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63
-10962
[네?]움리드의 생존자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릴에게 전해진 것은, 통칭 방주라 불리는 거대한 우주선이 형진에게 나포되고서도 사흘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형진은 그 사흘이라는 시간 동안 돌아온 자들의 숫자와 그들이 처한 상태, 그리고 과거 그들에게 있었던 일들을 살폈다. 그리고 움리드 최후의 날, 이번에 발견된 것과 같은 형태의 방주가 최소 백 척 이상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방주들 중에는 적당한 정착지에 도착해서 새롭게 움리드의 문명을 꽃피우기 위한 준비에 들어간 것도 있을 것이고, 정처 없이 우주를 떠돌다가 그 안에서 또 다른 재앙과 직면하여 사라져 버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낱같은 희망을 지닌 채 이번에 돌아온 방주처럼 다시 갔던 길을 되짚어 오고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나요?] “일단 나스트론드에 계류 중이다. 링 월드에 아직 생물 병기의 흔적이 잔존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 외에도 어떤 위험 요소가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그렇군요…]
릴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다. 비로소 이전의 일들을 잊고 새로운 자신의 삶을 가꾸어 가고 있는 와중에, 그 모든 것을 부정하듯 과거의 잔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잠시 말이 없던 릴은 조금은 처연한 목소리로 형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는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죄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지금껏 형진이 만나본 그 어떤 종족도 이르지 못한 찬란한 문명을 건설했으나, 그 과정에서 그릇된 선민의식으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학대하여 결국 스스로 멸망의 단초를 만들고 말았다. 이것은 온 우주에 생명의 불꽃을 찬란하게 꽃 피우고자 하는 형진의 의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들은 이미 멸망과 방랑의 과정에서 충분히 벌을 받았다. 게다가 그러한 일들을 불러 일으켰던 세대들은 이미 대부분 죽어 버린 상황이기도 하고.”
동면이라는 형태로 우주를 향해 나선 이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발하던 당시의 인원이 그대로 방주에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최초 출발할 당시 이 방주에는 총 만오천명의 인원이 탑승하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 현재까지 살아남은 인원은 삼천여명에 불과하다. 오랜 세월을 거쳐 우주라는 이름의 끝도 없는 수렁 속을 헤매는 과정에서 물자 부족과 사고 등의 이유로 하나둘씩 죽음을 맞이했고, 결국 오분의 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인원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처참할 정도의 생존률이긴 하지만, 릴 외에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링 월드 쪽의 사정보다는 그래도 나았다. 관리하는 자 없이 자동 시스템만으로 유지되었던 링 월드 쪽의 동면장치와는 달리, 방주의 경우에는 항해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형진과 규설이 만났던 것과 같은 소수의 인원이 상시 동면 상태에서 깨어나 대기하는 중이었고, 그들의 노력과 희생 덕분에 그 정도의 인원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와중에 처음 출항 당시의 승조원 대부분은 시간의 흐름 속에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물자와 에너지 부족에 직면하자 조금이라도 더 젊고 어린 이들을 살리고자 항해와 관련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을 마친 노쇠한 이들이 먼저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다. 처음의 이할 정도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삼천여명이라는 숫자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럼…] “문제는 과거에 그들이 저질렀던 죄가 아니야. 그 모든 일의 원인이 되었으며, 또한 살아남은 이들이 아직까지도 놓지 못하고 있는 생각이지.”“…”
릴은 입술을 깨물었다. 형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움리드는 과거 잘못된 선민의식으로 인해 자신들의 문명을 망치고 또한 거대한 희생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한 일을 겪었다면 당연히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 고치는 것이 인지상정.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고난의 와중에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은 오히려 더 견고하고 강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이것은 쉽게 이해하기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자신들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체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까지 끈질기게 살아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자신들을 지금과 같은 처지로 몰아붙인 자들에 대한 증오와, 그런 지금의 처지를 구원할 절대적인 무언가에 대한 열망,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희망이 서로 맞물려 지금까지 그들을 악착같이 살아남도록 만든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이해한다 치더라도, 형진으로서는 그들이 그와 같은 선민의식을 계속 이어가도록 놔두기 어렵다. 다른 모든 이들 가운데 오직 자신들만이 특별하다고 믿는 이러한 의식은 수많은 종족들을 조화롭게 이끌어야만 하는 형진으로서는 마치 생살을 파먹어 들어가는 종양처럼 느껴진다.
“그것을 억누른다면, 저들은 오히려 반발하며 숨은 곳으로부터 자신들의 왜곡된 신앙을 키워갈 것이다. 그것을 방치한다면, 저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인정받은 것이라 여기며 키워가게 되겠지. 어느 쪽이 되었든 나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야.”
“…”
당장 지구에서의 예만 보더라도, 나라조차 가지지 못했던 한 민족의 선민의식이 만들어낸 종교를 믿는 자가 지구 전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형진을 비롯한 엘리시온의 신들이 도래하기 이전의 일이긴 하지만, 21세기 말이 되면 전 세계 인구의 70퍼센트가 아브라함 계통의 유일신교를 믿게 될 것이라는 연구 결과마저 있었을 정도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예가 되겠지만, 움리드가 과거 링 월드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낸 종족임을 감안하면 그들이 다시 이전처럼 융성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날 지는 아무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신들 가운데 누군가 불측한 마음을 품은 자가 있어 그런 그들의 신앙을 자신에게로 끌어들인다면, 이것은 후세에 이르러 커다란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있다.
[그렇다면… 신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십니까.]아무래도 좋았다면, 모처럼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 잘 지내고 있는 릴에게 이러한 일을 말할 필요가 없다. 과거 그들의 성녀로 살아갔던 이라고는 하지만, 그럴 생각이 있다면 그녀의 존재 자체를 비밀로 하고 움리드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도록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진은 자신을 불러 이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릴은 그것이 단순히 벌어진 일에 대한 결과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이해했고, 그래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이다.
형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서도 릴을 자신의 일에 끌어들이는 것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그러나 릴은 그녀가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움리드에게 있어, 그녀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다.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의 상징과도 같은, 그래서 어찌 보면 살아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고난을 겪은 그들에게 있어 릴이라는 이름의 소녀는, 수없이 많은 시간을 건너 자신들에게 도래한 희망 그 자체나 다름없다.
다른 엉뚱한 자가 움리드라는 종족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릴을 앞세워 그들을 통제하는 것이 형진의 생각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다른 세계의 신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고, 그릇된 선민의식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가기 위한 열쇠. 그것이 바로 릴이라는 이름의 소녀다.
“나는 네가 나의 가족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네?]
릴 스스로도 자신이 눈앞의 신에게 쓰기 좋은 도구일 수밖에 없다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체념하는 기분으로 물어본 것인데, 형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예상치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가족… 이라고요?] “그래.”형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너는 이미 우리 가족들에게 있어 식구로 받아들여진지 오래야.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너는 이미 가족이나 마찬가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보다 단단한 결속을 맺을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현재 상황에서 예상할 수 있는 가장 골치 아픈 사태는, 릴이 형진의 생각과는 다른 누군가와 맺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맺어지는 사태가 벌어지면 여러모로 골치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그것은 바로 선점뿐이다.
[저를… 취하실 생각이신가요.]릴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형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작은 요정 모습의 소녀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그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 되겠지.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
“하지만 지금 네 표정을 보아하니, 그랬다가는 크게 원망을 받을 것 같구나.”
릴은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그 자리에 엎드려 죄를 청했다.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금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은 채 다시 말했다.
“너의 모습을 보아하니, 이미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는 모양이구나.”
[네?]
“그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나의 가족 가운데 한 명과 맺어지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어쨌든 가족은 가족이니까.”
가만히 손을 뻗어 바닥에 엎드린 릴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운 형진은 푸근한 표정을 지은 채 다시 물었다.
“말해 보도록. 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
릴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아직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형진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다시 말했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없는 건가?”
그제서야 릴은 화들짝 놀라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인가.”릴은 입술을 깨문 채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아도 좋은 것일까. 그런 일을 했다가, 오히려 그에게 미움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아직 상대의 마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와 맺어지겠노라 신께 청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일까.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역시 결과는 같았다. 누군가와 맺어져야만 하고, 그것을 지금 당장 결정해야만 한다면 지금의 그녀에게 있어 그 대상은 결국 하나 뿐이다.
릴은 손을 뻗어 자신의 허리춤에 매어진 작은 노리개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것을 건네줄 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며 잠시 망설였다.
혹시 지금 자신이 내리는 이 결정이 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여기서 그의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미움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요즘 어색하고 서먹해져 버린 관계마저 어그러지면 어떻게 하나.
허리춤에 매어진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자꾸만 망설이는 릴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형진은, 짐짓 모른 척하며 다시 되풀이해서 물었다.
“그것이 누구냐고 묻지 않는가.”
조금은 노기마저 서린 그 음성에 릴은 비로소 결심을 굳힌 듯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저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면… 크루그 왕자님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 후기 ==========
풋풋도 좋지만 쓰는 내가 암걸릴 것 같아서 더는 못하겠다.
그러니 이만 맺어져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