운다. 불고기 양념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다면 참치 간장을 써서 좀 더 일본풍의 향기가 배어나오도록 만든다는 정도.
일단 그렇게 고기를 재우는 일이 끝나자, 다른 재료를 꺼내놓았다. 한창 물이 잘 오른 커다란 왕새우들이다.
하나의 길이만 해도 어른 손바닥보다도 큰 놈들이었지만, 형진의 손길이 닿자 마치 스스로 옷을 벗는 거처럼 껍질 아래의 속살들이 드러난다.
“변태.”
새우들의 껍질 벗기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연상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문득 등에 업힌 리페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런 변태를 좋아하는 여신은 누구?”
“흥.”
형진의 능청스런 말에 리페는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다시 따지고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의 손에서 마술처럼 모습을 변화시키는 식재료들의 모습에 점차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손질한 새우는 계란과 녹말가루로 튀김옷을 입힌 다음, 예열한 기름에 그대로 튀겨냈다. 일단 한 번 건져냈다가, 다시 한 번 튀겨내는 것이 포인트.
일단 새우를 튀기는 일이 끝나자, 형진은 다시 야채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파프리카와 파, 마늘은 다지고, 양파는 다진 것과 가늘게 썬 것 두 가지를 준비한다.
팬을 두 개 불에 올린다. 차이가 있다면, 한쪽에는 고추기름을 두르고 다른 한쪽은 파기름을 낸 다는 점. 그렇게 기름이 달궈지면 고추기름을 두른 쪽에는 다진 채소를 넣고, 파기름을 낸 쪽에는 재워두었던 고기를 넣은 다음 각각 볶아준다.
“하나 먹어보면 안 돼?”
두 개의 팬을 양 손에 하나씩 잡고 손목의 스냅만으로 볶아주고 있는데, 문득 등에 업혀 있던 리페가 튀겨 놓은 새우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우리 귀여운 마눌님이 원하신다면.”
“흥.”
아까와 마찬가지로 콧방귀를 뀌긴 하는데, 강도가 많이 약해졌다. 선풍기로 치면 강풍과 미풍 정도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막 튀겨낸 커다란 새우튀김 하나를 키친 타올에 잘 싼 다음 어깨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리페에게 건네주자, 리페는 얼른 그것을 받아들고는 먹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등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한 손으로는 형진의 목에 매달린 채.
“으으음!”
그냥 새우를 손질한 다음 옷을 입혀 튀겨 놓은 것 뿐인데도, 맛이 장난이 아니다. 따끈한 튀김옷이 바삭하고 부서지는 순간 바다의 풍미가 그대로 살아있는 쫄깃한 새우살이 입안에서 확 하고 터져 나오는 그 느낌이라니. 리페는 자신도 모르게 황홀한 표정으로 꿈결 속을 노니는 기분을 받다가, 형진의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하나 더 먹을래?”
“흐, 흥. 딱히 생각은 없지만 굳이 그걸 원한다면.”
“킥.”
어쩐지 츤데레의 정석 같은 대답이라,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 하면서 얼른 입막음용의 새우 튀김 하나를 더 건넸다.
등 뒤에서 햄스터가 해바라기씨 까먹는 것 같은 느낌의 소음이 들려오자,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열심히 새우튀김을 먹는 리페의 모습이 보고 싶지만, 괜히 그랬다가 다시 화를 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일단은 참아두기로 한다.
다시 자유를 찾은 양손은 팬 두 개에 나뉘어진 야채와 고기를 빠르게 볶아냈다. 어느 정도 재워둔 고기가 익자 가늘게 썬 양파를 올리고, 다진 야채 쪽에는 두반장과 캐첩, 맛술 같은 소스 재료들을 넣어주었다.
“다 됐다.”
“응? 됐어?”
“그래. 잠깐만 있어봐.”
형진은 튀겨 낸 새우튀김 가운데 반 정도를 만들어 놓은 소스와 버무려서 넓은 접시에 옮겨 놓았고, 볶은 고기는 밥 위에 올린 다음 계란 노른자 하나를 위에 얹었다. 이로써 깐쇼새우와 규동이 완성되었다.
커다란 새우를 통째로 튀겨서 버무린 깐쇼새우의 매콤한 냄새와, 구수하면서도 약간 달짝지근한 규동의 냄새가 어우러지자 리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자, 먹자.”
“응.”
형진은 막 만들어서 따끈한 요리들을 식탁에 벌여 놓았지만, 리페는 그래도 등 뒤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먹여줘.”
“…”
아무래도 오늘은 어리광데이로 정해둔 모양이다. 어차피 봉사하기로 한 마당에 이제 와서 안된다고 할 수는 없는 일. 형진은 어쩌면 처음이 아닐까 싶은 투덜이 아내의 어리광에 기분 좋게 응해 주었다.
“오늘 만이야.”
“흥.”
다시 한 번 콧방귀를 뀌긴 했지만, 리페 스스로도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는지 표정이 확 밝아진다. 솔직히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건 좀 무리수였다 싶었는데, 의외로 형진이 순순히 응해주니 그나마 남아 있던 앙금마저 싹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아.”
“아…”
둥지 안에서 어미 새가 물어오는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 마냥, 리페는 형진이 떠 넣어주는 음식들을 얌전하게 받아먹었다. 약간 느끼할 수도 있는 규동에 매콤달콤한 깐쇼새우가 곁들여진 탓인지 리페는 형진이 건네주는 대로 맛있게 식사를 즐겼다.
형진이 해주는 요리는 언제나 맛있지만, 오늘은 더욱더 특별한 느낌이다.
오늘의 그는 마치 자신을 아기 공주들 대하듯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이 귀여운 아바타는 보호와 균형을 따라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어때?”
“배불러… 그리고, 졸려.”
“훗.”
벌써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리페의 모습에, 형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침대로 데려가 눕힌 다음 설거지를 마치고 옆자리에 누웠다.
“안아줘.”
“그래.”
바니걸 차림을 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귀여운 아내의 모습에 뭔가 불끈거리며 힘이 솟는 느낌이 들었지만, 식곤증을 느끼며 반쯤 잠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손을 대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형진은 리페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꼭 안아주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막상 그렇게 잠도 안 자고 말똥거리며 누워 있자니 이런 저런 잡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상황실에 그대로 놔두고 온 규설과 힐리에타의 일이라든가, 그런 그들과 함께 있을 아란과 미아라든가. 정작 중요한 자신 혼자 쏙 빠져 나와 있는 상황에서 어떤 아수라장이 연출되고 있을지 생각하니 슬슬 걱정이 된다.
아무래도… 상황을 좀 살펴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형진은 미아에게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건넸다.
[저기… 그쪽은 어떻게 됐어?]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미아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네? 아… 그럭저럭이요. 리페님은 괜찮아졌나요?] [어? 응. 뭐… 일단은.] [다행이네요. 화가 많이 나셨을까봐 걱정했는데.]규설과 힐리에타의 일이 걱정되어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어째 얘기가 그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아간다.
사실 미아에게 먼저 연락한 것 자체가 아란에게 함부로 말을 걸기가 무서운 탓이다. 형진은 평소 아내들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지만, 이번 같이 뭔가 미묘한 사안에 대해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사는 것 자체가 일종의 원죄와도 같이 작용하는 셈이다.
어째서인지 본신 상태로 눈을 흘기는 보호와 균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는 형진에게 그런 식으로 눈을 흘기거나 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지만, 묘하게 연상이 되어 버렸다고나 할까.
[궁금하세요?] [일단은.] [그러시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세요.] [뭐?] [당장 빠져나오긴 어려우실 테니까, 아바타로 와보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기다릴게요.] […]그 말과 함께 미아는 메시지를 끊었다. 마지막 대화에서는 어째 아란이 대신 말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다. 설마, 연락이 왔다고 고해바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자신에게 무한히 헌신적인 태도를 취하던 미아마저 이런 반응을 보이니 그렇지 않아도 고개를 들던 걱정이 더욱더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형진은 왕성에서 수련 중이던 아바타를 끄집어내서 급히 스틱스로 이동시켰고, 얼른 상황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황실은 텅 비어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형진은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방으로 오세요. 아란.
짧은 메모였지만, 상당히 힘주어 적은 글귀를 보니 어쩐지 아란이 이 메모를 적을 때의 표정이 연상되어 버린다.
꿀꺽.
괜찮은 걸까.
어쩐지 이제는 규설과 힐리에타가 아니라 자신의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 메모를 모른 척 하는 건 더 큰 혼란과 공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아란 역시 그에게는 무척이나 헌신적이지만, 그녀의 본신은 공포와 죽음. 남들에게는 평범한 부부 싸움도 그들 둘이 벌이게 되면 우주 전쟁 급이 되어 버린다.
“휴… 어쩔 수 없는 건가.”
가정과 우주의 평화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수밖에.
형진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전혀 의외의 상황이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신입사원이 상사와의 첫 만남에 던지는 인사와도 같은 말. 하지만 그 말을 던진 인물들의 옷차림이 심상치 않다.
바니걸은 바니걸인데,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검은 빛의 코르셋이 아니다.
하늘거리면서 속살이 은은하게 비쳐 보이는 속옷을 몸에 걸쳐 있고 있는 그들은, 다름아닌 규설과 힐리에타였다.
========== 작품 후기 ==========
두편째.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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