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20)
망나니학 개론-120화(120/300)
#120
이틀째 날.
날이 밝음에 따라 우리는 다시 마차를 타고 신성 왕국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마차 안에 자리한 인원 구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곤 어제와 같은 풍경이었지만, 그 면면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우욱.”
새파란 얼굴로 내 소매를 붙잡은 앨리스가 제 얼굴을 움켜쥔다. 벌써 몇 번인지 모를 헛구역질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우릴 노리던 어쌔신들을 처리하고 난 뒤, 여관으로 돌아간 나를 맞이한 것은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던 수많은 술병의 잔해였다.
내가 자리를 비웠던 것이 고작 한 시간 남짓. 하지만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다.
주량엔 자신이 있다던 베르너와 디아크는 이미 실신해서 술병과 함께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고, 남아 있는 이들은 각자 신나게 떠들며 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 태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로운 모습. 그것에 나는 발치에서 굴러다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윽?!”
어지간한 양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실 수 있었던 나조차 기겁할 정도의 독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내가 나가기 전에도 이들은 이미 살짝 취한 상태였다. 당연히 이런 독한 술인지 모르고 가져왔을 테고, 이성이 흐려졌을 테니 무심코 마신 것일 터.
실제로 그녀들은 그때는 그렇게 독한 줄 몰랐다고 변명했다.
“다시 마법 걸어줄까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이시스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앨리스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녀는 질색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항마력이 높아서 자연적으로 거부하게 돼. 오히려 그쪽에 힘이 빠지면 더 힘들어지더라.”
“하긴 마법도 만능이 아니니까요.”
마법 명가의 아가씨께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녀도 전날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그 옆에 있던 유리아에 이르러선 반쯤 죽음에 이른 상태. 나는 고개를 들어 유일하게 멀쩡한 기색으로 앉아 있던 페트라를 바라보았다.
“네가 있으니 별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죄송해요. 설마 다들 이렇게 주량이 약할 줄은.”
그녀는 면목이 없다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니 페트라의 설정 중 주당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제국의 변경에서 자라온 그녀는 보통의 귀족 영애보다 거친 삶을 살아왔기에 자연스레 술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거기에 앨리스와 비슷한 익스퍼트 경지임에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유전적인 영향 때문이겠지.
선배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자각은 있는 듯하다. 너무 다그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기에 나는 그것으로 말을 끝냈다.
“그래도 여긴 양반이네요. 저쪽은…….”
레이시시는 시선을 돌려 우리 뒤를 쫓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저쪽 마차에 있는 엘리시아나 마리아의 상태는 나름 양호했다. 하지만 베르너와 디아크가 뻗어버렸기에 그쪽을 넓게 쓰라고 원래는 저쪽으로 배정받았을 터인 앨리스가 넘어와 있는 것이었다.
뭐, 지금 당장은 숙취 때문에 뻗었지만, 신체가 튼튼한 녀석들이니 괜찮겠지. 조금만 더 쉬면 털고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마차는 곧 마을들을 지나쳐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두세 시간 후 점심이 오기 전까지는 쉬지 않을 예정. 사흘마다 말을 한 번씩 갈기 때문에 아낄 필요는 없었다.
어젯밤의 일도 있기에 나는 은연중에 주변을 탐색하면서 나아갔다. 물론 하루 내내 그러는 것은 아무리 나라고 해도 피로가 쌓일 것 같아 좁은 길목이나 습격하기 좋은 위치로 보이는 곳을 중심으로 살폈다.
하지만 그런 내 우려와는 달리 사방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하긴 그렇겠지.’
살려 보낸 어쌔신은 아마 우릴 습격한 놈들 중 우두머리 격일 터. 제법 한가락 하는 수준이었다.
앨리스보단 약하지만 그 외의 일행들은 어렵지 않게 처리했을 수준이었으니. 페트라 정도가 대항할 수 있었을까.
나는 녀석을 살려줌으로써 여러 가지 정보를 흘렸다.
이쪽은 이미 너희가 습격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단신으로 그것을 막아낼 수 있는 실력자이며, 허튼수작은 통하지 않는다.
어쌔신들은 자신들이 장기짝에 불과할 뿐이란 것은 알고 있겠지만, 무의미하게 희생당하는 것은 아무리 그들이라도 사양하겠지.
더군다나 그들이 생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을 터. 적어도 내 주변에 예사롭지 않은 녀석들이 은밀하게 나를 지키고 있다는 의심을 하겠지.
어느 쪽이든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할 것이다.
‘역시 살려 보낸 것이 더 좋은 판단이었군.’
만약 그 자리에서 내키는 대로 전부 죽였더라면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몇 번 더 습격을 감행했을지 모른다. 사지가 절단이 났다곤 하지만, 생생한 목격자를 남겨두고 왔으니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잘 전달했겠지.
‘이빨은 남겨둘 걸 그랬나.’
어쌔신 계통의 클리셰답게 독단을 깨물어 자살하려는 모습에 돌멩이를 입안에 박아 버렸다. 제대로 말할 수 있을지 살짝 의아함이 들었지만, 뭐 그건 그쪽에서 알아서 했으리라 믿었다.
마차 안은 이내 조용해진다. 그저 단조롭게 달려 나갈 뿐이었으니 간밤의 숙취와 그 감각에 익숙해진 이들은 하나둘씩 눈을 감았고, 벽이나 서로에게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펄럭.
“…….”
나는 그 틈에 살짝 연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양피지 뭉치를 넘겼다.
그것들은 성국에 들어가서 할 일을 정리한 문안이다. 한참을 몰두하며 읽어나가던 중,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앨리스가 누운 자세 그대로 양피지의 내용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보고 싶어?”
어제저녁 일행에게 이야기한 것의 연장선이 되는 내용들이다. 성국에 가면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누구와 안면을 터서 뭘 해야 하는지, 어딜 가지 말아야 하며 어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방침이 정해져 있다.
기본적으로 똑똑한 이들이니 대충 가이드라인만 잡아주면 알아서 잘할 터.
‘문제는 이 녀석이지.’
나는 누운 자세로 건네준 양피지에 적힌 글을 읽는 앨리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원래 흑발이었을 머리는 옅은 금발, 아니, 갈색이라고 할 수 있는 색으로 물들어있다.
이목구비는 오밀조밀한 것이 딱 그 나이대 여고생의 얼굴. 꽤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이 세계의 용사였다.
자고로 신과 용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거기에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신을 받들고 있는 나라다.
앨리스가 용사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난리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 원작에서는 2학년에서의 일이었지만, 그것은 조금 더 앞당겨졌다.
“…나보다 글씨 잘 쓰네.”
양피지를 읽던 그녀가 툭고 내뱉는다. 그러더니 누운 그대로 날 올려다보며 작게 웃음을 토해냈다.
“아무리 당신이라 해도 밑에서 보면 웃기게 생겼네.”
나는 그것에 대답하지 않고 녀석의 턱으로 손을 뻗어 살을 잡아당긴다. 그러곤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요즘 나태해졌나 보군. 턱살이 조금 집힐 정도야.”
“……!”
앨리스의 얼굴이 붉어진다.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눈에 쌍심지를 켜며 나에게 달려들려 했지만, 앞자리에서 곤히 자는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난 아직 성장기라 이 정도는 괜찮아.”
“보통 그렇게들 말하곤 하지.”
“…….”
앨리스는 곧 살짝 상심한 표정을 짓는다. 너무 놀렸는가 싶어 살짝 미안해졌기에 건네준 양피지를 되돌려 받으며 말했다.
“뭐, 나는 살을 뺀다느니 하면서 깨작깨작 먹는 것보다 네 쪽이 더 좋다.”
“…그래?”
그 말에 그녀의 눈빛이 다시 밝아진다.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사기를 잘 당할 것 같다.
그래서 더더욱 걱정이었다. 우리가 지금 가는 곳은 사이비나 사기라는 단어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잘 들어. 이번 성국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너야.”
“…나?”
“그래. 여신에게 선택받은 용사, 그리고 그 여신을 섬기는 이들. 둘이 만나면 무슨 작용이 일어날까.”
“음… 떠받들어 모신다?”
일차원적인 대답에 나는 쓴웃음이 나왔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할 터지만, 아쉽게도 성국은 그리 무른 곳이 아니었다.
“틀렸다. 정답은 납치 감금 한다, 다.”
“…뭐?”
“좋은 말로는 교육이나 수련이라 할 수 있겠군. 용사의 이름과 성국의 관계성을 내세운다면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지. 그것은 이들의 신성에 해당하는 일이니까.”
제국은 딱히 국교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삼분지 일에 가까운 수가 성국의 교리를 따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이 앞으로 나서서 성국을 핍박한다면 좋지 않은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너처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 하지만 성국은 마계와의 싸움을 대비하는 위치라 전력을 끌어모아야 하지. 그 상황에서 용사는 먹음직스러운 패다. 아마 평범하게 갔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성국이 날 강제로 초청하다시피 부른 것은 엑스칼리버 때문, 하지만 용사가 나타난다면 엑스칼리버는 순위가 밀릴 것이 분명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돼?”
앨리스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듯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선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그 뾰족하고 차가웠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간단해. 내 애인이 되면 된다.”
“…뭐요?”
그것이 지난밤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앨리스의 가치를 알아본 성국은 그녀의 신변을 요구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성국으로 향하는 것은 그곳에서 볼 이득과 그들의 손에서 앨리스를 지켜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였다.
“무력으로는 대놓고 전부 달려들지 않는 이상 지는 일은 없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에 오르지 못했으면 수락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그들도 나도 입장이 있는 이상 정면으로 수작질을 해오지 못해. 성국이 용사를 모셔야 한다는 주장도 정면에서 깨부수면 된다.”
그것이 바로 앨리스가 내 애인, 즉, 첩이라는 명목이었다.
레이오스 황자의 약혼자는 페트라다. 그렇기에 정실로는 불가능했지만, 그녀가 내 첩이라고 들이민다면 아무렴 그들도 무어라 못할 터.
만약 강제로 손을 쓴다고 해도 내가 날뛰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더해줄 뿐이다.
그 어떤 멍청한 남자가 제 여자가 핍박받는 데 가만히 있겠는가.
“…….”
앨리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고개를 든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좋다고 고백하는 거야?”
그녀는 제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며 살짝 붉어진 표정과 함께 우수에 젖은 눈망울로 날 올려다본다. 그것에 멍해진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난 내가 내뱉었던 말을 다시 복기했지만, 이상한 점은 찾을 수 없다. 그것에 절로 심각한 마음이 들었다.
앨리스의 지능 수준을 재고해야 될 것 같았다.
“…….”
그녀는 여전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한편, 또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한데 뒤섞여 얼굴 위로 드러난다. 나는 그것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어젯밤에 나눈 대화를 잊었어?”
그 말에 앨리스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는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다. 만약 나와 깊은 관계가 되었다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기회가 눈앞에 왔을 때, 미련 없이 나와의 연결 고리를 끊고 돌아갈 수 있느냐.
그런 내 의중을 알아들은 것인지 앨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곤 이내 입을 닫은 채 침묵에 잠겼다.
점심이 가까워짐에 따라 마차는 서서히 속도를 늦춰간다. 밖으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식사하기에 딱 좋은 장소인 것 같아 마부에게 말해 마차를 멈추자 앨리스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며 먼저 밖으로 나갔다.
그 소리에 깨어난 레이시스와 유리야 역시 비틀거리며 일어난다. 아무래도 맞은 편 마차의 상황이 걱정되는 것인지 그녀 둘 역시 눈을 비비며 건너편으로 넘어갔고, 이제 마차 안에는 나와 아직 벽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던 페트라만이 남았다.
“이제 눈 떠도 돼.”
“…….”
나지막하게 내뱉은 내 말에 페트라의 눈꺼풀이 움찔한다. 그러곤 입술을 오물거리며 천천히 입을 떴다.
“눈치채고 계셨나요.”
소드 마스터의 감각을 속이기 쉬울 줄 알았냐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보았다.
“…첩은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설마 눈앞에서 대놓고 바람 피우실 줄은…….”
“…그런 농담은 그만둬라.”
그러다 진짜로 칼 맞을 것 같아서 무서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