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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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신탁
“으으음!”
“와아…”
맥주에 잡내를 제거한 곰고기가 팬 위에서 익어가자 긴 의자에 앉은 이들은 절로 엉덩이를 들썩이며 군침을 삼켰다. 형진은 그들의 모습에 씩 웃으며 신경 써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원래 뱃살이 대부분 지방질이 많긴 하지만 곰고기는 특히 더 그런 경향이 강하다. 이렇게 기름기가 많은 부위의 고기는 직화로 구울 때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데, 기름기가 숯불 위로 떨어지면 그을음이 생겨서 음식의 향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숯불구이집에서는 가운데가 볼록하게 솟아있는 형태의 불판을 사용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당장 그런 불판을 구할 수는 없으니 편법을 쓸 수밖에 없다.
형진은 주의를 기울여 주위에 기름이 튀지 않도록 팬을 움직이고, 적당히 고였다 싶으면 따로 준비한 그릇에 그것을 따라내면서 조심스럽게 고기를 구웠다. 그리고 어느 정도 양면이 구워졌다 싶을 때, 팬을 불에서 내린 뒤 초벌로 구워진 고기를 그릴 위에 얹었다.
촤아아아악!
그러자 앞서 팬 위에 구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렬한 소리와 향기가 확 하고 밀려든다. 팬을 불 위에서 내리자 다 된 건가 싶어서 군침을 흘리고 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싶을 때 기습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헉!”
“우화아아아…”
형진은 그릴 위에서 고기를 살짝 구워 숯불 향을 더한 뒤 그것을 긴 사각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미엘님. 이 냄비 좀 살짝 식혀 주시겠어요? 너무 차갑지 않게.”
“네.”
미엘은 얼른 형진이 말한 대로 양파 초절임이 담겨져 있는 냄비를 마법으로 살짝 식혀 주었고, 그 사이 형진은 손바닥만 한 작은 접시를 꺼내 그곳에 양파 초절임을 담아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기를 잘라 드릴 테니, 거기 있는 양파와 함께 드시면 됩니다.”
“네!”
입을 모아 대답하는 모습이 꼭 둥지에서 어미새를 기다리는 아기새들 같아서 형진은 다시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집게로 고기를 잡고 식가위를 이용해 한 입 크기로 썰어내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제랄딘과 유아의 포크가 번개처럼 날아든다.
“앗!”
“훗! 첫 번째는 제가!”
제랄딘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잽싸게 고기를 폭 찍어서 자신의 접시로 가져온 다음 나이프를 써서 요령껏 양파 초절임을 곁들여 입에 넣었다.
“으으음!”
입에 넣는 순간 숯불 구이 특유의 그윽한 향이 가장 먼저 반기고, 한 입 깨무는 순간 고기 안에 감추어져 있던 육즙이 터져 나온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게 씹히는 데다, 곁들인 양파의 새콤함과 아삭함이 더해지면서, 이미 한 차례 미각을 점령했던 육즙의 풍미가 한 번 더 되새김질 하듯 살아나 혀를 농락한다.
제랄딘의 뒤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급히 포크를 움직인다. 포크와 나이프로 삼겹살을 먹는 모습이 뭔가 웃기다. 카트린은 아무래도 안 되겠던지 양파 초절임을 곁들이기 위해 포크를 수저처럼 사용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얼른 따라 하기 시작한다.
형진은 한 덩이를 더 구워서 내놓은 뒤, 그릇을 꺼내 뜸이 잘 든 밥을 조금씩 덜어 각자에게 다시 건네 주었다.
“아, 이거 그 때… 뭐였더라.”
“초밥! 맞죠?”
일전에 초밥을 먹은 경험이 있는 유아와 카트린이 얼른 아는 척을 했지만, 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간을 따로 했었던 거고, 이건 그냥 밥이야. 잘 봐. 어떻게 먹는지 보여줄 테니까.”
형진은 잎채소에 밥과 고기를 얹고 다시 양파 초절임을 얹은 다음 잘 싸서 한 입에 넣었다. 아무래도 겨자과의 식물인 모양인지 잎사귀로부터 퍼져 나오는 알싸한 향이 먼저 입 안 가득 퍼져 나온다. 그리고 뒤이어 잎사귀 안에 숨어있던 고소하게 잘 지어진 밥과 육즙 가득한 곰고기, 그리고 새콤한 양파 초절임이 어우러져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형진이 하는 걸 본 카트린은 얼른 쌈을 하나 싸서 자신을 안고 있는 크루그에게 먹여 준다.
“오빠, 아…”
“아.”
“맛있어?”
“응.”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누이가 알아서 먹여주는 모습을 보여주자, 곧바로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에게 쌈을 싸서 먹여주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양 조절을 못해서 복어처럼 볼이 불룩해진 상대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 식으로 웃고 즐기다 보니 커다란 곰고기 한 덩이와 밥 한 솥이 정말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말았다. 남자라고는 형진과 크루그 뿐인데, 무슨 여자들이 이렇게 잘 먹어대는지 모르겠다.
“우우… 배불러요.”
“큰일이네요. 일부러 품이 넉넉한 드레스로 입고 왔는데, 숨 쉬기가 힘들어요.”
어쩐지 열심히 먹어대더라. 제랄딘이나 다른 시녀들도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갑갑한지 자꾸 몸을 뒤척인다.
형진은 비어져 나오려고 드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정중하게 모두에게 인사를 했다.
“열심히 먹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오늘은 이만 영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림과 유아에게 뒷정리를 맡기고 포장마차 밖으로 나오자 제랄딘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관청의 허가와 수속은 모두 마쳤어요. 이걸 받으세요.”
그러면서 한 장의 서류를 내민다. 살펴보니 노점 허가증이라고 적혀 있다.
“원래는 수도 안에서 노점을 하는 것에 딱히 허가가 필요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토너먼트 기간 중에는 워낙 많은 이들이 몰려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중앙대로 인근이나, 강변에서는 허가 받은 자들만 노점을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죠. 이건 바로 그 허가증이에요.”
“이런.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해도 알아서 이렇게 챙겨주니 고마울 뿐이다.
“맛있는 식사를 만들어주시는데 이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런가요.”
“다만, 요즘 너무 잘 먹다보니 어쩐지 살이 찐 거 같아서 살짝 고민스럽네요.”
“하하.”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제랄딘은 미엘과 시녀들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카트린과 림은 몰아치는 식곤증을 견디지 못하고 일찍 침실로 향했고, 형진은 매크로 수련을 위해 유아를 데리고 뒤뜰로 갔다.
“아까 가르쳐 준 거 말고, 어제 가르쳐 줬던 걸 해봐.”
“네?”
어둑한 뒤뜰에서 단 둘이 되자 조심스러운 기색을 보이던 유아는 형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 그게…”
유아는 어젯밤의 일을 떠올리고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간신히 머리 속 한 켠에 밀어놨던 기억들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탓이다.
형진은 그런 유아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내가 책임질 테니까 얼른 해 봐.”
“채, 채, 책임이요?”
“왜? 뭔가 문제라도?”
“…”
물론 형진이 말한 책임은 어제 같은 일이 벌어져도 한 번 더 그 귀찮은 일을 도맡아 처리해 주겠다는 얘기였다. 의뢰를 선점하기가 어려워서 아무래도 오늘은 의뢰 수행을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이참에 유아가 매크로 수련을 할 때 왜 그런 상태가 되는지 확인해 볼 참이었다.
하지만 유아는 형진의 말을 전혀 다르게 이해했다. 흔히 남자가 여자에게 책임진다 할 때의 그런 상황을 떠올린 것이다.
“얼른 해보라니까.”
“네…”
유아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어제 배운 매크로 수련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잡념과 상념과 기타 등등 오만가지 잡생각들이 가득한 탓에 제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살짝 몸에서 땀이 날 정도가 되자, 미처 깨닫지 못한 사이에 그런 잡념들은 점차 사라지고 그녀는 또다시 매크로 수련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
형진은 조금 떨어진 상태로 그 같은 유아의 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 역시 이전에 은신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당시의 형진은 엄연히 명상과 같은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라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주위의 상황을 잊은 채 몰입한다 해도 차라리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유아는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딴 생각을 하는지 동작도 굼뜨고 계속해서 형진을 흘깃거리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으나, 어느 순간이 되자 다른 모든 것을 잊은 채 오직 매크로 수련만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몰입하고 있다.
이것은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형진은 가만히 유아의 앞으로 다가갔다.
눈앞에 손을 저어 보았다. 하지만 유아의 눈은 마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멍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손뼉을 쳐보았다. 아무리 몰입을 했더라도 보통 이 정도면 화들짝 정신을 차리게 마련이지만, 유아는 여전히 격렬하게 매크로 수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형진은 확신했다. 이것이 단순히 집중이나 몰입에 의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자신은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매크로 수련을 이어왔는데, 어째서 이런 경험을 하지 않는 것일까.
정확히 지금 유아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이대로 놔두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모른다는 얘기는, 그 현상이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지 역시 알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형진은 잠시 더 지켜보다가 격렬하게 춤을 추듯 수련을 이어가고 있는 유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하지만 유아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수련을 계속했다.
다가가서 뺨을 톡톡 건드려 보아도 마찬가지. 혹시나 해서 슬쩍 가슴을 만져 봐도 마찬가지다.
“흠.”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형진은 유아를 품에 꽉 끌어안은 채 귀를 꽉 깨물면서 속삭였다.
“그만 멈춰. 이 바보 곰탱이 메이드야.”
그제서야 유아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더니, 비로소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
하지만 정신을 차린 순간,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형진은 유아의 움직임이 멈추자 비로소 품에서 풀어주며 말했다.
“정신이 들었어?”
“그, 그게…”
갑작스런 포옹에, 귀에 남아 있는 감촉까지. 유아는 뭐가 뭔지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형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그런 유아에게 말했다.
“너, 앞으로 방금 그 수련은 금지다. 대신 오늘 가르쳐 준 것만 수련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좋아. 오늘은 됐으니까 그쯤하고 이만 씻고 자.”
“네.”
황망한 표정으로 유아가 도망치듯 집 안으로 사라지자, 형진은 유아가 수련했던 체력 증진용 매크로 수련을 해보았다. 물론 그에게는 아무런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과 유아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선 성별이 다르고 태어난 장소가 다르다. 또한 섬기는 신 또한 다르다. 그 외에도 굳이 차이를 꼽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역시 가장 의심스러운 건 두 가지다. 태어난 장소와 섬기는 신.
“크루그.”
형진은 창문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을 불렀다.
“저도 해보라고요?”
어제의 일도 그렇고 오늘의 일도 계속 지켜봤던 당사자라 역시 이해가 빠르다.
“어떻게 하는지는 봤지?”
“네.”
크루그는 짧게 대답하고는 체력 증진용 매크로 수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슬슬 땀이 배어날 정도로 매크로 수련을 해도 역시나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가장 의심스러운 두 가지 차이점 가운데 하나인 태어난 장소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된다.
“결국 섬기는 신이 문제라는 건데…”
아무래도 신과 관련된 문제는 접근하기가 곤란한 점이 있다. 신의 존재를 모른다면야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형진 본인부터가 공포와 죽음의 집행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전처럼 뭔가 오류가 있는 건 아닐까요?”
“그럴지도.”
그렇다면 형진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는 총괄 지부장에게 문의를 해보는 편이 낫다. 이전에 겪었던 낙인의 오류와 같은 문제라면 그것이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