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roduction to scoundrel Studies RAW novel - Chapter (133)
망나니학 개론-133화(133/300)
#133
나는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아공간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그 안으로 손을 넣어 깊숙한 곳에 보관 중이던 한 자루의 검을 빼냈다.
“…변함없는데.”
내 몸에 스며든 마기를 흡수했다는 리버의 말에 살짝 기대하며 그것을 뽑아 들었지만, 녹슨 검신은 옛날 그대로였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그것을 검집에 넣고 그 표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찌 되었든 티르빙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그녀가 이렇게 된 것도 나를 지키려다 검성의 오해 때문에 타격을 입은 것이었으니.
티르빙은 자신을 만든 드워프를 찾아간다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 드워프는 흔치 않은 존재일뿐더러 그중에서도 ‘디렌’이란 이름을 가진 녀석을 찾는 일은 아마 더 힘들 것이 분명했다.
성국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아카데미로 돌아가게 되면 얼마 있지 않아 또다시 방학을 맞이했지만, 그때 역시 일정이 있었다.
‘사람을 풀어서 수배해야 하나.’
어차피 돈은 썩어 날 정도로 많다. 디렌을 찾으면 금화를 산더미처럼 주겠다고 의뢰를 내건다면 다들 환장해서 달려들 터.
늦어도 2년 안에는 그녀를 되돌려야 했기에 최소한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디렌을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다시금 티르빙의 본체를 아공간 주머니 저 깊숙이 먼 곳으로 밀어 넣었다.
리버처럼 의식이 깨어 있었더라면 내 손안으로 소환할 수 있지만, 잠들어 있는 이상 저걸 잃어버리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참사가 따로 없다.
이 주머니에도 온갖 도난 방지 마법을 걸어 놓았으니 어지간하면 잃어버리지는 않겠지.
나는 복잡한 생각들은 모두 버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결과가 어떻든 페트라를 살려냈고, 아가레스를 쓰러뜨렸다.
이 정도의 공적이라면 오늘 하루 정도는 농땡이를 피워도 되지 않을까.
“일단 자자.”
어깨의 뻐근함도 그렇고 아직 몸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슬슬 약 기운이 돌아 졸리기 시작한 바.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 * *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누런 빛이 서리며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 누웠던 것 같은데 날은 어느새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얘들, 진짜로 코빼기도 안 비치네.”
나는 아직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보통이라면 교류회 행사가 끝나 연회만 남겨두고 있는 상태기에 다른 이들이 찾아올 법도 했다.
하지만 조금 전, 내 상태를 보고자 잠시 들렀던 실비아의 말로는 며칠에 걸쳐서 진행될 예정이었던 교류회가 성국 측 사정 때문에 오늘 하루로 끝을 맞이한다고 했다.
소란이 소란이었던 만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면 아직 진행하지 못한 교류회는 차일로 미뤄도 되지 않았을까 싶다.
못다 한 행사를 하루 동안 전부 압축해서 진행한 탓에 다른 이들이 날 찾아올 여유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일 터.
물론 그것뿐이라면 열심히 고생하라며 손을 흔들어주었겠지만, 방 안에 누워 창문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온몸이 쑤셔 왔다.
원래 세계였더라면 컴퓨터니 스마트폰이니 붙잡고 몇 날 며칠을 방 안에 틀어박혀도 심심하지 않았겠지만, 겉으로나마 중세 세계관을 표방하는 이곳에 그런 것들이 있을 턱이 없다.
그렇다고 실내에서 검을 수련할 수도 없었고, 마법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봐.”
“…예?”
그렇기에 난 방을 나서서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치료는 끝났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다.”
“아, 저 그게 성녀님께서 오늘 하루는 꼭 붙들고 있으라고 명을 내리셨는데…….”
실비아는 내가 누워 있는 것을 버티지 못하고 나올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는지 미리 성기사에 언질을 한 상태였다. 그것에 인상을 팍 쓰자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리를 비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성국 아니랄까 봐 고지식한 것은 참.’
날 생각해서 한 조치라는 건 알겠지만, 성가시기 그지없다.
‘용사라는 이름이 퍼진 이상 가급적이면 조용하게 해결하고 싶었지만…….’
난 천천히 오른손에 오러를 모았다. 팔라딘급도 아닌 성기사라면 한 번에 기절시킬 수 있을 터. 상대가 상대이니 놓쳐도 질책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나는 손을 휘두르기 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쉽게도 나 역시 성녀의 말을 따르고 싶지만, 성왕께서 부탁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성왕이라는 말에 그의 두 눈이 떨린다. 아무리 성녀의 위명이 높다 하여도 신성 왕국 안에서 성왕을 따라올 자는 없다.
은밀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말에 성기사는 잠깐 고민에 잠기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성녀께서 명하신 대로 계속 이곳에서 경계를 서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용사님께선 저보다 더 강하시니, 몰래 빠져나간다고 하시더라도 전 눈치채지 못하겠죠.”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그의 말에 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고하라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이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내가 사라졌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터.
나는 다시금 아티팩트로 머리색을 바꾸고 오스티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렇다고 해도 이 얼굴 그대로 교류회에 참가한다면 단번에 소란이 일어나겠지만, 슬슬 시간을 보니 마지막 행사인 연회를 하고 있을 터.
보통 반쯤 얼굴을 가린 가면은 이런 연회의 기본적인 소양이니 드러내 놓고 움직이지 않는 이상, 신분이 노출될 걱정은 괜찮았다.
예상대로 바이에른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것이 확인되자 연회장의 출입은 손쉬운 일이었다.
양국의 아카데미 학생들을 포함해 성국의 고위 간부층까지 그 안에 자리해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짤막한 행사 몇 개가 지나가고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내부를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상층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이곳에 온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내 일행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한 것도 있지만, 성국의 분위기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겸사겸사 이 안에 숨어든 마인도 밝혀내려고 했는데.’
팔라딘의 몸에 빙의한 아가레스는 분명 원작에선 없던 전개다. 아마 라이프치히 때의 일로 나에게 수작을 걸어온 것일 터.
그렇다는 것은 그와 별개로 원작에서 등장했던 마인은 분명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였다.
“…여기서 뭘 하고 계시나요?”
돌연, 익숙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그것에 슬쩍 고개를 돌리니 드레스 차림의 실비아가 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한테 들킬 줄은 몰랐는데.”
그것에 나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테라스에 올라오면서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기척과 존재감을 의도적으로 없앤 상태였다. 팔라딘급 정도는 되어야 내 존재를 눈치챌 수 있을 터. 하지만 실비아는 정확히 나를 포착해 냈다.
“당신의 몸을 치료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아무리 기척을 죽여도 그 신성력의 잔향은 저에게로 이어져 있어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소리군.”
“그나저나 뭘 하고 계신 거예요?”
난 그것에 대답하기보다 먼저 슬쩍 밑을 내려다보았다. 성녀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이곳의 이목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애써 기척을 지우며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혹시라도 같이 있는 것이 보인다면 골치가 아파졌다.
“이목이라면 괜찮아요. 조금 피곤해서 쉰다고 하고 뒷길로 올라왔으니까. 여기 창문도 특수한 구조라 밖에서 안쪽은 보이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실비아는 내 속내를 읽은 듯 안심하라며 손을 젓는다. 그러곤 한쪽에 준비되어 있던 와인을 따라 왔다.
“잘 마실…….”
“누가 준다고 했나요? 당신은 아직 환자에요. 환자는 금주가 기본이랍니다.”
영락없이 나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생각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매정한 말에 내 손은 허공을 스친다. 그것에 작게 인상을 찌푸리자니 실비아는 정말로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설마 술만 마시려고 이곳에 왔다는 소리는 하지 않겠죠?”
“그렇다면?”
“팔라딘들을 불러서 방으로 연행하게 할 거예요.”
똑부러지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는 전과 조금 바뀐 듯했다. 아마 이것이 대외적으로 보이는 성녀로서의 모습일 터.
“아까 낮에 말했지. 성궁에도 마인이 숨어들었을 거라고.”
“…아가레스처럼 말인가요.”
실비아는 내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말했더라면 신성 모독을 하지 말라며 소리쳤겠지만, 어제의 일로 마족이나 마인이 성직자의 몸에 빙의해 잠입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왕 측에선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보겠다며 말했지만, 이제 나는 얼마 있지 않아 제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되면 마인의 정체는 영영 밝혀내지 못할 수 있기에 최대한 속전속결로 해결하고자 했다.
“일단 이곳에는 없지 않을까요. 연회장에 입장하기 전에 모두 의례적으로 성수에 손을 씻고 들여보냈는데…….”
“아가레스가 그랬듯 신성에 저항력이 뛰어날 수도 있어.”
그처럼 강하진 않더라도 저항 계통으로 특화되어 있다든가, 아니면 아직 인간의 성질이 짙게 남아 있다든가.
가능성을 이야기하자면 끝은 없다.
“참, 대주교도 참석한다고 했지.”
“네, 그렇죠. 뭔가 있나요?”
“…리버 말로는 대주교가 의심스럽다더군,”
“이유는?”
“관상이라단다.”
그 말에 실비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있는 사실 그대로 전했을 뿐이라며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대주교님은 아니세요. 아까 낮에도 신성력을 사용하시면서 다른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셨는걸요.”
“나도 혹시나 해서 말해봤어.”
그 이후로 우린 말없이 장내 상황을 살폈다.
어제 그 일이 있었음에도 연회장의 분위기는 평온하기 그지없다. 아마 고위 간부를 배치한 것도 성국의 배려일 터.
나는 내 일행들의 뒤를 따라 쫓고 있었다. 혹시나 의심스러운 자가 접근하지 않을까 싶기에.
“…저분이랑은 무슨 관계이신가요?”
그러던 찰나, 실비아는 한창 바티칸 아카데미 대표들에게 둘러싸여 이야기하고 있던 페트라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 약혼녀다.”
“…약혼녀이신가요.”
실비아는 살짝 부럽다는 듯 페트라를 바라본다. 그것에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건 아니지?”
“…누가요?”
“네가.”
“제가요? 당신을?”
“그래.”
내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뻗어 내 뺨을 꾹꾹 찌르며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담아 말해왔다.
“저는 당신이 부러울 뿐이지, 그런 감정은 품고 있지 않으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그건 다행이로군.”
진심으로 안도했다며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불평해 왔다.
“여신께서도 매정하시지. 왜 이런 용사님을 이런 남자 곁에 두시나…….”
“…어?”
실비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다시 농을 던질 찰나, 신성 왕국 측의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앨리스가 상대와 함께 연회장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건.”
그것을 본 나와 실비아는 서로 눈을 맞췄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라나섰다.