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0
90====================
19. 토너먼트
메시지와 함께 시야가 밝아지며 주위의 모습이 드러난다. 폐허라는 이름 그대로 부서져 쓰러진 채 덩굴과 이끼 같은 것으로 뒤덮인 건물의 잔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위쪽은 높게 솟은 나무 같은 것으로 햇빛이 차단되어 있었는데, 밝은 빛이 잎사귀 사이로 새어 들어와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음침한 폐허라기보다는, 사라진 도시 위에 자리 잡은 생명력 넘치는 숲에 가깝다.
주위의 환경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형진은 우선 은신으로 모습을 감추고는 환영의 반딧불을 사용해 자신이 위치한 곳에서 가장 높은 지형을 찾아 이동했다. 일대 일, 그것도 단발 승부이니, 무작정 돌격하는 것 보다는 적절한 전술을 짤 필요가 있다.
꽝!
하지만 미처 높게 솟은 건물의 폐허 위로 올라가 주위의 지형을 확인하기도 전에, 세 시 방향에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채 위태롭게 서있던 기둥 하나가 굉음과 함께 부서지며 쓰러진다. 아무래도 상대는 형진처럼 조심스럽게 전술을 짜거나 접근할 생각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모양이다.
“크허엉!”
곧바로 쩌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숲이 흔들린다. 어제 궁에서도 들었던 사자후다. 갑작스럽게 터져 나온 폭음과 괴성에 놀란 새들이 후드득 날아오르는 가운데, 앞서 부서졌던 기둥 근처의 폐허가 발파라도 한 것처럼 굉음을 터뜨리며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또 한 번 터져 나오는 사자후.
“…”
어떻게 보면 쓸 데 없이 힘만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공포와 죽음의 성도들은 각 지부에 스킬 마스터 역할을 하는 성도들에게서 다양한 스킬들을 익힐 수 있다. 이런 다양성은 획일화된 전술이 아닌 성도 개개인마다의 개성을 구현하는데 도움이 되고, 암살에 대응하는 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다양성을 갖춘 성도들에게도 필수적으로 익히고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스킬들이 있다. 바로 은신과 잠행이 그것이다.
호구들이 지닌 매료나 회복 능력, 미친놈들이 불을 다루는 능력, 그리고 신성폭력배 놈들이 지닌 헌신의 일격처럼, 공포와 죽음의 성도들 역시 그들을 대표하는 은신과 잠행이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단순히 지형지물에 은폐나 엄폐를 하는 것을 넘어, 공포와 죽음이라는 이름의 신이 지닌 권능을 빌려다 쓰는 것과 같은 스킬이기에, 이것은 다른 신의 추종자들에게 있어 가장 위협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지금 저 놈은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상대를 찾기 위한 최선의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놈이 터뜨리는 사자후는 단순히 위압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은신을 깨뜨리기 위한 나름의 탐색 스킬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초음파로 주위를 살피는 박쥐처럼 신뢰와 헌신이 지닌 권능을 실어 보내는 식으로.
일단 위치가 발각되면 녀석은 미친 듯이 달려들어 난타전을 유도할 것이 분명하다. 똑같이 때리고 똑같이 맞더라도, 뛰어난 회복 능력을 지닌 녀석들이 유리할 것은 뻔한 일이니까. 하기야 토너먼트 자체가 이번에 처음 열린 것이 아닌 이상, 놈들도 나름대로 공포와 죽음의 성도를 상대하기 위한 필승 전략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형진은 어떻게 해야 할까. 형진이 알고 있는 놈들의 약점은 뛰어난 이동기가 없는 탓에 도망치면 쫓아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쓸 데 없는 싸움을 피하기 위한 수단일 뿐, 이기기 위한 전략이라고는 보기 힘들다. 상대에게 회복 능력이라도 없다면 일격이탈로 치고 빠지며 체력을 깎아 먹는 수라도 쓸 수 있겠지만, 저 폭력배 놈들 상대로는 그런 수도 먹히지 않는다.
어차피 형진은 져도 상관없다. 애통한 일이긴 하지만, 사실 공포와 죽음께서도 그가 이길 거라고는 그리 생각지 않으실 것 같다. 그러니, 이번 전투는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래, 즐기는 거다.
“그럼, 결국 방법은 하나뿐인가.”
형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폐허 위에서 훌쩍 뛰어 내렸다가, 환영의 반딧불을 사용하며 지면에 내려섰다.
[축하합니다! ‘환영의 반딧불’을 체득하여 Lv.26을 달성하였습니다.]뜬금없이 나타난 메시지에 형진은 씩 웃었다. 어쩐지 운이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곧바로 전율의 질주를 실행하며 다시금 사자후가 터져 나오는 장소로 달려들었다.
“크허엉!”
단지 고함을 치는 것 뿐인데도 그 안에 스며든 기세가 대기를 요동시키며 밀려드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순간 형진이 펼치고 있던 은신이 힘없이 깨져 버린다.
“쳇.”
예상하긴 했지만, 너무나 무력하게 깨져버린 은신에 형진은 혀를 차고 말았다. 하지만 이건 은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형진의 스킬 레벨이 부족해서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최소한 40레벨 이상만 되었어도 이 정도로 쉽게 깨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근거는 없는 추측일 뿐이긴 하지만.
“거기구나!”
곧바로 상대의 외침이 들려온다. 그런데 어쩐지 목소리 톤이 높다. 설마, 여자?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데, 허연 포대기를 뒤집어 쓴 장대한 체구의 인물 하나가 질주 중인 형진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벼락처럼 내리 꽂힌다.
공격 자체를 무효화해볼까 싶었지만, 날아드는 주먹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너무 빠르고 너무 강력해서 삐끗하면 그것으로 끝장이라는 느낌. 그냥 너죽고 나죽자는 식으로 부딪혀 볼까 하다가, 결국 본능을 거스르지 못하고 일단 피하는 쪽을 선택한다.
“이크!”
형진은 급히 환영의 반딧불로 그 공격을 피해 내며 상대의 모습을 살폈다.
“우와.”
대단하다. 보통 남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몸집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는 사람 머리통만한 가슴이 포대기 아래로 출렁거리는 모습이 더 대단하다. 나름 출렁임을 막으려고 꽉 동여맨 것 같긴 한데, 워낙 격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별 소용이 없는 느낌이다. 어찌나 역동적인지 급박한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릴 정도다.
이런 사악한. 저런 것으로 대전자의 눈을 현혹하려 하다니!
꽝!
형진이 공격을 피하자, 애꿎은 아름드리 나무 하나가 단숨에 박살나며 넘어진다. 부러지는 게 아니다. 나무 둥치가 그대로 박살나자, 남은 부분이 기우뚱하며 넘어진다. 바위라면 몰라도 나무는 질겨서 저러기가 쉽지 않은데.
넘어지는 나무줄기로 훌쩍 뛰어오른 형진은 질주를 써서 조금 달리다가, 다시 한 번 훌쩍 뛰어올라 근처에 서 있던 건물 잔해 위에 올라섰다.
“어이쿠!”
제법 멋들어지게 착지하는가 싶었지만, 잔해를 뒤덮고 있던 이끼 때문에 살짝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고 말았다.
“도망치지 마라!”
곧바로 다시 등 뒤에서 외침이 들려온다. 형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쿨이 돌아온 환영의 반딧불을 사용해 옆에 자리한 또 다른 잔해로 옮겨갔다.
꽝!
이번에도 역시나 형진이 있던 자리에 강렬한 일격이 가해지며 박살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쥐새끼 같은 놈!”
그리고 터져 나오는 분노한 목소리.
형진은 잔해 위에 개구리 같은 자세로 앉은 채 부서진 파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구의 조폭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칭찬 고마워.”
“뭐라?”
“그런데 생각보다 말 잘 하는데. 아가씨, 두건 좀 벗어봐. 얼굴이 보고 싶어졌어. 신성폭력배인 거 맞아? 다른데서 파견 나오거나 그런 거 아니야?”
“닥쳐!”
수호자 아닌 거 같다며 이죽거리는 형진의 말에 분노했는지 몸에서 불타는 듯한 성광을 뿜어내며 다시 달려든다. 하지만 형진은 씩 웃으며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그 일격을 피했다.
이번에도 거구녀의 주먹은 어김없이 건물의 잔해에 작렬했다. 하지만 이게 웬 걸.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모습의 잔해는 그녀의 주먹이 닿기도 전에 마치 신기루처럼 부서지며 바닥으로 쏟아져 내린다.
볼품없이 개구리 같은 자세로 웅크리고 있던 이유는 바로 적절한 순간에 인스턴트 킬을 발동하기 위해서였다. 절대로 개구리처럼 높이 뛰어오르기 위해서가 아니다.
“헛!”
잔해를 단숨에 부숴질 것처럼 휘둘러지던 주먹은 장대한 헛손질이 되어 버렸고, 본능적으로 파괴의 반작용에 대비하던 그녀의 몸은 기우뚱하며 중심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리 위로 형진이 떨어져 내렸다.
“큭!”
거구녀는 급히 팔을 끌어들이며 눈과 목의 경동맥을 보호했다. 다른 부위는 회복능력으로 빠르게 복구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눈과 같은 부위는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자칫 공격을 받아 시력을 잃기라도 하면 그것만으로도 승부가 갈릴 수 있으니 우선 보호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형진의 단검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을 스쳐 지나갔다.
확!
엉뚱하게도 그녀가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벗겨내 버린 것이다.
“으X!”
인스턴트 킬을 노릴 수 있는 기회이긴 했지만, 거구녀의 적절한 대응 때문인지 약점이 눈에 띄지 않았다. 물론 팔 같은 곳을 절단할 수 있다면 상대의 전투력을 급감시킬 수 있겠으나, 일전에 제랄딘이 싸우던 모습으로 봐서는 그렇게 간단히 잘라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형진은 어차피 바로 회복되어 버리는 육체 대신, 그 육체를 감싸고 있는 것을 치워버리기로 한 것이다.
“가, 감히!”
거구녀는 당황하며 급히 팔을 휘저었다. 형진은 두건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려다가 느닷없이 날아드는 손을 보고는 얼른 몸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환영의 반딧불은 아직 쿨이 돌아오지 않았고, 공중에 떠 있는 상대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고작 몸을 뒤채는 정도에 불과했다.
“컥!”
제대로 일격을 날린 것도 아니고, 그냥 대충 휘두른 손에 스쳤을 뿐인데도 순간 숨이 멈추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그야말로 스쳐도 한 방이다. 원래 무식한 놈들이란 건 알았지만, 뭐 이런 터무니없는 놈들이 다 있단 말인가.
모래처럼 부서진 잔해 속에서 거구녀가 벌떡 일어난다. 두건을 걷어낼 때 스쳤는지 이마 위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나마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리며 멈춰버렸다.
살짝 구리빛이 도는 피부와 대비되는 빛바랜 금발에서 묘하게 색기가 느껴진다. 눈썹과 눈동자, 그리고 입술까지 금빛으로 반짝이는 탓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원래 색이 저런 건가, 아니면 헌신의 일격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걸까.
“너 이놈… 감히… 나에게서 성휘의 장속을…”
그 악취미스러운 두건의 이름이 성휘의 장속이었던가.
“벗으니까 가슴만큼 얼굴도 예쁜데 뭘. 아가씨, 이름이 뭐야?”
이죽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거구녀는 뿌득 이를 갈더니 크게 분노하며 다시금 커다란 사자후를 터뜨렸다.
성휘의 장속은 그녀가 신의 사도임을 증명하는 징표. 그것이 상대에게 벗겨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분노와 수치심을 느꼈다.
“크허엉!”
“어이쿠!”
지근거리에서 터져 나온 탓인지 귀는커녕 머리와 몸 전체가 딩딩 울리는 느낌이다. 형진이 그렇게 엄살을 부리며 몸을 움츠리자, 거구녀는 이성을 잃은 것 같은 모습으로 단숨에 박살내겠다는 듯이 달려와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 순간 형진의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환영의 반딧불이 다시금 발동한 것이다.
방금 전의 일 때문인지, 거구녀는 형진이 등을 기대고 있던 바위를 부수기 전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이라기보다는 방금 전의 경험을 학습한 그녀의 몸이 스스로 반응한 행동이다.
꽝!
잠시 멈칫했다 한들, 그녀의 주먹이 지닌 파괴력은 바위를 부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멈칫한 탓에 그녀의 몸은 제대로 된 타이밍에 반작용으로 전해지는 힘을 감당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잠시 경직이 걸린 것과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잠시 그녀의 몸이 굳어진 순간, 부서지는 바위 파편 속에서 형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서 몸을 뒤집은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형진은 경악으로 눈을 치뜬 그녀에게 지금까지의 이죽거리는 말투와는 전혀 다른 단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체크메이트.”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짙은 어둠과도 같은 단검이 그녀의 뒷목을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