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tant Kill RAW novel - Chapter 990
00989 [일과] =========================
눈을 치우는 일을 마친 그녀들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하는 일은 별 차이가 없었다. 거리를 청소하고,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인사하는 식이다. 인간 세상에 내려간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했던 탑와와 루벨라가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로, 정말 소소한 일들뿐이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한 곳에서 그녀들을 위해 열어준 바비큐 파티에 참가한 일 정도.
분명한 건, 얼핏 맹해 보이는 눈앞의 귀여운 여신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신도라고 부르기엔 뭔가 미묘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럴 기회가 있다면 오늘 만난 이들의 대부분은 충분히 신도나 추종자가 되고도 남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 피곤해. 가서 목욕하고 푹 쉬어야겠다. 같이 갈 거지?”
“나도?”
“응. 싫어?”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리 신이라도 이렇게 한 나절 동안 육체노동을 했는데 피곤함을 느끼지 않을 턱이 없다. 길을 가는 사람들을 잡고 물어봐도, 명색이 신씩이나 되는 존재들이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결국 탑와와 루벨라는 그날 친구에게 이끌려 목욕까지 풀 코스로 함께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고 따뜻한 물에 목욕까지 한 탓인지, 그녀는 자신의 숙소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그대로 무너지듯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이 되었다.
“선생님! 이거 같이 해여!”
“같이 해여!”
살짝 혀 짧은 목소리로 자신에게 매달리며 눈을 빛내는 아이들의 모습에 탑와와 루벨라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이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니 절로 그런 표정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려 천 피스짜리 직소 퍼즐. 한 번 붙들고 집중하기 시작하면 서너 시간은 우습게 지나가 버리는 물건이다.
“그럼 다 같이 해볼까?”
“네!”
인간 아이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환수 아이들은 이런 걸 특히 좋아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동화책 같은 걸 읽어주는 걸 제일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 직소 퍼즐이라든가 보드 게임 같은 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자기들이 먼저 하자고 보챌 정도다.
아이들이 가져온 것은 어린이용이라 밑그림이 첨부되어 있다. 탑와와 루벨라가 허락하자 아이들은 얼른 상자를 열고 먼저 그림을 펼쳐 놓고는 그것에 맞는 조각을 찾기 시작한다.
같은 직소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도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먼저 가장 자리에 들어갈 퍼즐 조각을 찾는 아이들도 있고, 그림과 맞춰보며 빠르게 위치를 찾아 나가는 아이들도 있다. 저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탑와와 루벨라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어 버린다.
엘리시온에 처박혀 있을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스로 계산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녀는 또한 자신이 뭔가 불안하고 위태위태한 이들이 옆에 있으면 눈을 떼지 못하는 성격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수호신이라는 존재는 원래부터 그런 숙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뒤늦게서야 그런 자신의 성격을 확인하고는 그런 식의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했을 정도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다. 같은 수호신이라도 성격까지 전부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그건 물벼룩과 클로렐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지금 이 자리에 물벼룩과 클로렐라가 있으면 어떨까. 아마도 그녀는 아이들을 돌본다는 생각보다는 직소 퍼즐 그 자체에 빠져들어 버릴 것이다. 지금의 자신처럼 한 걸음 떨어져서 퍼즐을 맞춰가는 아이들을 살피는 대신, 아이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즐기는 쪽이 되어 버리지 않을까.
탑와와 루벨라는 어쩐지 직접 눈으로 그 장면을 본 듯한 느낌에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만약이라는 경우의 수를 놓고 생각해 봐도, 백이면 백 자신의 친구는 그런 식의 행동을 보일 것 같다.
아이들을 돌본다는 측면에서 놓고 보면 그것은 사실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과 보다 친근한 관계가 될 것은 분명하다.
사실 이건 어느 쪽이 더 좋다 나쁘다를 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설령 그렇게 구분 지을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이 물벼룩과 클로렐라처럼 행동하기는 어렵다. 그건 흉내 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누군가의 행동을 따라한다고 해봐야, 결국 언젠가는 파탄이 날 수밖에 없다. 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는 탑와와 루벨라도 잘 알고 있다.
“거기 아니야!”
“아니야! 여기가 맞아!”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흑요호 아이 하나와 산군 아이 하나가 퍼즐 조각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마음에 든 파란색 퍼즐 조각을 서로 차지하려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탑와와 루벨라가 끼어들었다. 문자 그대로 두 아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무슨 일이지?”
“그, 그게…”
“이거요. 이거 여기 맞는데 자꾸 아니라고.”
“그래?”
아이들이 다툴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무작정 그만 두라고 소리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런 식의 대응은 대화의 단절을 일으키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문제가 생겨났을 때 아이로 하여금 어른에게 기대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두 번째로 주의할 점은 감정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개입을 해야 한다는 점. 시기를 놓치게 되면 처음 문제가 되었던 일 자체를 잊고 싸움 자체에만 몰입하게 되므로 해결이 몇 배는 어려워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들을 차분하게 지켜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럼 한번 맞춰보자.”
실제로 맞춰보니 둘 다 틀렸다. 하기야 어른도 맞추기 어렵다는 직소 퍼즐이다. 얼핏 눈대중으로 보기만 해서는 맞추기 어려울 수밖에.
머쓱해진 두 아이를 다독여서 맞는 자리를 찾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방금 전의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다른 조각으로 관심을 돌린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싸울 기세였던 두 아이는 금새 머리를 맞대고 새로운 조각의 위치를 찾기 위해 골몰하기 시작했다.
“대단하네.”
“뭐가?”
“아이들 다루는 거. 나는 애들이 싸우고 울기 시작하면 정신이 하나도 없던데.”
“그런가.”
아이들을 같이 돌보고 있던 수호신 하나가 감탄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탑와와 루벨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는 물벼룩과 클로렐라라면 애초에 싸움 자체가 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그녀라면 아이들의 이목을 자신에게 고정시켜서 할 틈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무서운 건 그 모든 것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탑와와 루벨라가 절대로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반대로 물벼룩과 클로렐라 역시 그녀처럼 문제가 커지기 전에 중재를 한다든가 하는 식의 대응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탑와와 루벨라는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싸움에 제 때 개입해서 문제가 커지기 전에 화해시키는 것도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다.
직소 퍼즐에 빠져서 왁자지껄 떠들어 대던 아이들은 간식 시간이 되자 방금 전까지의 일을 잊은 것처럼 간식을 담은 수레 쪽으로 몰려갔다. 탑와와 루벨라는 그런 아이들을 다른 수호신들에게 맡긴 채, 어질러져서 마구 흩어져 있는 퍼즐 조각을 다시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선생님! 선생님!”
“응?”
“이거요!”
“…”
뭔가 싶어서 돌아보니 방금 전에 퍼즐 조각을 가지고 싸우던 아이 중 하나가 그녀에게 푸딩을 내밀고 있었다.
“나 주는 거야?”
“네!”
“그럼 같이 먹을까?”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또 다른 아이 하나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든다.
“저도요! 저도요!”
“안 돼! 선생님은 나랑 같이 먹을 거야!”
“아니야! 나랑! 나랑!”
탑와와 루벨라는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두 아이가 자주 충돌하는 진짜 원인 중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기왕이면 아이들 말고 멋진 남자들한테 이렇게 인기가 있으면 좋을텐데.
“자, 그럼 다 같이 먹을까.”
두 아이를 무릎에 같이 앉히고는 함께 푸딩을 먹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서로 경쟁하듯이 푸딩을 먹여주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다르지 않기는.
아이들과 함께 푸딩을 먹으면서 탑와와 루벨라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렸다. 물론 떼쓰고 투정부리는 아이들을 달래는 건 그야말로 지옥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귀여운 짓으로 피곤함을 날려주기도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를 돌보는 일이 이런 식으로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냥 이대로 아이들이나 돌보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보니 어느새 하루가 후딱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샤함미다.”
“선생님, 빠빠.”
하루 종일 열심히 논 탓에 벌써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아이들이 부모들의 품에 안겨서 집으로 돌아간다. 수호신들은 그런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는 어질러진 것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저기… 혹시 진님한테 뭐 얘기 들은 것 없어?”
“무슨?”
“나라를 돌보라던가 하는 식의 얘기… 말이야.”
“…”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문득 수호신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을 걸었다. 순간 탑와와 루벨라는 움찔하는 반응을 보였지만, 주위의 다른 수호신들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 반응을 보였다.
“어, 그럼 설마…”
“너도?”
탑와와 루벨라는 어쩐지 좀 허탈해지고 말았다. 보아하니 자신에게만 그런 제안을 한 것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맡은 수호신들에게 죄다 같은 제안을 했던 모양이다.
이럴 거면 그냥 다 같이 불러놓고 얘기할 것이지.
하지만 그건 사실 일종의 면접 같은 행위였다.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서 이 수호신이 그 역할을 맡아도 될 만한지 파악하기 위한 단계였다고나 할까.
“에이, 난 또 나한테만 제안한 건 줄 알았네.”
“쳇. 조금은 두근거렸었는데.”
“뭐? 그게 정말이야?”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인정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그런 느낌 말하는 거야. 오해 하지 마.”
자신에게만 제안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수호신들은 그제서야 마치 막아두었던 댐을 터트린 것처럼 왁자지껄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르긴 해도 제안을 받은 뒤로 죄다 속으로 끙끙 앓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떻게 하나 싶어서 막막했는데.”
“내 말이.”
“아바타를 새로 얻는다고는 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나도 막막했거든.”
사실 다른 이들 역시 같은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뭔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단지 혼자서 모든 걸 끌어안고 가야만 한다는 중압감에서 조금은 해방되는 느낌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수호신들은 한결 짐을 던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다른 수호신들과는 달리 탑와와 루벨라는 조금 상이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과는 달리 나라를 돌보는 일은 한 명의 수호신이 하나의 나라를 전담하는 형태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달리 각각의 수호신들을 경쟁시킨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한시름 놨다는 듯이 떠들고 있는 것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쳇. 누가 변태 아니랄까봐.”
“응? 무슨 얘기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 먼저 갈게.”
탈의실을 빠져나온 탑와와 루벨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찾아가는 대상은 다름 아닌 공포와 죽음. 형진이 반려로 맞이한 세 여신 가운데 한 명이었다.
========== 작품 후기 ==========
일요일은 뭐 이리 시간이 잘 가는지.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저녁이네요. 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