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79
00978 [실사] =========================
“둘 다 눈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 아뇨. 그냥 좀 일 때문에 밤을 좀 새버려서.”
“저런. 좀 쉬엄쉬엄 하지 그랬어. 이리 와봐.”
“…”
마침내 예정했던 날짜가 되었다. 외부적으로는 현장 실사, 내부적으로는 새로 맞이한 두 아내를 위한 밀월여행이라는 다소 복잡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왕성을 나서려던 형진은 오늘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규설과 힐리에타의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뭐든 적당한 게 좋은 거야. 무리해서 건강이라도 해치면 어쩌려고 그래?”
“죄송합니다.”
“유의하겠습니다.”
충혈 되고 살짝 부어오른 눈을 회복과 균형의 권능으로 치료해주는 그의 손길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영락없이 남편에게 직접 치료받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새색시들의 모습이지만, 사실 그녀들이 부끄러워하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들의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버린 건 야근을 무리하게 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오늘 있을 여행 때문에 잠을 설쳐서도 아니다. 진짜 이유는 바로 아유무에게 선물 받은 그림책 때문이었다.
그것은… 실로 지금까지 그녀들로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문화적인 충격에 의해, 나중에는 그 안에 담겨진 표현조차 민망한 여러 가지 지식들로 인해 몰입해 버렸다. 그녀들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존재들. 어지간한 일로 그렇게 눈이 충혈 되고 부어오를 일이 없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몰입해 있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다.
“자, 다 됐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갈까.”
“네.”
오늘따라 다소곳하고 부끄러움 많은 모습을 보이는 둘의 모습에 형진은 빙긋 웃고는 함께 공간을 넘어 목적지로 향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삼각주 위에 세워진 제법 커다란 항구도시였다. 두 개의 강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딱 봐도 교통과 무역의 요충지로서 주변국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지리적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료로 보긴 했어도, 역시 일이 만만치는 않겠어.”
잠시 언덕 위에서 도시의 전경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형진은 뒤따라서 공간을 넘어온 규설과 힐리에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녀들의 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만큼 이곳에 오래 묵어야 하는 거니까, 어떤 면에서는 더 좋은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
어차피 실사라고 해서 형진이 직접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할 생각 따위 요만큼도 없는게 사실이다. 추종자 시절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두 우주를 통치하는 주신의 자리에까지 오른 상태가 아니던가. 앞서서 움직이는 리더라는 것이 얼핏 좋아보일지는 몰라도, 따르는 추종자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 그럼 일단 내려 가볼까.”
“네.”
형진이 손을 풀어주자, 규설과 힐리에타는 토글 기능을 사용해서 미리 준비한 이곳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가슴을 강조하고 잘록하게 허리를 조인 상태로 풍성하게 부풀어 오른 치마의 과장된 모습은 얼핏 지구 역사에서 빅토리아 시대를 연상시키는 느낌이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어찌 되었든 막상 그것을 입어야 하는 규설이나 힐리에타로서는 이래저래 불편한 느낌을 저버리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예쁜데.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옷을 바꿔 입은 둘의 모습을 보며 형진이 그렇게 말하자, 힐리에타는 조금 불평 담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이곳의 여자들은 전투가 나면 바로 몰살당할지도 모르겠어요.”
“어째서?”
“좁은 입구로 도망치다가 엉덩이가 끼기라도 하면 꼼짝도 못할 테니까요.”
“뭐? 푸?. 푸하하하하하!”
과장된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아주 근거가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개미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완성시키기 위해 치마에 틀을 만들어 넣기까지 한 상태이니, 정말로 다급한 순간에 좁은 통로에 사람이 몰리기라도 하면 힐리에타의 말대로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잠시 웃느라 정신을 못 차리던 형진은 살짝 볼멘 표정을 짓고 있는 힐리에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에게 끌어들이고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며 말했다.
“오늘은 첫날이니 일단 그대로 가고, 천천히 이곳의 유행을 바꿔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유행을요?”
“원래 이런 과장된 스타일은 보는 사람도 금방 질리게 마련이거든.”
“아하.”
빅토리아 시대도 그랬지만,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은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부자연스러운 패션이 유행하는 것도 결국 주목 받고 싶은 욕망의 표출이 아니던가. 왕성에서 재봉을 맡고 있는 요정들은 이미 수많은 세계의 패션을 접한 경험이 있고, 그러한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진 복식들은 이곳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여성들의 복식에 비하면 나름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의 옷으로 갈아입은 형진의 뒤를 따라, 그녀들은 천천히 언덕을 내려갔다.
발달한 교통과 그것을 통해 벌어들인 풍족한 자금을 증명이라도 하듯, 도심은 질 좋은 판석으로 깔끔하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 위로 이런 저런 마차들이 줄을 지어 돌아다니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상당히 깔끔한 편이다.
“관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더니, 정말인가 보군.”
인구가 많아질수록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문제를 해결하기가 곤란해진다.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도시니까 물 같은 거야 얼마든지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주위에 흐르는 물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건 지구 같은 곳에 존재하는 대도시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일이다.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자 광장 중앙에 놓여진 커다란 분수대의 모습이 보인다. 도시의 번영을 상징하듯 거대한 분수대에는 아름다운 조각상이 나란히 세워진 채 주위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곳이 행정청이고, 이쪽이 재판소인 모양이군.”
사전에 준비된 약도와 비교하며 관공서의 위치를 확인한다. 반쯤은 놀러온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명목상 일하러 온 것이니 이 정도는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분수대 앞에서 주위의 모습을 둘러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사람들의 시선이 스쳐지나간다. 아무래도 다른 이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외모가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 끄는 모양이다.
“인식 저하의 기능을 활성화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이 영 부담스러운지 규설이 조심스럽게 제안했지만, 형진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보라고 해.”
“네? 하지만…”
“나도 가끔은 예쁜 내 마누라들을 자랑하고 싶거든.”
“…”
천연덕스러운 형진의 말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다시금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반쯤은 농담 섞인 빈말이긴 해도, 자신의 외모를 칭찬하는 걸 기분 나빠할 여자는 없는 법이다.
“일단 대략적인 건물들의 위치는 알겠어. 이제 숙소를 찾아가 보는 것이 좋겠군. 자, 가실까요. 아가씨들.”
“네.”
과장된 동작으로 자신들을 에스코트하는 형진의 모습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동서양의 미를 적절하게 나눠가진 듯한 느낌의 그녀들이 긴장을 풀고 미소를 짓자 그렇지 않아도 흘깃거리던 사람들은 일순 얼이 빠진 듯한 모습으로 홀린 듯한 표정이 되어 버리고 만다.
셋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며 마치 런웨이를 걷는 듯한 모습으로 광장을 가로질러 미리 준비해둔 숙소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입구에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추종자 가운데 하나가 그들의 모습을 발견하자 얼른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를 건네 온다. 규설은 마중을 나온 인물이 산군 가운데 한 명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보았다.
“이곳인가.”
형진은 저택의 입구를 스윽 한 번 훑어보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다. 얼핏 아담한 작은 저택처럼 느껴지지만, 도시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광장으로부터 몇 분 떨어져 있지도 않은 거리 안에 이런 식으로 작게나마 정원을 갖춘 저택이라면 절대로 그 가치가 낮지는 않을 것이다.
“나쁘지 않군.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아버지인 즈라탈이 마중 나와있지 않나 싶어 힐리에타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다른 이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셋이서 보낼 오붓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비켜준 모양이다.
“저택의 열쇠입니다.”
기다리고 있던 추종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고풍스런 느낌의 열쇠 하나를 건넸다. 물론 단순히 입구를 열고 닫는 용도의 열쇠는 아니다. 이 저택의 기능을 온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일종의 마스터키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힐리에타는 열쇠를 받아들고 잠시 그것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 저택에는 일반인들은 알아볼 수 없는 수많은 기능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안은 물론이고 보이지 않게 감추어진 설비에 이르기까지, 미리 와서 이곳을 준비한 아버지의 손길이 느껴져서 힐리에타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마음이 찡해지고 말았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십시오.”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산군은 다시 한 번 셋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난 뒤, 마치 흩날리는 바람처럼 그곳으로부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들어가 볼까.”
“네.”
열쇠를 건네받은 힐리에타가 문을 열고 앞장을 섰다. 고풍스런 아치를 지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순간 조금 번잡했던 도시의 공기와는 다른 청량한 기운이 확 하고 풍겨 나온다.
“어쩜.”
어지간해서는 탄성을 내는 일이 없는 규설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밖에서 봤을 때는 그냥 작은 정원이 달린 아담한 저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지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오니 완전히 다른 세상에 와버린 듯한 느낌이다.
공기부터가 확 다른 느낌의 아름다운 정원. 하얗게 빛나는 건물과 반짝거리는 작은 유리 온실. 커다란 궁전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셋이서 시간을 보내기엔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는 공간이다.
“그냥 적당히 해도 되는데 말이지.”
형진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규설과 힐리에타의 감탄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규설은 조심스럽게 온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작은 화분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는 내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잠깐만.”
그것만으로도 꽤 멋졌지만, 뒤따라온 힐리에타가 다시 문을 닫더니 열쇠를 문에 꽂고는 뭔가 조작을 한 뒤 다시 열어 보이자 이전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와…”
“이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모습이 화분 몇 개를 가져다 놓은 아담한 온실이라면, 열쇠를 꽂고 조작을 가한 뒤에 다시 열었을 때의 모습은 작은 해안을 통째로 떼어다 놓은 듯한 느낌이다.
커다란 유리 천장 아래로 작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오솔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작은 등대가 세워진 푸른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는 것이 정말 단순한 공간 왜곡이 맞는 것인가 싶을 정도다.
“고작 며칠 사이에 이런 걸 꾸며 놓은 건가.”
뒤따라온 형진이 작게 감탄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힐리에타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이게 끝이 아닌데요.”
“뭐? 그럼?”
“계곡, 산장, 호변, 스키장… 그리고 지금 보시는 해변. 이렇게 다섯 가지 공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나와요.”
“헐?”
힘을 써도 너무 썼다. 고작해야 잠깐 동안 머물다갈 별장에 이게 무슨.
누가 이렇게 해놨는지는 굳이 따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형진이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일을 잘 처리하라는 의미에서 즈라탈을 실사단의 수장으로 뽑아놨는데, 그는 안카로 사라는 이름이 붙은 이 항구 도시에 대한 영유권 분쟁보다는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손자에게 더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쯤되면 추종자들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이다. 모르긴 해도 몇몇 신들에게 도움을 청했을 테지. 일개 추종자가 신을 부려서 이런 걸 만드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뒤에 버티고 선 것이 형진이라면 얘기는 조금 달라지게 된다.
“아빠도 참…”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힐리에타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더니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차려놓은 밥상을 마다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렇게 생각지 않아?”
“…”
힐리에타는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밤을 새가며 읽었던 그림책의 내용들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윽… 날짜가 바뀌어 버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