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86
00985 [기적] =========================
즈라탈은 모든 조사가 마무리 되자 곧바로 그 내용을 형진에게 전했다.
[조사는 이상과 같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수고했다.]형진은 올라온 보고를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즈라탈이 이번 사건의 책임자들과 나눈 대화 또한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즈라탈이 총리에게 건넨 말을 보고 형진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총리의 말대로,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아무리 우주 공간에서의 원활한 통행이 중요하다고는 해도, 몇 억이나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행성을 아무런 조치 없이 그냥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얘기를 그냥 우스개 소리로 넘길 수 없는 것은, 실제로 형진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게다가 그가 지금과 달리 주위를 돌보는 일에 태만해지기라도 하면, 자칫 그러한 일들을 결정하는 권한이 그의 대리자에게 건네질 수도 있다.
즉, 이것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일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그의 대리자들이 정말로 그런 결정을 편의라는 이유로 아무렇지 않게 내린다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를테면, 이번에 무장파를 부추겨 안카로 사에서 사건을 일으켰던 것처럼.
즈라탈이 굳이 심문 내용을 일일이 보고서에 전부 첨부한 것은, 어찌 보면 중대한 책임을 맡고 있는 스스로에게 경계를 내리기 위함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즈라탈이나 이후에 형진의 대리인으로서 책임을 맡게 될 자들만이 아니라, 그 모든 책임의 정점에 서있는 형진에게도 해당되는 내용이다.
[관련자들은 전원 추방. 개척 행성으로 보내도록.] [조치하겠습니다.]일단 사건을 일으킨 자들에 대한 것은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그것으로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형진이나 즈라탈이 이곳에 온 이유, 바로 안카로 사의 영유권 분쟁 문제가 남은 것이다.
[안카로 사는 중립 자치 지역으로 만든다. 이것에 관한 협의를 관련국과 진행하도록.] [신전은 설치하지 않으실 계획이십니까.] [그래.]양국은 이 도시를 형진에게 넘겨서 신의 땅으로 만들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형진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편하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벌여가면서 관철시키려 했던 그들의 의도를 인정하게 되면 이것이 좋지 않은 선례로 남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사건의 관련자들이 추방되기는 했어도, 그 정도의 희생으로 원하는 장소에 신전을 유치할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면 이후에 유사한 사례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몇몇이 처벌을 각오하고 비슷한 일을 벌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도, 이것은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알고 조치하겠습니다.]즈라탈은 그러한 말과 함께 보고를 마쳤다. 형진은 그와의 연락을 끊고는, 다시 눈앞에서 테이블을 마주한 채 식사에 열중하고 있는 규설과 힐리에타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때, 먹을 만 해?”
기다렸다는 듯이 힐리에타가 대답했다.
“그냥… 그래요.”
뒤이어 규설도 말했다.
“맛없는 건 아닌데, 역시 뭔가 부족한 느낌이에요. 아니, 이 경우엔 너무 넘친다고 해야 하나.”
하루 종일 저택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셋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식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역시 처음에 느꼈던 대로, 이곳의 음식은 향신료를 너무 많이 쓰는 경향이 강하다. 그녀들이 조금 불만스러워하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역시 전 진님이 만드신 음식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저도요.”
그렇게 말하며 조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는 둘의 모습에 형진은 피식 웃어 버렸다. 남편이라고는 해도 명색이 신인데 집에 가서 밥해달라고 보채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이걸 계속 먹자니 역시 뭔가 불만스럽고. 진퇴양난까지는 아니더라도 곤란한 건 마찬가지다.
“알았어. 그럼 적당히 재료를 구해서 집에서 요리를 하는 걸로 하자.”
“정말요?”
“감사합니다!”
형진의 말에 둘은 반색했다. 힐리에타는 당장이라도 일어나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거리기까지 한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요?”
살짝 둘의 표정에 경계의 빛이 어린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냥 별것 아니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이래저래 그의 변태성을 잔뜩 경험하고 보니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려고 그러나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이다.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요리를 조금 도와줬으면 해서.”
“저희가요?”
“안 될까?”
조금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렇게 반문하는 형진의 모습에 둘은 조금 당황했다.
“그, 그거야… 안 될 건 없지만.”
“당연히 도와드려야 하지만… 오히려 방해나 되지 않을는지.”
규설은 잠시 동안 형진에게 요리를 배운 적이 있으니 그나마 낫지만, 힐리에타의 경우는 완전히 문외한이다.
“괜찮아. 이건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함께 만든다는 것이 중요한 거니까.”
“그런 거라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모르는 것이 많으니 도와주셔야 해요.”
“물론이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더라도, 셋은 나온 음식들을 말끔하게 비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시장 쪽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벌어졌던 사건으로 인해 시내는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조금은 어수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하기야 화재로 인해 불타버린 잔해라든가, 어둠이 도시를 뒤덮고 난 뒤 사라져 버린 이들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
“신전… 역시 만들지 않으실 생각이신가요?”
형진의 팔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은 채 걸음을 옮기던 힐리에타가 문득 그렇게 물었다. 성역이 발동된 이후 위급한 환자들에 대한 치료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이번 일로 인해 다친 모든 이들을 낫게 했다는 뜻은 아니다. 당장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만 보더라도 자잘한 상처를 붕대등으로 감싼 채 지나는 이들이 계속 눈에 띄는 상황이다.
힐리에타의 말은, 단순히 그런 이들에 대한 연민의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들의 마음이 형진에게로 일거에 쏠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런 말을 건넨 것이다.
“저 역시 이번 일을 꾸민 이들은 괘씸하지만, 평범한 이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형진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규설 또한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렇게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자칫 형진의 결정에 간섭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런 모습이 또한 형진의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선례를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신전을 세우지는 않을 생각이야. 그래도 약간의 은혜를 베푸는 정도라면 상관없겠지.”
형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만히 손을 하늘 위로 치켜 올렸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으로부터 하나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발견했다.
“어? 저, 저길 봐!”
“뭐지?”
곧바로 하늘 위를 옅게 뒤덮고 있던 구름이 확하고 퍼져 나가며 그곳을 통해 밝은 태양빛이 비춰지기 시작한다. 갑작스런 그 현상에 고개를 치켜 든 사람들은 그곳으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을 보고는 크게 놀랐다.
“저건…”
“스틱스인가요?”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기동 요새 스틱스의 모습에 힐리에타와 규설 역시 놀란 표정이 되었다.
본래대로라면 스틱스가 안카로 사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거대한 재앙이 이 땅을 덮쳤을 것이다. 어지간한 작은 행성 규모의 이 거대한 기동 요새는 출현만으로도 중력을 교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형진이 혹시 이 땅에 거대한 징벌을 내리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떠올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지진과 해일로 대표되는 거대한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마치 보슬비가 내리는 것처럼 하늘 위로부터 작디작은 물방울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 작은 물방울들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물방울들이 촉촉하게 자신들의 피부를 적시는 순간 그들은 기적을 경험했다.
“어?”
“사, 상처가…”
작은 물방울들은 단순히 어제의 사건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작은 병들, 이를테면 부스럼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병들이 마치 독기가 빠져 나가는 것처럼 그들의 몸으로부터 사라져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작은 물방울 모두가 신의 권능이 담긴 성수였던 것이다.
“아픔이… 사라져 간다.”
“오, 신이시여!”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에게 내려진 기적을 감사했다. 어떤 자들은 급히 집으로 뛰어가 자신의 가족들에게도 이 기적을 경험시키고자 했다. 당장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들은 그릇이든 뭐든 동원해서 하늘로부터 떨어져 내리는 성수를 조금이라도 더 모으고자 애썼다.
“단순히 성수를 뿌리는 것뿐이라면 그냥 해도 상관없지만, 그래서는 이것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겠지. 뭐… 스틱스 정도 되면 무시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형진의 말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작게 웃었다. 확실히, 하늘이 열리며 저런 거대한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이란 건 누구라도 쉽게 잊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느릿하고 천천히 떨어져 내리던 작은 물방울들은 어느 순간이 되자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구름을 밀어내고 모습을 드러냈던 기동 요새 스틱스의 모습 또한 안카로 사의 하늘 위에서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다. 사람들은 그 신비하고도 위압감 넘치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찾아온 신이 단순히 무섭고 두렵기만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 모든 일이 끝을 맺자, 형진은 다시 규설과 힐리에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 그럼 다시 시장에 갈까. 성수를 적당히 뿌렸으니, 이곳의 식재료들도 한층 싱싱하고 맛있게 변했을 거야.”
“네?”
단순히 사람들의 상처를 보듬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던 둘은 형진의 말에 살짝 당황해 버렸다. 하지만 곧이어 그들은 왕성에서 형진이 요리를 할 때 항상 유아가 신성력을 사용해 식재료들을 다듬는 것을 떠올렸다.
“겸사겸사. 좋잖아?”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웃는 그의 모습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마주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들의 남편은 두 개의 우주를 지배하는 강대한 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족들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장난기 넘치는 신이기도 하다.
그렇게 웃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길가에 늘어서 있던 풀과 나무들이 천천히 꽃을 피워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것은 꽃과 바람이 권능을 사용한 것처럼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다. 단지 하늘로부터 쏟아져 내린 성수의 힘으로 인해 식물들이 지니고 있던 생명력이 일시에 만개했을 뿐.
하지만 그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기적의 연속으로 보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현상이었다. 창가에 내놓은 화분은 물론이고, 대로변에 심어져 있던 가로수까지 마치 신의 은총을 찬양하듯 일시에 꽃을 피워내는 그 장대한 광경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저도요. 주제넘게 나서지 말라고 꾸중하시면 어쩌나 싶었는데.”
규설과 힐리에타의 말에 형진은 씩 웃어 보였다.
“말로만?”
장난기 넘치는 그의 모습에 규설과 힐리에타는 까르르 웃었다.
“뭘 원하세요?”
“말씀하세요. 오늘의 저희들은 뭐든 들어드릴 각오가 되어 있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형진이 반응했다.
“그렇다면 말이지. 후후후. 후후후후.”
“…”
“알몸 에이프런이란 것을 알고 있나?”
순간 규설과 힐리에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알고 있다. 확실하게 알고 있다. 아유무가 건네준 동인지들 중에는,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다.
둘의 반응으로부터 그녀들이 알몸 에이프런이 뭔지 알고 있음을 확인한 형진은, 씩 웃으며 말을 맺었다.
“요리를 돕겠다고 했지?”
“그, 그랬죠.”
“내가 원하는 것은 둘이서 알몸 에이프런 차림으로 날 도와주는 거야.”
“…”
규설과 힐리에타는 서로를 바라보고는 이내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뭐든 하겠다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이 정도는 각오한 상태다.
둘이 허락의 뜻을 비추자, 형진은 어쩐지 한층 열의가 넘치는 듯한 모습으로 시장을 휘저으며 식재료들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누가 봐도 셋이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을 보는 수준이 아니다. 규설과 힐리에타는 한편으로는 난감해 하면서도, 모처럼의 밀월여행이 간단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예감에 젖어들었다.
========== 작품 후기 ==========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후방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