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33
-10933
“훌륭합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일단 말한 대로 만들기는 했지만, 괜찮을까 모르겠어.”
“어떤 점이 말씀이십니까.”
“이 정도의 자원이라면 다른 걸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뭐… 자네의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아니네만.”
그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은 일종의 갑주다. 하지만 추종자들이 사용하는 것과는 규모 자체가 다르다. 얼핏 보기엔 갑주라기보다는 장갑차나 잠수정 같은 느낌의 거대한 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착용자의 덩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 신형 갑주의 착용자는 다름아닌 누에들이기 때문이다.
“누에들의 표피 자체가 강력한 방어력을 지니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인간들에게나 해당되는 일일뿐, 우주에서의 포격전이 되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두 방에 나가떨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버티고 바로 회복으로 손상을 되돌릴 수 있다면, 전함이나 포함 같은 걸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히는 일이 되겠지요. 생명체와는 달리, 기계는 자기 수복 능력을 구현하는 것이 훨씬 어려우니까요.”
본래대로라면 생명체보다 기계의 수리가 더 쉬운 것이 상식이겠지만, 신들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 버린다. 어찌 보면 빛의 신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기술이 크게 발전하지 못한 이유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기술이란, 결국 수요가 있어야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허세와 망상에게 말한 내용은 누에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힘을 통해 강제로 굴복시키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그들을 이해시킬 만한 설명도 필요하다. 제대로 납득시키기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결정을 강제하게 되면 결국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는 일. 그렇게 쌓인 불만이 언젠가 엉뚱한 형태로 폭발하는 일이 없도록 관리를 해줘야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씩 이해를 시켜가다 보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그들이 말하는 효율과 자신이 말하는 효율을 일치시킬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이래저래 누군가를 이끌어 간다는 건 골치아프고 피곤한 일이다.
“확실히… 함선 한척을 만드는 것보다 누에들을 중무장시키는 쪽이 빠른 건 사실이지. 의지의 성채라면 이미 생산 라인이 완성된 상태이기도 하고.”
이차대전 당시 미국은 리버티쉽이라고 이름 붙여진 화물선을 만들었다. 이 선박은 무시무시한 생산 속도로 유명한데, 공사 시작 2일 째에 자재절단, 6일째에는 벌크헤드, 10일째는 하부 갑판이 완성되고 14일에는 의장 공사가 진행되어 24일이 되면 진수가 되었을 정도다.
그야말로 한 달에 한 척이 찍혀 나오는 셈이었고, 최단 기간에 건조된 리버티쉽은 공사 시작에서 선박 진수까지 4일 15시간 30분이 걸렸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뽑아낸 결과,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무려 이천 칠백 십 척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선박이 만들어졌다. 물론 부실 공사로 항해중에 붕괴해서 침몰하는 사례도 있긴 했지만, 그 무지막지한 생산력이 전쟁의 향배를 가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은 지금도 충분히 가능하다. 동력부와 방어 시스템, 그리고 무장 등을 포함해야 하니 좀 더 시간이 걸릴 수는 있겠지만 단순히 물량을 뽑아내고자 마음먹는다면, 지구 전체의 조선소를 이용할 수 있으니 훨씬 더 엄청난 속도로 더 많은 물량을 뽑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오직 지구라는 하나의 행성 하나만을 가지고도.
하지만 수천 척의 함선을 단기간에 뽑아낸다 한들, 거대한 우주를 놓고 벌어지는 대전쟁에서는 이것도 그리 큰 숫자라고 할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선박을 뽑아내도 그것을 운용할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우주라는 생소한 환경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치명적인 각종 무기를 다루는 것까지 제대로 된 선원을 양성하는 일은 어떻게 보면 함선을 만드는 것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누에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훨씬 간단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밖에 없다. 공통의 의식을 갖는 그들은 전장에서 얻은 새로운 경험을 바로 새로 태어나 성장하는 개체가 활용할 수 있는데다, 무지막지한 번식력까지 갖추고 있으니 물량전에서는 다른 어떤 방법보다도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는 기술이 사장되어 버린 이쪽 우주와 다를 바가 없어지고 만다. 때로는 조금 멀리 돌아가더라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갖춰가야 하는 부분도 있게 마련. 따지고 보면 아스트라페 같은 무기로 빛의 군세를 압도할 수 있는 것도 그런 것들이 차곡차곡 쌓인 결과이다.
“둥지에 대한 방어 체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쉽지는 않아. 다만 스틱스를 만든 경험이 제법 훌륭하게 적용이 되었지. 그 커다란 덩치에 물리적인 장갑을 덧붙이는 것은 쉽지 않지만, 보호나 황혼 같은 권능을 통해 최소한의 방어능력을 갖추는 것은 가능한 일이니까.”
“그 정도만 되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누에의 둥지도 결국은 살아있는 누에들의 집합체이므로, 최소한의 방어능력을 갖추게 되면 역시나 회복 같은 능력으로 보완이 가능해진다. 게임에서도 힐러가 있을 경우와 없을 경우, 파티의 생존성이나 전투 능력이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결국 전투에서도 즉각적인 회복과 재투입이 가능하다면 기존보다 몇 배나 전투 능력이 상승되는 효과를 가진다.
“다음은 이거야.”
허세와 망상은 뿌듯한 표정으로 다음 것을 소개했다.
“은신 능력을 갖춰서 기존의 광학 탐지 장비나 레이더 같은 것으로는 절대 발견이 불가능해. 장거리 탐지 장비가 없어서 인공위성을 통해 제원을 받아내야 하지만, 최대 몇 광년이나 떨어진 장소에 은밀히 숨어 있다가 탑재된 네 발의 아스트라페를 발사하면, 어지간한 행성 급의 물체라도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어. 프로젝트 어새신. 드디어 완성했네.”
“오오, 훌륭합니다.”
새로운 방어구를 지급받은 누에가 물량과 더불어 몸빵을 담당한다면, 프로젝트 어새신이라고 불리는 이 신병기는 우주 각지에서 벌어질 대공세에서 적의 군세에게 가해질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펀치 역할을 맡게 된다. 보이지 않는 머나먼 암흑 속에서 돌연 튀어나오는, 빛을 뛰어넘는 속도를 지닌 날카로운 창. 이것이라면 설령 빛의 신이 어떠한 수단을 준비해 놓았다 한들 확실하게 분쇄하는 것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초광속을 자랑하는 알큐비에레 드라이브의 특성상 기존에는 스틱스나 우주용으로 개조된 거대한 잠수함에서만 사용이 가능했던 아스트라페를 보다 작은 규모로 더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부분이다. 괜히 이 신병기의 프로젝트명이 어새신이라고 붙은 게 아니라고나 할까.
“내가 만들어놓고 할 말은 아니네만, 솔직히 이건 너무나도 두려운 무기야. 만에 하나 다른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이럴 때 만큼은 제가 신인 것이 다행스럽습니다. 최소한 제가 죽고 난 후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동감이야. 최소한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안심이 되지.”
인간이라면 결국 언젠가는 다음 대의 지배자가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취지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악용하는 사례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단순히 제도나 법규 같은 것만이 아니라 무기 역시 마찬가지. 특히 아스트라페 정도가 되면 일순간에 하나의 세계에 종말을 불러올 수도 있으니만큼 더욱 더 주의가 필요하다.
사실 어떻게 보면 허세와 망상의 언급은 형진 본인에게 넌지시 건네는 경고일 수도 있었다. 본래부터 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신이 된 자라는 부분이 아무래도 그의 불안감을 자극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으로 태어난 자가 반드시 완벽하다는 보장도 없다. 멀리 볼 것도 없이 허세와 망상 본인도 수많은 잘못을 범했고, 이제는 소멸해서 사라지고 없지만 파괴와 재생이라는 아주 나쁜 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성된 장비와 무기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기 위해 다시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났다. 물론 그 와중에도 소규모의 국지전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한계 상황에 도달한 채 고립된 빛의 군세들이 발악하듯 봉쇄를 풀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탓이다.
“바일람 성계에서의 전투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피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수고했다. 터미널.”
누에들에게 방어구를 지급하는 일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속도를 따라잡는 건 아무리 강력한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방어구를 지급했다고 해도 완벽하게 피해를 없애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는 그만큼 절박한 상태로 덤벼들고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한다 해도 예상 외의 변수가 너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형진은 터미널로부터 전해 받은 피해 보고서를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한 차례 빛의 권능을 사용했지만, 곧바로 상대를 포착한 어새신의 반격으로 추가 공격에 의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초의 일격에 휩쓸린 누에들의 소멸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 외의 피해는 대부분 전사가 아닌 부상 정도로 그쳐서 대부분 빠른 속도로 회복 중이다. 때문에 죽든 말든 일단 병력을 들이밀고 봤던 과거에 비해 피해로 인한 사상자 수의 단위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평소에 형진의 옷깃 속에 가만히 몸을 감춘 채 제대로 숨조차 쉬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터미널이라고 불리는 누에 공주도 오늘 만큼은 어쩐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이다.
“뭔가 할 말이 있나.”
“그것이…”
“없으면 말고.”
“아닙니다. 있습니다. 실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해봐.”
자신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계속 보고서를 살피고 있는 형진을 바라보며 누에 공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저희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형진은 그제서야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는 누에 공주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야? 뜬금없이.”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누에 공주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는 더욱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저희들은 급격하게 숫자를 불려가고 있지만, 사실 전투 이외의 다른 분야에 있어서 저희들의 효용은 없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둥지의 유지를 위해 균류를 재배하긴 하지만 클로리스인들처럼 다른 종족들을 먹여 살릴 정도의 생산 능력은 갖추고 있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다른 종족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저희들이 한창 전쟁이 격화되던 때의 숫자를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일일까 싶어서.”
형진의 강력한 지배를 받기 전이라면, 그들은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둥지의 숫자를 줄여서 우주 각지에 퍼져 있는 개체의 숫자를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했을 것이다. 어차피 그들의 효용은 전쟁이라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만 필요한 것이니 굳이 평화시에 자원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제는 그런 선택을 스스로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빛의 신을 어떤 식으로든 굴복시키고 나면, 이후의 일은 오직 형진에게 달려 있다. 지금 이렇게 강화된 전력을 가지고 또다른 우주로 나아갈 것인지, 그저 지금까지 그가 공언해 왔던 대로 서로 다른 두 개의 우주에 생명의 불꽃을 가득 채울 것인지는 오직 그의 선택에 달린 일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종족이 갈 길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커다란 변수가 갑자기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의 승패가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지금의 시점에서 누에들은 미리 앞으로의 일을 준비할 필요가 있음을 인지하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그런 얘기로군.”
형진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말했다.
“어째서 너희들이 전쟁 외에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전쟁에만 쓸모가 있으면 안 되는 건가?”
“그건…”
“당장은 따로 대안이 없어서 일단 너희들을 중심으로 군을 운용하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금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질 거야.”
형진은 보고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말했다.
“너희들은 충분히 위대해질 수 있는 종족이야. 아니, 잠재력만 놓고 보면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지. 지금은 비록 전장에서 그 재능을 썩히고 있지만, 통합된 하나의 사고라는 건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신보다 위대해질 수도 있는 능력이야.”
“다, 당치 않습니다. 신보다 위대해지다니…”
누에 공주는 당황해서 얼른 부정했지만 형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은 다음 대에 지식을 물려주는 과정에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해. 어떻게 보면 문명이라는 것 자체가 그런 영속성을 유지해 가는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들로 이루어진 것이니까. 하지만 너희들은 그런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어. 하나의 개체가 얻은 지식이나 경험이 그대로 모두에게 전해지니까. 한 명은 요리를, 또 한 명은 가공을, 또 한 명은 전투를… 이런 식으로 경험과 지식을 쌓아가다 보면, 어쩌면 나중에는 다른 모든 지성을 갖춘 이들을 앞지르고 신과 같은 영역에 스스로 발을 딛을 수 있겠지. 내 말이 틀린가?”
형진의 말에 누에 공주는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 얼른 그 자리에 엎드리며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결코 그런 식의 욕심을 부릴 생각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누에 공주는 정말로 겁을 먹고 있었다. 설마 이런 이유 때문에 보호와 균형이 스스로 형진에게 속하는 무리수를 써가면서 자신들의 의지를 제한하고 묶어둔 것인가 싶은 생각마저 떠올리고 있었다.
사냥이 끝나서 더 이상 사냥할 동물이 없으면 그 다음 차례는 사냥개가 되는 법. 이것은 지구는 물론이고 다른 어떤 세계에서도 통하는 격언이다. 하물며, 그 사냥개가 언젠가 더 크고 위대하게 자라나 주인을 압도하고 오히려 역할이 바뀌어 버릴 위험성이 있다면 어떨까. 백에 아흔 아홉은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화근을 뿌리 뽑으려 들 것이다.
형진은 그렇게 공포에 떠는 누에 공주를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왜? 내가 설마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들을 멸족시키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누에 공주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예라고 해도, 아니라고 해도 그 다음에 이어질 상황에 대비할 수가 없었다. 이 우주 전체에 존재하는 모든 누에들이 이번만큼의 하나된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개체의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종족 전체의 일이 되어 버리면 어떨까. 죽음을 초월한 듯 보이는 그들이기에 오히려 더 큰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작품 후기 ==========
일단 한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