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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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굴곰의 집
복면을 쓰고 있는데도 제랄딘의 부러워 하는 표정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그런 기색을 눈치챘는지 미엘이 얼른 제동을 걸고 나선다.
“안 돼요, 아가씨. 그거 터지면 다시 구할 수도 없다구요. 아시잖아요.”
“역시… 그렇겠지?”
“네. 다른 사람 하는 거 보고 강화하다가 망한 사람 여럿 봤어요. 달리 복구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강화를 했다가 터지면 정말 대책 없어요. 그러니 이번엔 참으세요.”
“…”
고개는 끄덕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납득은 하지 못한 표정이다. 이거 괜히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 넣은 거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든다.
“크흠. 보셨겠지만 지른다고 바로 붙는 게 아니에요. 저만해도 같은 아이템 일곱 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이거 하나 남았습니다. 마지막 지른 게 터졌으면 정말 암담했을 겁니다.”
“그, 그렇군요.”
제랄딘은 그제서야 강화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인지 다시 깨달은 모양이다. 좀 더 상황을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면 같은 종류의 액세서리 장비를 일곱 개나 가지고 있었다는 것부터 이상하게 생각해야겠지만, +2 강화된 액세서리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거기까지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형진도 조금 반성했다. 앞으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강화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이다. 엘리시온에서의 일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런 것을 막 드러내는 건 너무 경솔한 짓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형진의 성공을 보고 빡강을 시도하다 패망하면 그것도 난감한 일이고.
일행은 다시 동굴 안쪽으로 전진을 시작했다. 혹시 동굴 중간에 목표로 삼은 반지가 있지 않을까 하고 면밀하게 탐색을 해봤지만, 역시나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형진 뿐만 아니라 제랄딘이나 미엘 역시 나름대로 탐색을 해보는 듯 했지만 마찬가지다.
촤락!
[인스턴트 킬! ‘후크웜’이 죽었습니다!] [‘질긴 갈고리 팔찌’를 획득했습니다.]안쪽으로 들어가자 먹이 때문인지 후크웜이 출현하는 빈도도 줄어들었다.
용암 종유석에서는 일곱 마리나 한 곳에 뭉쳐 있었는데, 그 뒤로는 고작 세 마리를 잡은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사실 형진이 확인할 수 있는 아이템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강화시에 어떤 효과가 추가된다는 식의 설명이 있긴 해도 정확한 수치가 기재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 앞에 +2라는 숫자가 붙어서 그것이 강화된 아이템임을 알게 해주는 정도. 하지만 실제로 사용해 보면 정말 강화가 안 된 아이템은 그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만든다.
방금 전만 해도 그렇다. 강화가 안 되었을 때는 매우 제한적인 거리에 대해 갈고리를 날려 보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동굴처럼 내부가 막힌 곳이라면 시야가 닿는 곳에는 거의 무조건 한 번에 갈고리가 닿을 정도다. 당기는 힘도 엄청나게 강해졌고, 무엇보다도 적중력이 높아져서 목표를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갈림길이군요.”
“일단 마킹부터 할게요.”
좁아졌던 동굴이 갑자기 넓어진다 싶더니 세 갈림길이 나왔다. 오른쪽의 동굴이 가장 넓고 다른 동굴도 제법 규모가 있다.
“일단 큰 쪽부터 가겠습니다.”
“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가든 마찬가지지만 큰 쪽의 동굴에서 흐릿하게 동물의 흔적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길을 잡았다. 동굴의 규모로 봐도 이쯤 되면 솔직히 하룻밤 안에 반지를 찾는 게 이상한 일. 어째서 이 의뢰가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미결로 남은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은 느낌이다. 기왕 이렇게 되었다면, 차라리 후크웜이나 동굴곰을 잡아서 아이템이나 모으는 것이 남는 장사.
동굴 안에 남은 흔적을 더듬어 가다보니, 마침내 거대한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발견되었다. 제법 흐릿하게 남기는 했지만, 분명히 동물의 발자국이다. 발자국의 크기만 따져봐도 상당히 덩치가 클 것으로 보인다.
지나온 길에서는 달리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들이 들어온 입구 외에 다른 또다른 동굴 입구가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 덩치의 동물이 드나드는데 흔적이 남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형진은 곧바로 발자국을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내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거… 동굴곰의 흔적 같은데요?”
뒤따르고 있던 제랄딘이 바닥에 남은 흔적을 살피더니 그렇게 말했다. 전에도 봤지만 역시 도적 계열의 스킬을 익히고 있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형진이 바로 대답하자, 미엘이 물었다.
“동굴곰 잡으시게요?”
“혹시 놈이 숨겼을지도 모르니까요. 어떻게 생긴 놈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안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덩치가 워낙 커서 가지고 나가려면 꽤 골치 아플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미엘은 입맛을 다신다. 의외로 동굴곰은 꽤 고급 요리 재료인 모양이다.
“안 될까요?”
“인벤토리를 좀 비우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지금은 도시락 용기가 가득 차 있어서.”
형진은 얼른 인벤토리를 확인해보았다.
“200 정도라면 여유가 있습니다. 어차피 제가 쓸 물건이니 지금 넘기시죠.”
“그럴까요?”
즉석에서 도시락 용기를 구하는 물자 조달 의뢰를 넣었다. 그러자 미엘이 그것을 수락했는지 곧바로 의뢰한 물품이 도착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형진의 인벤토리에 도시락 용기가 가득 들어찬다.
“그럼 다시 전진하겠습니다.”
“네.”
조심스럽게 흔적을 따라가자, 형진의 후각에 동물의 냄새와 여러 가지 견과류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서 느껴지기 시작한다. 잠시 멈춰서서 위치를 가늠한 형진은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곳을 나가면 커다란 공동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여러 개의 갈림길로 나뉘는데, 가장 왼쪽의 작은 동굴에 놈이 웅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그러자 제랄딘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희 셋이라면 잡는 건 무리가 없을 거에요. 하지만 가급적이면 가죽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놈의 가죽이라면 별채 식구들 전부가 두툼한 외투를 만들어도 될 테니까요.] [그 정도인가요?] [정확한 건 봐야 알겠지만, 왕궁에서 동굴곰의 가죽으로 만든 양탄자를 본 적이 있어요.]얘기하는 걸 보면 제랄딘도 딱히 반지를 찾을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모양이다. 형진은 일단 자신이 탐지한 지형을 두 사람에게 설명했고, 그들은 즉석에서 동굴곰을 상처 없이 잡을 작전을 짜냈다.
[그럼 시작할게요.] [조심해요. 아가씨.]계획대로 제랄딘이 먼저 앞서 나가서 공동에 들어선 뒤, 곧바로 채찍과도 같은 흑요호의 꼬리를 날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동굴곰의 심기를 건드렸다.
쿠헝!
슬쩍 은신으로 제랄딘의 뒤를 따르던 형진은 예상보다 훨씬 더 큰 놈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이건 뭐 곰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의 엄청난 덩치의 괴물이다. 두 발로 딛고 선 것도 아니고 웅크리고 있는데도 머리도 아닌 어깨 높이가 형진의 키보다 훨씬 클 정도면 말 다한 것 아니겠는가.
제랄딘이 꼬리로 툭툭 건드리자, 모처럼 단잠을 자고 있던 놈은 크게 성을 내며 밖으로 튀어 나와 솥뚜껑 같은 앞발로 그녀를 후려쳤다.
“옳지.”
제랄딘이 그 말을 남기고 슬쩍 피하자, 몸을 숨기고 있던 미엘이 결계를 펼쳐 동굴곰의 행동을 구속했다.
“지금이에요!”
그리고 결계를 완성한 미엘의 외침과 함께, 형진이 비로소 움직였다.
먼저 갈고리를 천장으로 날린다. 원래의 갈고리라면 택도 없을 정도로 이 공동의 천장은 높았지만, +2 강화가 된 덕분에 어렵지 않게 닿을 수 있었다.
갈고리가 고정되자, 형진은 곧바로 끌어당기기를 실행했다. 물론 그렇다고 천장이 딸려 올리는 없으니, 그의 몸이 휙 하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크워엉!
미엘의 결계에 신체가 구속된 동굴곰이 발악하며 버둥거리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보던 형진은 정점에 이르자 갈고리를 풀고 아래로 떨어져 내리며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제서야 형진의 존재를 알아챈 동굴곰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형진의 단검은 그런 놈의 정수리에 위치한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동굴곰은 마치 정지화면 버튼을 누른 것처럼 그대로 우뚝 멈춰서더니, 이내 무너지듯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인스턴트 킬! ‘동굴곰’이 죽었습니다!]주저앉아 버린 곰의 머리에서 형진이 훌쩍 뛰어내리자, 제랄딘이 감탄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대단해요. 동굴곰의 머리뼈는 워낙 두꺼워서 어지간한 힘을 지닌 기사도 한 번에 치명상을 입히기가 힘든데 일격에 쓰러뜨리다니.”
“그런가요?”
형진이야 그런 것까지는 알 리가 없다. 그냥 보이는 약점을 찌르는 것 뿐이니까.
“우와… 이거 담아가려면 큰 일일 것 같아요. 무게가 될지 모르겠네요.”
미엘은 어느 틈엔가 죽어 넘어진 동굴곰의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형진은 그런 미엘에게 다가가는 척 슬그머니 떨어진 룻부터 챙겼다.
[‘강인한 곰가죽 트렌치코트’를 획득했습니다.] “…”트렌치코트라니.
곰가죽으로 된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다. 이를테면 야만인들이 뒤집어쓰고 다니는 곰가죽 갑옷 같은 것이라든가, 제랄딘이 말했던 곰가죽 양탄자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그런 형진의 안이한 상상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동굴곰이 드랍한 것은 가상현실을 주제로 한 영화의 주인공이나 입고 나올 법한 올블랙의 트렌치코트였다.
잠시 정신이 멍해졌던 형진은 일단 아이템 정보부터 확인했다.
아이템정보
명칭 : 강인한 곰가죽 트렌치코트
등급 : 희귀
착용제한 : 남성.
설명 : 남성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곰가죽 트렌치코트. 상당히 멋지다.
효과 : 방어력, 냉기저항 증가.
강화시 효과 : 방어력, 냉기저항 증가. 힘, 지구력, 매력 중 한 가지 옵션이 확률적으로 생성.
꿀꺽.
기본 옵션은 옷이나 방어구라는 기능에 충실하지만, 강화시 확률적으로 붙는 옵션이 탐난다. 얼른 현재 가지고 있는 강화석의 숫자를 세어 본다. 모두 22개. 지금까지 안 쓰고 모아두다 보니 어느새 꽤 모여 버렸다.
크윽. 공포와 죽음이시여. 어찌 저를 또다시 시험에 들게 하시나이까.
“아가씨, 인벤토리 여유 얼마나 되요?”
“난 이백 오십 정도.”
“그럼 제 물건 좀 잠깐 맡아 주세요. 이거 담아가게.”
“알았어.”
곧바로 미엘과 제랄딘은 서로 무언가를 주거니 받거니 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뒤에 미엘은 커다란 동굴곰의 시체를 그대로 인벤토리에 쑥 하고 담아 버렸다.
형진은 그제서야 정신을 퍼뜩 차리고는 얼른 말했다.
“그 곰 손질하는 건 저에게 맡겨 주시죠.”
“괜찮으시겠어요? 가죽 벗기는 것부터 시작해서 꽤 힘들텐데. 워낙 덩치가 큰 놈이라.”
“물론입니다.”
“알았어요. 다만 요리를 하게 되면 저를 꼭 불러주셔야 해요.”
“약속하겠습니다.”
특제 요리 때문에 형진의 요리라면 학을 떼더니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곰고기만큼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다. 혹시 그녀의 종족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이 동굴의 주인이나 다름없던 동굴곰 녀석을 때려잡고 나자 이쯤해서 돌아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딱히 단서도 없고 이 큰 동굴을 다 뒤지려면 하루 이틀로는 될 일도 아니니 말이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오늘은 이쯤에서…”
그렇게 말을 꺼내던 형진은 문득 시야에 들어온 동굴 한켠에 시선이 우뚝 멈추더니,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진님?”
뭘하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다가오던 미엘은, 형진이 단검을 꺼내더니 동굴 벽을 툭툭 찌르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동굴 한 켠이 우르르 무너지자 깜짝 놀랐다.
“이건…”
“놈의 식량 창고였던 모양입니다.”
앞서 느꼈던 희미한 견과류 냄새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분명 이 의뢰를 대장장이 길드에서 맡겼을 때 개 같은 동물을 이용해서 찾으려던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히지만 이 숨겨진 식량 창고는 동굴곰이 자신의 변과 흙, 바위 등을 마치 황토벽을 쌓듯 발라서 막아 놓은 탓에 개들의 후각을 속일 수 있었던 모양이다. 형진 또한 강화가 되지 않은 사냥개의 코장식만을 보유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찾아내지 못했을 정도니까.
“잠시만요.”
형진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 작은 동산처럼 쌓여 있는 견과류 더미를 파헤치더니, 그 안에서 약한 불의 기운을 내뿜고 있는 반지 하나를 찾아냈다.
바로 의뢰 목표인 홍염의 인장 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