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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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굴곰의 집
“컥!”
뒷목을 파고드는 차가운 금속의 섬뜩한 느낌에 그녀는 짧은 신음을 토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몸을 틀어 상대에게 반격을 가하려 했다. 비록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지만, 그녀는 이 정도는 충분히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으로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미처 신체의 말단까지 전달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의 몸에 충만했던 힘이 썰물 빠지듯 발끝으로 쭉 빠져 나가는 듯한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반격을 위해 몸을 틀던 자세 그대로, 그녀는 마치 실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허우적거리며 쓰러져 버렸다.
손가락 하나, 발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마치 내 몸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추락해 갈 뿐이다.
어째서?
하지만 그렇게 떠오른 의문을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빛으로 화하며 필드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후아…”
거의 조건반사처럼 일단 룻부터 집어든 형진은 그대로 팔을 벌리며 대자로 바닥에 누웠다. 하지만 그의 몸이 채 바닥이 닿기도 전에, 필드를 구성하고 있던 모든 풍경은 물론이고 그 자신의 몸 역시 빛으로 화하며 사라져 간다.
다만 하나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눈앞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는 메시지 하나 뿐.
뭐랄까. 만렙토끼 녀석에게 두들겨 맞고서 역시 자신에게는 싸움의 재능이 없다고 느꼈었던 일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단 하나. 어떻게 싸워야 할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 바로 그 한 가지 뿐이다.
그 한 가지로 이런 차이가 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형진이 그렇게 전투라는 것에 대해 눈을 뜰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라이언하트라는 기술 덕분이다. 싸울수록, 아니 싸움이라는 과정 자체를 거칠 때마다 깨달음을 얻어가도록 만들어 주는 이 스킬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인스턴트 킬을 가지고 있었다 한들 방금 전의 그 여자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렙토끼에게 당했던 것 같은 꼴이 되어 순식간에 리타이어 하고 말았으리라.
그나저나 그 만렙토끼 놈. 아직도 그 자리에 있을라나. 지금이라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털썩.
마침내 형진의 몸이 바닥에 털썩 쓰러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각자의 싸움을 마친 다른 이들도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고, 뭐라 말을 건넬 틈도 없이 다시금 메시지가 전해졌다.
[이번 토너먼트는 3:1로 공포와 죽음 측이 승리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삼대 일?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들에게 패배했단 말인가?
형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처럼 다시 그들은 본래 있었던 장소로 되돌아갔다. 뭔가 다른 사람들의 전투도 좀 지켜보고 싶었는데, 모든 게 너무 속전속결이라 정신이 없을 정도다.
“진님?”
“괜찮으세요?”
제랄딘과 미엘은 바닥에 대자로 누워있는 형진의 모습에 놀라며 얼른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네, 괜찮습니다.”
형진이 툭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제랄딘과 미엘이 위로의 말을 건넨다.
“고생하셨어요.”
“원래 토너먼트 자체가 좀 힘들어요. 보통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
아무래도 말하는 분위기를 보니 형진이 졌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다. 하기야 그 상황에서 삼대 일의 결과가 나왔다면 누구든 그가 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형진은 자신이 진 게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두 사람이 진 게 아니고, 자신 또한 이겼다면 결국 패배한 사람은 크루그라는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 자존심 높은 녀석으로선 졌다는 사실도 견디기 어려울 터. 괜히 떠벌이고다니며 상처를 헤집을 필요는 없는 일이다. 카트린 때문에 녀석이 집에 남기로 한 것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그래서 대신 이렇게 대답했다.
“하하, 그렇더군요. 하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역시나 하늘로부터 찬연한 빛을 뿜어내는 황금 상자가 떨어져 내린다.
“이거 황금 상자를 너무 자주 받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그러게요. 진님이랑 같이 다녀서 그런가 봐요.”
“하하, 별 말씀을.”
형진은 그렇게 웃으며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이 보여준 모습에 매우 놀라워하시며 합당한 보상을 내리셨습니다.] [보상 내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이겔 기념 금화 10개, 이넬 은화 100개, 가스트 주화 5000개.강화석 10개.
고급 액세서리 상자 1개.
인벤토리 10칸.
무게 +100
팩션 공헌도 2000. (+2000: 두 배 보너스 적용)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이름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훌륭한 활약을 기대하겠습니다.
와우.
형진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일단 자신은 패배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과한 보상을 받은 티를 내면 곤란하다.
보상 수준은 이전에 낙인의 오류를 찾아냈을 때와 동급이다. 구성품만 놓고 보면 일단 그렇지만, 보상금의 액수와 강화석의 개수, 그리고 공헌도는 이전의 두 배에 달한다. 그만큼 이번 일이 공포와 죽음에게 중요한 일이었고, 또한 그의 승리가 그만큼 기뻤다는 얘기일 것이다.
어쩐지 공포와 죽음께서 손을 불끈 쥐며 환호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본래는 의뢰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서 적용 되지 않는 공헌도 두 배 보너스가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이번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것 한 가지만으로 공헌도 사천을 손에 넣었다는 얘기다.
내용물을 일단 받아들이자, 곧바로 시야에 새로운 메시지가 나타난다.
[누적된 팩션 공헌도가 다음 단계 승급을 위한 조건을 만족합니다.] [승급을 위해 필요한 최저 스킬 숙련도가 부족합니다.] [‘일반 성도’에서 ‘상급 성도’로 승급하기 위해서는 스킬 4가지를 30레벨 이상 수련해야만 합니다. 스킬 수련에 관해서는 소속된 지부의 지부장이나 스킬 마스터에게 문의하세요.]한 방에 공헌도 사천을 벌어들인 덕분에 곧바로 승급 메시지가 떴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건 부족으로 바로 승급은 하지 못했다.
너무 승급이 빨라도 문제다. 스킬 숙련도가 공헌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니.
스킬 숙련도를 어떻게 올려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다시 새로운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공포와 죽음께서 당신의 업적을 인정하였습니다.-축하합니다! 업적 보너스로 한 달간 의뢰 달성시 팩션 공헌도를 두 배로 습득 가능합니다.
-이미 업적 보너스가 적용 중이므로, 잔여 시간에 한 달이 추가 됩니다.
-축하합니다!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칭호가 부여되었습니다.
-‘토너먼트에서 승리한’ 칭호 효과: 매력 증가.
매력 증가라니.
그럼 유아처럼 다른 사람들 눈에 막 후광이 비치고 그런다는 소린가. 아니면 그냥 좀 더 멋져 보이는 정도에 불과한 걸까. 따로 스킬 같은 것이 발동되는 것이 아니라 스탯이 올라가는 거니까 오히려 더 나은 것일지도.
“어때?”
“그냥도 예쁘신데, 그런 칭호까지 쓰시면 사기잖아요.”
“그런가? 그래도 있는 건 써줘야지.”
제랄딘은 미엘 앞에서 모델처럼 자세를 취해보이다가, 형진의 존재를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아무 일도 없는 척 자세를 가다듬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벌써 다 봐버린 형진이 빙그레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형진의 웃음을 제랄딘은 얼굴을 가린 눈가리개나 목토시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딴청을 부리는 제랄딘의 모습에서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며 형진은 보상으로 받은 고급 액세서리 상자를 열었다. 이전에 이 상자를 열었을 때 무려 희귀도 아닌 진귀 등급의 아이템을 얻었던 것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또 어떤 엄청난 아이템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에 어린애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축하합니다! ‘심연의 눈가리개’를 획득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 걸.
상자에서 나온 것은 지난번에 나왔던 것과 같은 물품이었다. 물론 심연의 눈가리개는 분명히 좋은 아이템이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또 나오면 어쩌자는 말인가.
설마… 이대로 질러버리라는 공포와 죽음의 뜻인가!
“진님?”
“네?”
“어떻게 하시겠어요. 피곤하시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도 될 것 같은데.”
하기야 이런 엄청난 보상을 받았으니 그냥 쉬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형진은 딱히 정신적으로 피로한 상태도 아니었고, 굳이 의뢰를 쉬어야할 만한 다른 이유도 떠오르지 않는다.
“두 분은 어떠신지.”
형진이 반문하자 둘은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바로 답했다.
“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요. 애초에 이 탐색 의뢰는 진님이 있어야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저도 같은 의견이에요. 진님의 의사에 따를게요.”
아, 얼마나 천사 같은 이들이란 말인가. 생각 같아서는 달려들어 꼭 껴안아 주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분노의 싸대기를 맞을 지도 모르니 일단 참는 것이 좋겠다.
“알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가긴 좀 그러니 의뢰를 수행하는 것으로 하죠.”
“그럼, 의뢰를 수락하겠습니다.”
미엘의 말과 함께 새로운 의뢰를 수락했다는 메시지가 나타나며 수도 북쪽에 커다란 화살표가 나타난다.
“그럼 출발할게요.”
“네.”
형진은 급히 전율의 질주를 발동하며 앞서가는 두 사람을 쫓았다. 하지만 그렇게 쫓아가는 와중에도 앞장선 그녀들의 엉덩이 같은 걸 훔쳐보기 보다는 과연 이번에 나온 눈가리개를 질러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열중하고 있었다.
눈가리개는 그 자체로도 사기에 가까운 아이템이지만, 코장식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액세서리는 강화가 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엄청난 성능 차이를 보인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강화되기 전의 아이템은 그냥 맛보기에 불과하고, +1로 강화되어야 비로소 그 아이템의 진면목이 드러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다.
아, 그러고 보니 귀걸이에 담겨진 블러드러스트 스킬에 대해 스킬마스터에게 문의한다는 걸 지금까지 깜박하고 있었네.
아무튼.
이걸 질러, 말어. 아, 정말 고민된다. 고민돼서 미칠 것 같다.
강화석을 사용하는 거라면 한두 번 정도는 실패해도 부서지거나 하지 않으니 부담이 적지만, 액세서리는 강화 효과가 대단한 만큼의 패널티가 있다. 만약 질러서 실패하면, 모처럼 얻은 진귀급의 아이템 두 개가 한 순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끙…”
성공만 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실패하면 그 즉시 폭망. 되돌릴 수조차 없다. 도대체 어떤 것을 선택해야 좋단 말인가. 차라리 섬기는 신이 복불복의 신이라면 모를까. 이런 선택은 너무 가혹하다.
“끄응.”
달리면서 계속 형진이 앓는 소리를 내자, 앞서가던 제랄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괜찮으세요?”
토너먼트 중에 다쳤더라도 경기가 끝나는 순간 회복되므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정신적인 타격이 있을 수는 있어도, 낙인의 효과 덕분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끙끙 앓을 정도라면 생각보다 큰 문제일 수도 있기에, 제랄딘이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하하하하…”
“…”
형진의 어색한 웃음에 제랄딘과 미엘은 서로 눈짓을 교환한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싶은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누군가는 고뇌하고 또 누군가는 우려하면서 그들은 마침내 의뢰를 수행할 장소인 동굴곰의 집이라는 이름의 거대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